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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를 Feb 27. 2022

우유부단도 성향이듯 혼란도 삶의 방식이다.

감히 누가 자신의 정확한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겠는가?

 나는 지금도 물론 혼란에 시달리고 있지만 과거부터 항상 혼란에 시달려 왔다. 어쩌면 성인이 되고 나서, 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 시달리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학창 시절에는 대학 진학, 시험, 그것을 통한 부모로부터의 인정이 삶의 최종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 모든 학업기간이 12년가량 되기에 솔직히 그 당시에는 그런 지루하고 틀에 박힌 쳇바퀴 같은 학업이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고 나 역시 성인이 될 일은 영원히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할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 길고 긴 의무교육은 끝이 났고, 난 목줄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목줄 풀린 강아지는 동네를 방황하듯 나 역시 혼란에 시달리며 나의 내면과 의식이 갈 길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말 그대로 의미와 가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있어 공부를 하는 이유와 해야 하는 이유는 대학을 진학하기 위해서이다. 몇몇 소수의 학생들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내 주변에는 대체로 그랬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진 이유도 특별할 것 없이 일종의 유행이나 사회적 관념에 휘둘리는 것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사실 다를 바는 없었다. 내가 지금에 있어 그리 쓸모도 없는 지식을 공부한 이유는 부모를 만족시키고 인정을 받기 위해서였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생각도 그로부터 생겨난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딱히 공부할 일말의 가치 초차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고등학교에 들어서는 미술 쪽으로 빠져나가 공부에서 손을 놓기는 했다.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이유는 그로 인해 낮은 점수를 받으면 미대 진학이라는 명분이 있어도 딱히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거라는 불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어떻게든 결국 대학은 진학했고, 나는 그 뒤로 혼란에 시달렸다. 스스로가 뭘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왜냐하면 학창 시절에는 내가 수행해야 할 모든 과제가 외부에서 제공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유행에서 비롯되었든, 사회적 관념에서 비롯되었든 모든 것들이 말이다. 하지만 졸업한 뒤로는 내가 내 길을, 내가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일과 목표를 설계해야 했는데 공교롭게도 그런 것을 학교에서 교육해주진 않았다.


 계획과 목표, 비전이라는 것은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거나 자신이 그것에 도달할 거라는 예언이 아니다. 현재의 자신이 그에 도달하기 위한 행동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만약 그 목표에 도달할 것이라는 확신과 자신감이 든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삶의 앞길이 이미 개척된 것처럼 순탄하게 나아갈지도 모른다. 물론 그만큼 더 많은 변수와 장애물을 한꺼번에 만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목표 자체가 없거나 있더라도 확신과 자신감이 없다면 그 사람은 여러 자기의문과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점은 과연 그게 이상한 걸까? 과연 이게 일반적이지 않은 현상인 걸까?




삶의 앞날이 깜깜한 것이 뭔가 문젠가? 삶의 앞날은 원래 깜깜하다.


 우리가 사는 곳은 뭐가 됐든 현재다. 좋거나 싫은 과거를 회상하든, 기대되거나 불안한 미래를 상상하든 우리가 사는 곳은 반드시 현재다. 우리가 자신의 앞날이 깜깜하다고 말하는 것은 현재와 과거의 경험에 의거하여 내려진 결론이다. 창창한 앞날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들은 단순한 상상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래는 깜깜한 것이 맞다고 나는 생각한다. 삶은 어두운 정글을 나아가는 것과 같으며 그 누구도 앞서 갈 수 없으며 동등하게 현재라는 곳에서 같은 거리로 나아가고 있다.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의 미래가 암울하다고 예측하는 근거는 반드시 현재와 과거에 존재할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미래가 꼭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다. 다만 현재와 과거의 실정이 그 정도라면 정말 그런 암울한 미래가 펼쳐질 확률이 높긴 할 것이다. 그 확률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현재에서 무언가를 해야 하며 현재에서만이 그것을 뒤바꿀 수 있는 변수를 창출할 기회를 가진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미래로 미룬다는 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만을 살아가는데 미래라는 것은 결코 오지 않으며 우리에게 오는 것은 오로지 현재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어떤 미래를 상상하건 그것이 꼭 정답은 아니다. 그래도 만약 적극적이며 순탄하게, 즉 자책, 자기 비난 등으로 스스로를 방해하지 않고 유순하게 삶을 나아가고자 한다면 어떻게든 미래를 낙관하고 기대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는 더 적절한 방법일 것이다.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결국 현재에 아직 도달하지 않았으며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어둠이 드리운 숲을 나아가는 것과 같다. 이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럼에도 삶이 혼란스러운 것은 변함이 없다.


 어쩌면 삶에 대한 혼란이라는 것은 단순한 상상의 문제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삶에 대한 확신, 미래에 대한 확신은 그러한 혼란을 덜어주는데 반해, 만약 그 확신에 약간의 의심, 의문이 드는 순간 혼란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혼란은 우리가 삶을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는 일종의 관념이 전제되어 있기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삶이 딱히 가치 있지도 않고 의미 있게 살 필요성도 못 느낀다면 여느 동물들처럼 그저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인 것이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삶의 장애물을 마주치다 보면 필연적으로 그 확신에 의구심이나 회의감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이 말은 결국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혼란이란 우리가 겪어야 할 필연적인 고통이라는 말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미래에 대한 불확신에서 오는 혼란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술이나 담배 등 여러 중독에 빠지는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런 중독은 정말로 그런 불안과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일시적으로 망각하게 해주는 것뿐이지만 말이다.


