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신경과의 꽃은 뇌경색이다. 뇌경색은 응급 질환이다. '미안, 어큐트(acute)가 와서 가봐야 해.’ '하이퍼 어큐트(hyperacute)야, tPA (혈전용해제) 쓰는 중이야. 나중에 통화하자.’ 이런 대사가 들린다면, 그 사람은 바로 신경과 의사다.
hyperacute는 갑작스러운 신경학적 증상이 3시간 이내에 발생한 환자를 말하고, 이런 경우에는 골든 타임 안에 오면 혈전 용해제를 써볼 수 있다. 최근에는 당뇨 등이 없다면 4시간 반 안에도 주의해서 써볼 수 있다. 혈전 용해제는 주사로 들어가고, 1시간 동안 맞으며, 혈전을 녹이는 약인만큼, 출혈의 위험이 있어 적응증이 되는 환자에게만 사용해 볼 수 있다.
acute는 증상 발생 보통 6시간 이내의 환자를 말한다. 6시간 안에는 큰 혈관이 막힌 경우 시술을 해볼 수 있다. 시술은 혈관조영술을 말하고, 대퇴동맥을 통해 관을 넣어서 조영제를 쏘고 혈관의 상태를 확인하는 시술이다. 큰 뇌혈관이 막힌 게 확인이 된다면 혈전을 제거하는 시술을 고려해볼 수 있다. 신경과 의사의 판단 하에, 신경외과나 영상의학과에 의뢰하게 된다.
전공의 1년 차 4월경이었던 것 같다. 이제는 그 이름을 잊어버렸지만, 수년간 잊지 못했던 그 이름의 환자를 떠올려본다. 신경과 전공의 1년 차는 항상 바쁘다. 잘 몰라서 바쁘고, 몸도 마음도 뭔가 분주하다. 그러던 차에 응급실 전화까지 울리면 마음이 더욱 다급해진다. 보통의 전형적인 뇌경색 환자인 편마비의 경우에는 급한 목소리로 노티가 온다. '어큐트입니다! 발생 시점은 2시간 전입니다.' 그러면 가던 발걸음을 돌려 바로 응급실로 향하면서 통화를 이어간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경우엔, 뛰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노티가 오지 않았다. '환자가 이상합니다.'
51세의 젊은 남자였다. 갑자기 혼돈이 왔다고 했다. 한쪽에 마비는 없었다. 팔다리 다 잘 움직이고 멀쩡한데 자꾸 딴 소리를 한다고 한다. 나이가 비교적 젊었고, 마비는 없었으니 이런 경우 뇌염인가?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우리는 “갑자기”에 주목을 해야 한다. 물론, 뇌염의 경우에도 비교적 갑자기 혼돈이 오기도 한다. 하지만 뇌염의 경우엔 밥 먹다가 갑자기, 대화 잘하고 있다가 갑자기, 이런 식의 갑자기는 아니다. 발열이 있고 두통이 있다가 문득 엉뚱한 소리를 하더니 점차 심해졌다면 의심해볼 수 있었겠지만.
환자는 밥 먹다 말고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하는 경우였고 급성 뇌혈관질환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전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갑자기’ 생긴 증상이라면 어서 가서 봐야 했다. 만약 뇌경색이라면 두 시간 반 만에 왔던 환자이고 그 당시에는 네 시간 반 아닌 세 시간이 기준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아주 촉박한 상황. 환자가 이상하다는 노티를 받고 ‘뭐야, 뇌척수액 검사를 해야 하나, 도대체 뭐라는 거야.’하면서 아주 서두르지는 않았고, 십여분 시간이 지나 환자를 직접 가서 봤을 때는 환자가 혼돈이 아니라, 베르니케 실어증(듣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본인 말만 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MRI를 찍었을 때는 이미 시간은 세 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기저 질환이 없고 나이는 젊은 점은 바로 뇌경색을 의심하기에 무리가 있지만 심방세동이 있었다. 심방세동은 부정맥의 일종으로 뇌경색의 고위험 인자이다. 세 시간 안에 빨리 내원하였지만 (이런 경우가 사실 생각보다 드물다. 보통은 ‘발견 후’ 세 시간 안에는 오지만 정확한 발생 시점 또는 마지막 정상 시간으로부터 세 시간 안에는 쉽지가 않다. 보통은 자고 일어나 발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차저차 검사하고 병력 청취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버린 상황에서, 나는 그만 황망해졌다. 혈전 용해제를 쓰지 못한 채, 그 외에 할 수 있는 약물 치료만 하였고, 입원 기간 내내 조금만 더 빨리 행동했다면 어땠을까, 조금만 더 빨리 약을 썼다면 실어증이 좋아졌을까, 미안함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물론 혈전용해제를 썼다 해도 증상은 그대로였을지도 모른다. (사실 대부분은 그렇다.) 썼는데 오히려 터져서 증상이 더 악화되었을지도 모른다. 결과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해볼 수 있었던 것을 하지 못했던 것에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결과론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몇 안 되는 기회를, 나의 머뭇거린 30분으로 앗은 것만 같아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그런 시절을 보내고 나면 신경과 의사들은 의심이 늘어간다. 타과 전문의라 해도 신경과 질환은 직접 겪고 알게 되기 전까진 잘 모르기 때문에, 꼬치꼬치 캐묻는 버릇이 생기고, 직접 환자를 보기 전까지는 노티 한 사람이 누구든 일단 반만 믿고 반은 의심한 채, 환자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을 하게 된다. 피곤한 삶을 살아야 실수가 적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다. 까칠하고 질문 많고 의심 많은 신경과 의사를 만난 적이 있다면, 기본 성향 플러스 수련의 결과임을 알아주길 바란다.
2년이 지나도록 환자가 어느 정도로 말을 알아듣고 할 수 있는지 계속 찾아봤던 기억이 난다. 보통 뇌경색 환자들은 일이 주 정도 신경과에서 급성기 치료를 하고 나면 재활의학과로 전과하여 재활 치료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게 되는데 그 환자는 과가 바뀌고 나서도 짬날 때마다 가서 말을 시켜봤더랬다.
나의 실수가 환자에게 위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없던 강박을 만들고 안 하던 의심도 해야 좀 더 실수를 줄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말만 믿을 게 아니라 매의 눈으로 직접 환자를 살펴야 한다. 매사 두리뭉실했던 내게는 다소 힘든 부분이었고 현재도 진행형이다. 십 년 전 그 환자는, 지금은 어느 정도로 말을 알아듣고 할 수 있을까? 내 1년 차 때의 30분 지각에 대한 죄송함을 읽으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