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나지 않아요
신경과에는 참으로 다양한 환자가 내원한다. 정신과 병력 청취도 지난하고 긴 과거사를 들으면서 현재의 상태를 파악하고 진단하고 약물 처방을 하겠지만, 신경과도 만만치 않다. 하물며 정신과는 시간별로 면담 비용을 수가 청구라도 할 수 있지만, 신경과는 그런 것도 없으니 다소 억울하기도 하다. 하지만 세밀한 병력 청취의 과정에서 얻는 재미도 있으니, 몇 가지 생각나는 대로 소개해볼까 한다.
신경과에는 전날 입원한 환자 증례를 발표하는 아침 모임 시간이 있다. 만약에 응급실로 내원한 환자가 어지럼이 생겼다면, '뭐하다가' 생긴 증상인지를 기술해야 하는데, 고개를 들다가 생겼는지 (이석증일 가능성이 있다.) 누워 있다가 서서 걷는데 어지럼이 생겼는지 (기립성 어지럼일 가능성이 있다.) 주로 어떤 상황에서 어지럼이 발생하는지를 발표해야 한다. 또한 움직일 때마다 순간적으로 수초 간 지속되는지, 가만히 있던 중 갑자기 수분 간 지속되었는지, 한번 생긴 어지럼이 수시간 지속되는지, 어떤 상황에서 얼마 동안 생긴 증상인지를 기술해야 좀 더 가능성 높은 진단을 찾아나갈 수 있기 때문에 병력이 매우 중요하고, 자세히 병력 청취를 하는 노하우를 수련기간 동안 익혀 나가게 된다.
물론 과한 병력 청취로 혼이 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63세 남환으로, 친구들과 고스톱을 치는 중에 고를 외치고 탁 비를 내려고 했는데 갑자기 우측 팔에 힘이 빠지면서 스르르 옆으로 넘어갔다." 물론 본인은 혼났겠지만 힘든 아침 모임 의국원 모두에게 소소한 웃음을 선사했을 것이다.
60대 여환이었다. 저녁에 시댁에 가서 제사 지내고, 자고 오려고 했다가 새벽에 그냥 집으로 왔는데, 남편이랑 불륜녀랑 붙어 있는 걸 봤다고 한다. 그때의 충격으로 2시간을 내리 울었고, 이후 기억을 잃었다. 여기가 어디냐 반복하여 물어보고, 몇 시간 동안의 기억을 전혀 하지 못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일과성 전 기억상실(TGA, transient global amnesia)'이라는 병명을 붙인다. 실제로 MRI를 찍어보면 해마에 하얀 점이 찍히는 경우도 있고 일과성 허혈 또는 측두엽 간질 등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이처럼 정신적인 충격으로 생기는 경우도 실제로 많다. 본인은 남편 집안에 제사 지내러 갔는데 그 남편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으니, 얼마나 황망했으면 변연계가 순간적으로 정지되었을까.
일과성 전 기억상실은 인구 10만 명당 5명 꼴로 발생하며 (체감상으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거 같은데), 대부분은 24시간 이내로 증상이 모두 호전되고, 재발률은 5% 미만인 양성 질환이다. 많은 사람들이 치매 전조 증상이 아닐까 걱정되어 근심어린 표정으로 내원하지만, 대부분은 치매와 무관하다. 원인은 앞에서 말한대로 밝혀진 명확한 기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기전이 밝혀지지 않은 신기한 병이 세상엔 참으로 많은 것 같다. 자세한 병력 청취로 알게된 사람들의 사생활까지 보듬어줄 수는 없겠지만, 사람들이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고 살았으면 좋겠다. 정신적인 충격과 병을 함께 얻은 그녀의 결말은 과연 무엇일까? 망각일까, 파국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