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 1년을 마치고 복귀했을 때, 나는 여전히 내 자리가 있을 거라 믿었다. 지난 17년간의 모든 경력 치를 갈아 넣으며 혼신의 힘을 다해 쌓아 온 팀 내 넘버 2 포지션. 하지만 현실은 달랑 책상 하나뿐이었다.
"두 분이 그 역할을 맡고 있어요."
팀장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육아휴직 직전에 경력 직원으로 채용했던 여자 매니저와 기존 다른 업무를 하던 남자 매니저. 10명도 안 되는 팀에 비공식 파트장이 셋이라니.
시작된 건 은근한 힘겨루기였다. 회의 때마다 나는 의견을 내지만, 새로운 파트장들의 의견이 우선이었다. 내가 먼저 제안했던 아이디어도 그들이 말하면 그제야 채택된다.
실력 있는 주니어들은 이미 두 파트장이 나눠가진 뒤였다. 내게 배정된 건 소위 '문제아' 팀원들뿐. 가장 까다롭고, 고된, 그러면서도 티 안 나는 업무들만 내 몫이 됐다.
"이 업무는 매니저님이 원래 잘하셨잖아요."
"꼼꼼하신매니저님이 이것도좀 마무리해주세요."
매번 듣는 말이다. 진급은 이미 물 건너갔다.
점점 발언 횟수가 줄어들었고, 결국 나는 '일 잘하는 소' 취급을 받게 됐다. 그렇게 첫 1년이 지나갔다.
팔로워쉽을 선택한 '일잘러소'의 최후
1년이 지나고 남자 매니저는 다른 부서로 이동했다. 이제 나와 그녀, 투톱체제. 연초팀장님은 은근히 둘을 비교하며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난 나보다 연차도 나이도 한참 어린, 게다가 내 손으로 직접 채용했던 그녀와 경쟁하긴 싫었다.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괜한 분란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 평범한 팀원으로 살자. 내 몫만 잘하면 돼.'
난 애써 마인드 컨트롤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녀가 팀장님을 등에 업고 무작위로 던지는 어려운 업무들을 묵묵히 해내는 '일잘러 소' 역할을 자처했다. 팀의 화합을 위해 굿팔로워가 되기로 한 선택이었다.
아니다. 솔직히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팀장님은 늘 중요한 업무 회의에 그녀와 동석했고, 그들이 짜놓은 판에서 나는 그저 열심히 밭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복직 직후에는 팀장님과 팀원들 모두 기존 넘버 2였던 나의 복귀 무대를 관망하는 모습이 보였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나는 도태되고 그녀의 원톱 체제로 고착화되고 있었다.
그런데 연말 평가에서 팀장님이 말씀하셨다.
"팀의 왕고로서 왜 더 적극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하지 않으셨나요?"
순간 머리가 아찔하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반강제로 선택했던 침묵이, 결국 나를 더 구석으로 몰아넣었구나! 팀장님 눈에는 그저 소극적인 매니저로만 보였던 걸까?
타의에 의해 눈물을 머금고 일잘 소가 돼버린 이 슬픈 눈망울이 안보이는가! 진짜로!!??
다음 진급 심사에서 내 이름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의 이름이 오를 것 같다. 팀장님의 마음은 이미 그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니까.
퇴근길 버스에서 멍하니 어두운 창밖을 바라본다. 내일도 난 출근할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예전의 나는 아닐 것이다. 이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다시 한번 육아휴직을 써야 할까, 아니면 아예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