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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꽃 Nov 19. 2024

빙고 게임으로 정하는 자리

보이지 않는 손

우리 팀은 올해부터 지정좌석제를 도입했다. 팀 구역 내에서 자율적으로 자리를 정하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별 고민 없이 가장 구석진 자리를 선택했다. 양 옆으로 파티션이 있고, 뒤는 벽으로 막혀 안정감이 느껴졌다. 주로 업무상 데이터를 분석하거나 기획안을 써야 하는 나에겐 혼자만의 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사방이 트인 자리에선 불안하고 집중도 안 됐다. 게다가 완벽한 I(내향적) 성향인 나는 안정적인 자리를 고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무엇보다 팀장님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었다. 이 자리가 주는 고요함과 독립성은 내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작은 안식처였다. 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가지 못했다.


“매니저님, 자리가 너무 구석 아니세요? 팀원들이랑 소통도 어려울 것 같고…”


팀 전체 티타임 자리에서, 팀장님의 총애를 받는 한 매니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내 자리를 문제 삼을 때부터 이미 흐름은 결정되어 있었다.


“저는 괜찮은데요…”


라고 우물쭈물 대답했지만,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더 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 기회에 자리 재배치하는 건 어떨까요? 그 자리는 공석으로 두고요! 빙고 게임으로 정하면 재미있고 공정할 것 같은데요!”


순간 팀원들의 시선이 한 곳에 쏠렸다. 바로 나를 향해서였다. 팀장님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 개입하지 않았다. 다들 분위기를 맞추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게임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판이었다.




빙고의 날


자리 배치 결전의 날, 팀원들의 긴장감이 역력했다. 하지만 미연만은 여유롭게 커피잔을 돌리며 말했다.


“저는 전혀 긴장되지 않아요. 어디에 앉아도 상관없거든요. 팀장님 옆자리든, 뒷자리든… 꼴찌를 해도 괜찮아요.”


그녀의 말에 담긴 자신감이 나를 더욱 불편하게 했다. 나는 최대한 마음을 다잡으며 빙고판에 숫자를 신중히 적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빙고 게임이 시작되자 하나둘씩 숫자가 불렸고, 팀원들은 안쪽 자리부터 차례로 자리를 채워갔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남은 자리는 딱 하나. 팀장님의 시선이 가장 잘 닿는, 사방이 훤히 트인 자리였다.


한편, “어디든 괜찮다”라고 자신만만했던 미연은 막상 자신의 순서가 되자, 은근슬쩍 구석진 자리를 골랐다.

“혼자 앉는 건 외로울 것 같아서…”라는 변명을 남기며 자연스럽게 피해 갔다.


새 자리에 앉은 첫날, 나는 자꾸 등 뒤를 신경 쓰며 어깨를 움츠렸다. 팀장님의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뒷목이 뻐근했다.


‘왜 이런 소모적인 신경전이 필요한 걸까. 나는 그저 일하러 온 것뿐인데.’




또다시 시작된 빙고


몇 달 뒤, 팀에 새로운 직원이 합류하며 빙고 게임이 또다시 열렸다. 이번엔 반드시 1등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이번엔 꼭 이길 거야”라고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기적처럼, 나는 1등을 차지했다. 자리를 고르라는 말에 망설임 없이 양 옆이 파티션으로 막힌 자리를 선택했다. 뒤쪽은 벽으로 막히지 않았지만, 충분히 안락해 보였다. 마음 한구석에서 들리는 환호성은 작은 승리의 기쁨이었다.




회식 자리의 불편한 농담


하지만 그날 저녁, 회식 자리에서 나는 또 한 번 자리를 둘러싼 논쟁에 휘말렸다.

술이 몇 잔 돌자, 빙고 게임에서 꼴찌를 했던 한 팀원이 느닷없이 말했다.


 “팀장님, 밀어내기 특권 쓰셔야죠! 원하는 자리에 앉으셔야 하지 않겠어요?”

 “맞아요! 누구를 옮기실지 말씀만 하세요!”


사람들은 웃으며 맞장구를 쳤지만, 내 속은 불편했다. 분위기가 점점 과열되자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리 배치는 합의된 빙고 게임 규칙에 따라 정한 거잖아요. ‘일사부재리’ 원칙을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웃으며 말했지만 순간 정적이 흘렀다. 빙고 꼴찌였던 팀원은 멋쩍은 듯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에이, 뭘 그렇게 어려운 말까지. 그냥 취해서 농담한 건데요…”


하지만, 이미 싸늘해진 분위기. 

팀장님은 아무 말 없이 잔을 들었고,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다시 찾아온 고요


불편한 마음에 밤새 잠을 설치고 다음 날 출근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동한 새로운 자리의 파티션이 유난히 낮아 보였다.


‘휴, 이 게임은 끝나지 않는구나.’


난 여전히 불안정한 게임의 일부였다. 그리고 다음 빙고의 날이 머지않았다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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