 결국 삶을 순탄하게 나아가기 위한 최종적인 방법은 그러한 혼란에서 오는, 실존에서 오는, 허무에서 오는 고통들을 받아들이고 음미하는 법을 아는 것일 테다. 그런 고통들은 모두 외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순수한 정신적 고통인데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가? 누군가가 나를 때린 것도 아닌데 도대체 이 고통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며 도대체 어느 부분이 고통스러운 것일까? 머리가 아픈가? 가슴이 답답하고 비수에 찔린 느낌이 드는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거나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가? 도대체 무엇이 이런 고통을 만들어내고 있는 걸까? 단순히 생각과 상상이라는 것이 이런 증상을 발생시킨 것일까?


 어떻게 보면 정신적 고통이라는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다. 외부에서 나에게 외상을 입혀 상처를 낸 것도 아닌데 왜 고통스러운 걸까? 내 생각에 이는 우리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이러한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 자신이 완전한 개인으로써 행동하고 생각하는 인간이라면 타인의 죽음도, 성공도, 실패도, 재앙과 재난도, 주변인에 대한 좋은 소식도 나쁜 소식도 나 자신이 연루된 것이 아니라면 전혀 신경 쓸 일이 아닐 것이다. 또한 나 자신이 사회적 동물이 아닌 완전한 개인으로 탄생한 동물이었다면 그러한 정신적 고통을 느낄 이유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치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그것이 높든, 낮든 그에 대한 정보를 사회에서 습득하기 때문이다. 예로 들어 우리는 처음으로 어떤 운동이나 게임을 시작하면 특정한 운동 장비, 기술, 특정 아이템, 재화 등이 얼마나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추후에 코치나 경험자의 조언과 가르침으로 인해 그 물건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것의 가치는 말 그대로 외부에서 설정된 가치를 부여받은 것이다. 따라서 만약 인간이 사회성 동물이 아닌 완전한 개인적 동물로써 생존한다면 그는 자신의 가치를 딱히 저울질하거나 판가름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자신보다 나은 사람도 못난 사람도 주변에 없으며 그렇기에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여 자신의 가치에 대해 과대평가도, 과소평가도 하지 않을 것이며 자만하거나, 허영심에 빠지거나, 자괴감이나 자책감, 자기 비하로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즉, 정신적 고통을 느낄 일이 없을 것이다. 그가 느낄만한 정신적 고통은 굶주림이나 외상으로 인한 것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의 가치, 나 자신의 가치가 사회에서 비롯되기는 하지만 그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만약 내가 스스로 얼마나 축구를 잘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외부에서 봤을 때 손흥민 수준으로 축구를 잘한다 해도 주변 사람들이 나의 축구실력을 비난하고 혐오하게 된다면 나는 스스로의 가치를 낮게 잡을 것이며 자신감이 떨어지고 위축될 것이다.


 삶과 미래가 혼란스럽긴 하나, 그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한, 그리고 미래에 대한 명확한 확신이 필요하며 스스로가 스스로의 가치를 명확하게 책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면 혼란을 나름 잠재울 수 있음과 동시에 부가적으로 외부에서 어떤 비난과 평가절하가 오더라도 그것이 사실이 아니며 자신을 위축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평가라는 것을 알고 무심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삶을 사는 것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것도 그렇다. 사람마다 자신의 스타일과 방법이 정답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남의 떡이 맛있어 보이듯이 항상 다른 사람의 방식이 매력적으로 보이고 그것을 따라 하다 보면 또 다른 사람의 방식이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지금의 나는 누군가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다. 설령 누군가의 스타일을 따라 해보려 하는 것도 내 의식과 의향으로 시도해보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쓰고 있는 글들의 논리도 단순히 남들이 이미 제시한 것들을 내 입맛대로 바꾼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런 것들에 대한 정보는 책에서 얻은 것이니 말이다.


 미래를 낙관하거나 기대를 하며 현재를 나름 알차게 살기 위한 시도를 하거나 어떤 불의나 재난이 닥쳐도 그러려니 하며 받아들이는 방식도 말 그대로 방식 중 하나일 뿐이지 정답은 아니다. 실제로 나는 염세적인 성향이 강하며, 의식적으로 저런 방법을 활용하려 한다는 점에서 내가 그리 유쾌하고 낙천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다. 내가 염세적인 성향을 가지게 된 이유는 그러한 여러 근거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며 아마 전에 쓴 글에 그러한 근거가 적잖이 제시되었을 수도 있다. 만약 삶이 행복과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있다는 것에 대한 그럴싸한 근거가 나를 납득시킬 정도로 발견이 된다면 나의 성향도 정반대로 뒤집힐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근거는 찾을 수 없으며 난 지금의 나의 성향에 나름 만족하고 있다.


 삶의 끝은 절대적으로 죽음일 텐데 그럼에도 삶이 행복하고 아름답다면 그게 뭐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답겠는가. 물론 이런 고집적인 생각이 그닥 좋진 않다. 그래서 나는 알면서도 그저 현재를 살고 가까운 미래만 상상하며 일시적인 쾌락인 걸 알고도 그 순간을 즐기려 한다. 잘 되는 편은 아니지만 마냥 천하태평하거나 반대로 침울하고 무력한 것보다는 개인적으로 낫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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