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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블루스 Sep 18. 2022

사랑에 대한 고찰

나이가 들어서 돌이켜 보면 젊은 날의 사랑은 욕심에 가깝다. 

아름다운 걸 보고, 탐나는 걸 보면 갖고 싶다는 욕심. 

가지고 나서 그 만족도를 얼마나 간직할 수 있는지에 따라 사랑의 기한이 정해진다. 

그 안에 상대는 없다. 

상대를 위해서 하는 모든 마음과 행동들도 결국은 내가 무언가를 획득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사랑한다고 믿는 존재의 마음을 획득하고 싶거나 몸을 획득하고 싶은 욕심. 젊은 날의 사랑이란 것은 그 정도의 형태를 띄고 있다.


인디아나 존스라는 영화를 보면 고대유물을 갖기 위해 주인공은 죽을 고비까지 넘기면서 모험을 한다. 그 죽을 고비는 누가 시킨 것이 아니다. 주인공을 괴롭히는 모든 존재는 빌런이 되는 것이다. 결국 주인공이 유물을 획득하고 해피엔딩이 되지만 그 주인공은 과연 또다른 빌런이지 않았을까. 젊은 날에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는 과정들이 인디아나 존스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너를 위해 죽을 고비까지 넘겼어,”라고 말하고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은 감동을 한다. 

“나는 너를 위해 이런 일까지 했는데….” 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유물을 획득하기 위한 자신의 욕심에서 비롯된 선택적 희생이었으리라. 나를 위해 희생하면서까지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 가.

“나 좋다는 사람도 많았지만 너를 선택 했어.” 이런 말은 사랑이 담긴 말인 가. 

속내를 따져보면 내가 이렇게까지 했으니 너도 나를 잘 대접해달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너무 비약적인 가.

인간관계는 언제나 일방적이다. 

나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상대방을 위한다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 역시 나의 입장에서 내려지는 결론이다. 


나는 샐러드를 좋아하지만 네가 고기를 좋아하니 상대방에게 물어 보지도않고 오늘은 고기를 먹자고 말했다면 그것 역시 나의 입장에서 내려진 결론이라는 뜻이다. 상대방은 고기와 샐러드, 둘 다 좋아하는데 고기만 좋아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언제나 오해를 낳고 분쟁을 야기하게 된다. 보통의 사람들은 새벽도 좋아하고 노을도 좋아하는, 산도 좋아하고 바다도 좋아하는, 이러한 성향들을 전부 갖고 있지만 그걸 인정하지 않는 문화에서 비롯된 착각들. 그 착각들을 사랑이라고 판단하게 되는 문화들. 

사랑한다는 마음에 대한 인문학적인 고찰이 필요할 때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그 욕심을 버리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내가 가져야만 행복 할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나에게 와서 그것들이 진정 행복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종교에서는 결론 내린다. 그리하여 나를 먼저 버리라고 말한다.

나이가 들어 가면 나를 버리는 것이 가능해지기도 한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를 버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알 수 있기만 해도 종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 가능해 질 수도 있다.

나를 버리는 것은 진정으로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것을 해 내야만 진정한 사랑의 형태를 띄게 된다. 나이가 먹으면 인디아나 존스처럼 모험을 할 만한 체력이 없어지기도 하니 스스로 내려 놓게 될 수도 있다. 몸이 먼저이던 마음이 먼저이던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나이가 좀 먹어야 가능해진다는 나의 결론이다. 

결국은 난 이 번 생에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게 될 게 뻔하지만 좀더 사랑에 대해 고찰은 해보고싶다.

새벽 녁 부는 찬바람이 내 곁에 머물고, 해지는 붉은 노을이 내 마음을 보듬어 주기만 해도 그저 만족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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