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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꽃 Oct 27. 2024

무한 성장의 늪

성장의 임계점에서

따스한 햇살이 사무실 창을 통해 들어와 책상 위에 놓인 커피잔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다. 창밖으로는 울긋불긋 물든 단풍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지만, 내 마음은 왠지 모르게 차갑게 식어버린 듯하다.


어젯밤, 또 잠을 설쳤다. 아이들이 걱정되서다. 특히, 작은 아들은 요즘 유독 유치원에서 이슈가 많아 하루가 멀다 하고 선생님으로부터 주의 전화가 온다. ADHD 아이를 키우는 일은 생활태도, 학업 등 늘 신경 쓸 일들이 많다. 더 퀄리티 있고 많은 시간을 아이와 함께해줘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퇴근 후에도 내 생각은 늘 일에 쫓긴다.


오늘 아침, 팀장님과의 평가 면담은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팀 내 최고연차 직원으로서 남다르게 탁월한 성과를 내야 하는 거 아시죠? 더 Proactive 하게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팀에서 항상 가장 어려운 프로젝트들을 맡아 누구보다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인정은커녕 늘 부족하다고 하시는 걸까?'


"네..."

속으로는 '이만하면 됐잖아요?! 뭘 더 어쩌라고요!!'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건 내 능력의 한계를 시인하는 꼴이니 그저 마음에 삼킨다.


하루종일 온갖 질문들이 내 머릿속을 침투한다.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 언제까지? 왜? 누구를 위해서!!? 저연차 직원과 고연차 직원의 평가 기준이 같으면 저연차 직원이 불리하다고? 연차가 높아지면 매해 뇌용량도 10%씩 늘어나고 체력도 10%씩 늘어나기라도 하나? 모든 생명체의 라이프사이클과 성장 곡선에는 임계점이 있는데, 연차가 올라갈수록 무한대로 계속 더 성장해야 한다는 건 오히려 고연차 직원에 대한 역차별 아닌가? 누구라도 한 10년쯤 회사 생활하고 났으면 다 똑같지, 그다음부터는 개인의 노력과 실력으로 봐야지. 언제까지 연차로 올려치기 하며 압박 해댈 건가!!?"


퇴근 후,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창문에 비친 한 중년 여성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다. 언제부터 이렇게 지쳐버렸을까? 작년부터는 갱년기 증상까지 찾아와 몸이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다. 밤잠을 설치하고, 피로감에 시달리고, 예전 같으면 가볍게 해냈을 일들도 버겁게 느껴진다. 마치 낡은 기계처럼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냥 회사를 그만둘까?'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나를 위한 시간도 갖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녹녹지 않다. 경제적인 문제도 고, 사회생활을 오랫동안 해오면서 쌓아온 경력대기업이라는 안정적인 소속감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


‘성장’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나를 조여 오는 듯하다. 마치 무한한 깊이의 늪에 빠진 것처럼, 발버둥 칠수록 덫에 갇힌 느낌이다. 특히 재작년 아이 문제로 일 년간 육아휴직 다녀온 뒤로 팀 내 입지가 더 애매해졌다. 최고연차이지만 승진 인재 풀에서는 제외되었고 그 사이 전에 내가 하던 팀 운영 업무는 새로운 팀원이 맡아서 하고 있다. 난 이제 온전히 업무 능력으로만 고연차의 탁월함을 증명해내어야 한다는 중압감에 숨쉬기조차 힘들다.


하루종일 꽉 막힌 사무실에 틀어박혀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어서 그런지 오늘따라 머리가 무겁고 속이 안 좋다. 한 정거장 전에 내려 탄천을 향해 걸었다. 쓸쓸하게 늘어선 가로수들이 밤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


문득,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까만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은 마치 내 마음속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듯 멀뚱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회사에서, 사회에서, 집에서, 심지어 내 안에서도 끊임없이 성장을 강요받는 것 같았다.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더 많은 것을 이루기 위해. 하지만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길가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탄천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가 유일한 배경음악이었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문득, 공허함이 밀려왔다.


"그냥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거 아닌가?"


하지만 현실은 나에게 그런 안일위로를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다시 일어서 걸었다. 밤길은 생각보다 길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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