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25일, 망고와 처음 만났던 그날을 난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아니, 앞으로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을 데려가달라는 듯 내 치마폭에 폭 하고 안기던 너를.
사실 난 한 번도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고양이가 예쁘다고 생각해 본 적조차도 없었다. 어린 시절에 길러본 동물은 강아지가 전부였던지라 나는 일평생 순수 강아지 파였기 때문이었는데, 그랬던 내가 고양이를 반려하게 된 계기는 사실 사소하고 또 단순했다.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이자 나의 예비 신랑인 남집사는 고양이를 너무 좋아했던 순수 고양이 파였고, 앞으로 우리가 반려동물을 키우게 된다면 꼭 고양이였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종종 하곤 했다. 남집사는 오로지 강아지만을 외치는 내 고집을 꺾어낼 정도로 자신의 의견이 확고했고 또 완강한 태도를 보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함께 지내면서 5마리의 반려동물들을 무지개다리로 떠나보냈던 경험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사실 남집사는 고양이 이전에 앞서 그 어떤 반려동물도 키우고 싶지 않아 했다. '이키, 아디, 다스, 꼬끄, 감자'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들의 반려동물은 우리나라에선 꽤나 생소한 펫테일 저빌이라는 소동물이었다. 그 작은 친구들의 시간은 우리들의 시간에 비해 너무나도 짧았고, 나를 더 큰 절망에 빠뜨린 건 그 아이들이 모두 건강한 삶을 누리다 늙어 죽은 것이 아닌 아파서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들을 차례대로 한 마리씩 보내고 빈 케이지만이 덩그러니 남았을 때의 난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심각한 펫로스증후군이 내 감정은 물론 내 일상을 순식간에 집어삼켜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남집사는 당연히 다시 한번 반려동물을 들이는 것에 거부감부터 표시해 올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아이들을 모두 보내고 다시는 키우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지만 난 이 작은 생명체들과 함께 하는 삶을 기어이 놓지 못했고, 남집사와의 오랜 논의 끝에 고양이를 입양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게 되었다.
고양이를 입양하기까지 역시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어디서 입양할 것인지를 정해야 했고, 유기묘나 보호소에 있는 아이를 데려오자라고 정한 후부터는 여러 보호소들과 병원 등에서 보호하고 있는 아이들을 수시로 찾아보기도 했다. 이따금 한 번씩 눈에 밟히는 아이들이 있어 연락을 취해 보기도 했지만 끄끝내 연락이 닿지 않은 아이들이 다수였고, 이후에는 결국 보호소에 직접 방문하게 되었다. 보호소에는 강아지, 고양이 할 것 없이 여러 아이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중에는 모녀 고양이가 동시에 버려져 보호소에 입소한 아이들도 있었다. 다쳐서 몸이 불편한 아이들도 많았고 병이 있어 버려진 아이, 이유 없이 버려진 아이, 사나워서 버려진 아이 등 각자의 사연을 가진 아이들이 짖고 또 울고 있었다. 그리고 맨 아래 구석진 자리에서 작은 몸을 동그랗게 말아 무기력하게 누워있던 한 고양이가 있었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이 아이는 왜 벌써부터 보호소에 있을까' 싶은 마음에 물어보니 그 아이는 피부병이 심한 아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보호소 직원은 그 아이가 펫샵 출신의 아이인 것 같다고 했다. 품종묘라 데려갔지만 피부병이 있어 얼마 지나지 않아 버려진 것 같다고. 처음엔 그 말에 그저 안쓰럽다는 생각만 들뿐, 그 외의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가장 처음에 봤던 모녀 고양이가 너무 신경 쓰여 온 관심이 그쪽으로 가 있을 때, 보호소 직원이 말했다. “얘는 사실 엄청 활발한 아이예요.” 하며 아까 그 작은 고양이를 가리켰다. 남집사는 이미 그 아이에게 마음이 간 듯했고 나는 가장 처음 봤던 모녀 고양이에게 마음이 가 있었다. 그렇게 서로 마음이 가는 고양이가 달랐던 우리 두 사람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결국 짧고도 긴 고민 끝에 '이 아이들 중 우리를 선택해 주는 아이를 입양하자!'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결정을 내린 후 떨리는 마음을 가득 안고 모녀 고양이에게 조심스럽게 검지 손가락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내게 일말의 관심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민망한 손을 거두고 ‘내가 고양이한테 인기가 없는 타입인가’ 하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던 그때, 좁은 철장의 문이 열리자 웅크리고 있던 그 작은 고양이가 폴짝 뛰어나오더니 고로롱 울며 내 치마폭에 폭 안겨 한껏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 이 아이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스스로 내 치마폭에 안겨준 아이, 나를 선택해 준 그 아이에게 내 모든 것을 걸고 싶었다. 그렇게 그 아이는 감사하게도 선물처럼 우리에게 오게 되었고, 그 작디작은 억울상의 고양이는 ‘망고’라는 이름으로 내 보물이자 내 전부가 되었다.
펫테일 저빌 아이들을 모두 떠나보낸 뒤로 난 늘 생명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보곤 했다. 그 아이들의 장례를 치르고 화장한 후 받게 된 유골은 나를 다시 한번 무너지게 만들었다. 내게 돌아온 건 겨우 500원짜리 동전 크기만 한 유골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의 생명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건 아마 망고도 마찬가지리라.
지금 내 옆에서 골골송을 불러주며 한껏 애교를 부려주는 이 아이의 생명의 무게 또한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그 생명의 무게감을 알기에, 그 무게감이 주는 책임감의 무게를 알기에 난 오늘보다 내일 더 나은 집사이고 싶어 진다. 그리고 늘 망고를 보며 생각한다. ‘난 네가 너무 무겁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