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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로그림 노운 Apr 14. 2022

신경과 전문의 여자 사람

보통의 일상, 의사의 관점



점심시간. 이비인후과 선생님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환자가 코골이 수술을 했는데 마취 후 이상하다고, 좀 봐주셔야겠다고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울린다. 아, 나의 소중한 점심시간이여. 또르르..


40대 젊은 남자였다. 수술 전에는 많은 것을 미리 조사한다. 응급 상황이나 변수를 줄이기 위한 보호책을 사전에 많이 준비한다. 예측 가능한 위기 상황에 조치를 빨리 취할 수 있도록 다양한 과와 협진을 진행하고 협의 과정을 거친다. 환자 입장에서는 간단한 수술을 하는데 뭐 이렇게까지 하나 싶을 수 있는데 드문 확률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미리 준비하는 게 의료진이 해야 할 일이다. 이 환자는, 사전에 술 중 발생한 위험을 별로 가지고 있지 않았던 부류였다.


환자는 열 시 반에 가서 전신 마취 하에 수술을 했고 열두 시경 수술을 마쳤다고 했다. 술 전 검사에서 특이 사항은 없었고 공황 장애 약을 먹고 있는 것 외에 별다른 과거력도 없었다. 후다닥 회복실로 가서 환자를 봤더니 양쪽이 차이 날 만한 증상은 없었고 마취과 의사 말로는 깨웠더니 덥다고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의사소통이 되지 않더라 하였다. 그래서 약을 조금 더 쓰긴 했지만 지금은 깨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환자가 깨지 않는다 하였다. 보통 마취가 잘 깨지 않는 경우 약에 대한 반응이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환자는 눈 움직임이 이상했다. 약물 반응으로 인한 눈의 움직임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잠을 잔다, 의식을 잃었다, 일반인들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그저 환자는 눈을 감고 있는 상태일 뿐이다. 하지만 신경과 의사의 관점은 다르다. 뇌신경의 손상이 있는지, 뇌간 반응이 잘 나오는지, 통증 자극에 대한 반응 정도는 어느 정도인지, 양쪽에 차이가 나는 증후들이 있는지를 살핀다. 그냥 잠을 자고 있는 경우와, 의식 저하의 경우는 다르며, 의식 저하의 정도에도 여러 반응의 차이를 보인다. 그것을 일반인이 알 수 있을 리 만무하며 그래서 신경과 의사는 직접 환자를 봐야 한다. 상태를 전달하는 타과 의사나 간호사조차도 잘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약물 반응으로 인한 경우에는 수액 좀 맞히면서 지켜봅시다, 하고 끝냈겠지만 눈의 이상 움직임 때문에 MRI를 찍어봐야겠다고 했다. 혈관도 같이 보는 게 좋겠다 하고 같이 MRI실로 내려갔다. 가끔 급하면 환자와 같이 움직인다. 머리를 굴려가며 각종 가능성에 대한 대안을 생각했다. 나이도 적고 기존에 먹던 약도 없고 심장 평가에서 별다른 게 없었던 사람인데, 바닥 동맥이 안 좋은가, 그렇다면 마지막 정상시간으로부터 얼마나 지났지? 시술해야 할 수도 있으려나, 오늘 시술 당직이 누구지. 마취과 간호사, 수술한 이비인후과 과장님, 마취한 마취과 과장님, 영상 기사 등의 여러 인력들의 기대와 호기심 어린 눈초리를 느끼며 애써 침착한 척, 영상을 기다렸다. 뇌경색인지 아닌지를 보는 영상을 먼저 찍었는데, 급성기 병변은 없었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찜찜함이 도저히 가시질 않아서 혈관까지는 확인해 봅시다, 하고 진행했더니 우측 중뇌동맥이 안 보이네?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뇌혈관이 막혀 보이는 경우, 물론 이전부터 있던 만성 병변일 수도 있지만, 이번에 생긴 급성 병변일 수도 있는 상황. 일단 뇌혈관 조영술을 해봐야 했다.


응급실에 전화해서 시술 당직이 누군지 물어보고 시술 준비를 했다. 젊고, 간단한 코수술이었고, 보호자도 없이 하게 된 경우였다. 의학은 결국 확률 싸움이고, 가능성 많은 것부터 감별 해나가게 되므로 모두가 혈관 평가를 미리 해놓고 수술을 하는 게 아니다. 환자나 보호자 입장에서는 간단한 수술을 하다가 이런 일이 생기면 황당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의사에게도 무척이나 황당한, 생각지도 못한 일인 셈이다. 우측 중뇌동맥 폐쇄는 이전 병변이었던 것으로 생각되어 시술은 종료되었고, 환자의 증상은 원래 안 좋은 혈관에 관류가 떨어지면서 생긴 일과성 허혈 증상이었던 것으로 결론지었다. 깰 때까지 환자는 중환자실에 머물렀고, 현재는 의식 회복 후 일반 병실로 가 있다. 나이가 젊은데 큰 혈관 하나가 막혀 있으니, 나중에는 막힌 혈관에 우회로를 만드는 수술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언제든 예외 상황은 발생할 수 있다. 어떤 불운이 닥쳤을 때 어딘가에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만, 어떤 일에는 그 누구의 잘못도 없을 때가 있다. 나의 점심시간을 몽땅 잃어버린 것도 어쩌면 나의 불운이었지만, 환자를 원망할 수는 없으며, 언제든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왜 코 수술하다가 갑자기 시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가있느냐 싶겠지만 애초에 혈관이 안 좋은 걸 몰랐을 뿐, 그럴 수 있다. 희박한 확률이었을 뿐, 반드시 일어나지 않는 백 퍼센트의 일이란 없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모든 현상을 이해하려고 들면 모두가 힘들어진다. 그럴 수도 있구나,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내가 조금 운이 나빴구나. 오늘도 겸허한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낸다.





신경과 의사로서, 신경과 질환에 대해 '병태생리, 임상양상, 원인, 경과, 진단, 감별점, 치료' 등을 줄줄 이야기 하기는 싫었다. 그런 건 신경학 책에 잘 나온다. 포탈에 검색해봐도 나보다 잘 설명해둔 족보들이 많이 있다. 내가 신경과 관련하여 글을 써야지,라고 마음먹은 이유는, 전문 용어 써가면서 학술지 읽는 느낌 안 들게, 마치 소설을 읽는 듯 재미나게, 신경과에 대해 알리고 친숙하게 만들고자 함이었다. 철저하게 일반인의 관점에서,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의학도나 인턴(수련의) 정도의 관점에서, 내 글을 읽었을 때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신경과에서 주로 보는 질환은 어떤 것이 있는지, 의사도 사람인데 '신경과 전문의 여자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 궁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드는 사람들은 궁금증을 다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글을 쓰는 순간에는 죄책감이 들었고, 어떤 글을 쓰는 순간에는 뿌듯했고, 어떤 글을 쓰는 순간에는 슬펐으며, 어떤 글을 쓰는 순간에는 화가 나기도 했다. 내 글이 어떤 대단한 정보를 주지는 못할 것이다. 이것은 백과사전이 아니고 교육 자료가 아니다. 어떤 대단한 철학이나 교훈을 주지도 못할 것이다. 나는 인문학자가 아니며 철학가도 아니다. 다만, 신경과 의사로 살아가는 한 여자 사람으로서, 나의 느낌과 생각, 조금은 차갑기도 조금은 따뜻하기도 했던 나의 시선들에 대해 기억하고 공감받고 전달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이, 나와 함께 울고 웃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고 뿌듯할 수 있다면, 더불어 신경과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면, 나로서는 무한한 영광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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