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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순이 May 17. 2023

이러다 곧 눈이 오겠어.

그래도 상관없지 넌 눈도 좋아하잖아.

미련이 참으로 많은 나는, 지나간 모든 것에 빠짐없이 후회하는 어리석은 나는. 굳이 내가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하는 물건들을 꾸준히, 소중히 가지고 지내는 중이다.

지금은 연락도 하지 않는 친구가 나랑 친해지고 싶은 이유에 대해 나열한 노랗고 작은 포스티잇, 헤어지고도 여전히 치근덕 거리는 나를 향한 지나간 연인의 단호한 저지의 두장의 편지, 늘 보고 싶은 아빠의 영정사진, 복용날짜가 지나버린 수면제, 함께 가기로 약속했으나 결국은 홀로 갈 수밖에 없어 남아 버린 콘서트 티켓 한 장. 불 붙이자마자 뺏어 그날의 날짜를 적어 놓은 담배 한 개비, 많은 밤 소주뚜껑으로 만들어 준 하트 몇 개. 내 생각나서 샀으나 사이즈가 맞지 않아 신지 못하는 새 신발, 태어나 처음 접어본다던 서툰 종이학, 어울리지도 않는 커플 비니와 어느 순간에 입으려 산 원피스, 서로가 뱉어놓은 껌 종이. 그 호텔의 바디워시 에머니티 빈통, 네 시선 안에서 훔친 너의 향수와 펜, 네가 좋아하던 일본 음료의 뚜껑과 드디어 함께 갔던 동물원티켓, 뒤늦게 끼고 다니던 반지와 너에겐 어울렸지만 내겐 어울리지 않던 건네받은 목도리. 그때마다의 날짜와 장소를 적은 라이터 몇 개. 우리의 이름을 적은 빈 박카스 병들. 서로의 이름이 적힌 한지 이름텍, 깨져버린 아끼던 와인잔 유리조각, 새롬이 내꺼 그 샤프, 헌책방 쿠폰, 그 바다에서 주워다 준 조개, 네가 꺾고 내가 말려 놓은 꽃 몇 송이. 새롬아 우선 울지 말아 봐_로 시작하는 마지막 쪽지. 서로의 입술자국으로 자욱한 자판기커피 종이컵.


등.


각각의 사연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그래서 절대 버리지 못했던, 기어코 버리기 싫었던, 쥐고 쥐고 평생을 쥐기만 하며 살고 싶던,

 하등 내가 지금은 들고 있지 않아야 하는 것들. 온통의 투성이들을 기어이 끼고 살았다.


그러면서 이 수많은 것을 눈길의 빗장에서 벗어난 구석에 처박아두기는커녕, 예쁘게 상자에 모아두기는커녕 비좁은 작은 내 방에 익숙한 눈길의 동선마디마다 보물처럼 전시하며 매일을 마주하며 살았다. 방문을 열고도 몇 초를 가만히, 침대에 누워서도 몇 분을 멍하니. 내 방을 들락거리는 그 순간 마다도 내 시선을 뺏었고 늘 뺏겼다.


그러다 이 중 하나는 불태웠고, 하나는 빼앗겼으며 몇 개는 오늘 드디어 버렸다.

일부러 다시 돌아가 찾지 못하게. 부러 버린 곳에 와 청승 떨지 않도록 생전 모르는 동네로 무작정 갔다. 가장 익숙한 동네의 버스정류장에서 아무 좌석 버스나 타서 아무 데나 내려 북쪽으로 북쪽으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슈퍼마켓으로 가 일반쓰레기봉툴 사고 담고 빼고 담고를 반복하다 그 동네 쓰레기봉투들이 둘러있는 가여운 전봇대 곁으로 가서 나도 슬쩍 툭.

쓰레기봉투에 가져온 물건들을 넣어면서도 한참을 고민하고 하나하나 눈 맞추며 다시 한번 애 닳게 이별하고, 그 더미 옆에 내 봉투를 두고선 옆 담벼락에 서서 한참을 그 봉투만 쳐다보다가 이런 모든 행동들이 너무 나스러워서 새롬이스러워서 그 애처로움에 한참을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밟히는 봉투였다. 몇 분을 그 전봇대 곁에서. 그 봉투를 다시 집었다 놨다. 갔다 놨다. 나의 동선은 담벼락과 전봇대. 내 손엔 빈손과 꽉 쥔 봉투. 이 둘만 몇 번을 반복하다 진짜 진짜 두고 왔다.


잊고 싶어서 버린 것들이 아니라 이제는 보내줘야 하는 것들에 대해 이제야 작별을 고한 행동이었다. 여전히 생각할 테고 그리워할 테고, 보고 싶어 하겠지만. 이제는 정말로 보내줘야 하는 몇 가지들에 대하여 굳이 내 스스로 살을 에는 행동을 한 것이다. 새롬이는 사랑이 잦아서 온몸에 사랑이 꾸덕꾸덕하게 넘쳐서 미련도 참 많은 거라 얘기해 준 다정했던 친구의 술주정이 참 좋았었은데 그 말로 이런 바보 같은 미련함을 이해시킬 수 있으려나. 생각나는 사람이 참 많다. 그중 다수는 나를 떠났지만.

 지나가지 못하게 움켜쥐고만 싶었던 순간들과 그 시간들을 대변했던 몇 가지들의 오브제들 역시 오늘 나를 떠났다. 어느 영화장면에서 "그때 헤어질 용기가 없었던 걸로 합시다."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그랬던 것 같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헤어질 용기가 없었던 걸로.


이따 아침이면 그 전봇대에 쓰레기더미들은 사라지겠지만 지금도 돌아가 다시 가져오고 싶지만 잘 참아보는 밤. 전부 다 버리진 못했지만 찬찬히 잘 엎어두며 살아봐야지. 이제는 뒤도는 삶보다 바로 앞의 삶을 살아야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멋짐들에 나 혼자 더 뒤처지지 않으려면, 진한 사랑이 필요한 밤이다. 며칠은 취하지 말아야지. 그 가여운 전봇대를 등지고 걷고 걸어 이제야 집에 온 이 새벽을 또 안고 살겠지. 이런 오늘 역시 고이 접어 끌어안고만 살다가 나중에 또 용기 있게 슬쩍 버리고 와야겠다.


잊고 싶어서 잃어버리고 싶어서 버린 게 아냐. 이제야 제대로 보내주는 거야

나 역시 살을 에고 뼈마디마다 얼음을 껴 넣는 일이었단 말이야. 그러니 너무 서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곁에서도 어디에서도.

 보고 싶어 하늘에 계신 님도. 땅에 계신 당신도. 볼 수 없는 너도. 멀어진 너도. 뭐 어떤 대단한 결심이 서서 한 짓도 아냐. 그냥 그냥 어쩌다 보니. 문 밖을 못 나가겠잖아. 내 방문인데도 그 문 앞을 못 지나는 거야. 멍하니 멍하니 넋만 놓고 살아버리잖아. 그래서 나두 더 열심히 살아보려고. 지금보다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더 많이. 그렇게 그렇게 살아보려고.


이러다 곧 눈이 오겠어.

그래도 상관없지 넌 눈도 좋아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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