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다가오기 전 지금을 충분히 누려야만 하기에
시간의 개념은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선이 아니라고, 사실은 점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대해 얕게나마 배우면서 도 그랬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한다.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다. 절대적인 동시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나에게 시간의 흐름은 어떠했는가.
나 역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시간이 흘러간 것 같지가 않다고, 내 시간은 너무나 빠르게 사라져 손 안의 모래알이 한 번에 빠져나간 기분이라고 말이다.
그만큼 빠르게, 가을이 그리고 초겨울이 찾아왔다.
P도 나도, 순차적으로 빈티지샵에서 80년대 빈티지 리바이스 청바지를 샀다.
P는 한참 전부터 사서 입고 있던 것이고, 나는 최근에 P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지만.
생각해보면, 과거에는 남이 입던 옷을 새 옷보다 더 비싸게 주고 산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누군가는 헌 옷에 귀신이 들려 있다고 하기도 했고, 나 역시 더러울 것만 같아 꺼려지곤 했다.
그러나 P도 나도, 이제는 새 옷을 사는 것보다 빈티지옷을 더 많이 사는 것 같다.
최소한 P는 정말로 그렇다.
p를 데려다 주고, 다시 일하러 돌아가는 일요일.
나에겐 월요병이 없다.
왜냐하면 일요병이 있기 때문이다.
매주 일요일에 출근하는 일상이 반복적으로 이어지고 난 후론, 월요일에 회사 가는 것이 크게 싫지는 않다.
오히려 주말이 짧은 것이 슬프지.
하지만, 내가 평일에 완성하지 못한 것을 하러 돌아오는 것이기에, 누구에게도 핑계댈 방도는 없다.
스스로에게 묻고 싶기도 하다.
어차피 일요일에 나올 거니까, 평일에 더 느슨한 건 아니냐고. 지금 출근하는 건 평일의 일을 미룬 나에 대한 사과인사다.
정신을 챙겨 출근하는 길, 그래도 hs언니가 서프라이즈로 보내준 콜드브루를 한아름 안고 걸으니 괜히 사무실에 가는 길도 신이 났다.
가을이 와버렸다.
4계절이 고루 존재하는 한국이라고 말하기는 해도, 가을이 얼마나 소리소문 없이 왔다가 우리 곁을 떠나는지 잘 안다.
상사님들과 커피를 마실 때에도, 잠시 짬이 날 때에도 틈만 나면 바깥의 풍경을 본다.
알지 못한 새, 세상을 노랑과 주황으로 물들여버린 가을의 존재를 느끼기 위해서.
눈 코 뜰새 없이 바쁘긴 했지만, 그럼에도 좋은 소식은 있었다.
과분하게도 찾아온 소식에 소리 없이 기뻐하면서, 그동안 곁에서 응원과 축하로 지탱해준 사람들에게 밥을 샀다.
더 일찍 샀어야만 했는데, 미뤄지고 미뤄지다 보니 지금이다.
그럼에도, 정겨이 수다를 떨고, 집에 가는 길 적당한 바람마저 좋았던 날이기도 하다.
우리는 매일 만나 똑같은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질리지도 않고 똑같이 기뻐하고 똑같이 우스워하며 똑같이 한탄한다.
갑자기 슬픈 마음도 들었다.
이러한 똑같은 일상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싶어서. 언젠가는 다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야만 할 시간이 올 테니까.
돌아가는 길, 좋은 소식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얼른 당도하길 기도했다. 이 즐거운 시간이 좀 더 오래갔으면 하는 마음도 같이.
폭풍 같은 일을 쳐내고 또 쳐낸 후 가지는 꿀맛 같은 커피타임이야말로, 진짜배기 보상이다.
yg는 항상 카푸치노를, b는 플랫화이트를 시키곤 한다.나는 그 옆에 앉아 다리를 꼬고 수다를 떤다.
옆에선 yg가 무언가 고민이 되는지 끊임없는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그걸 듣는데 어느순간부터는 재미있고 귀엽기까지 하다. 어떻게 저렇게 자기가 하는 일에 열정적일 수가 있나. 나도 저걸 배워야 하는데....
일단 그걸 배웠는지는 잘 모르겠고, 주말이 오기 전 같은 방 친구에게 땡깡을 부려 빙수를 얻어먹었다.
일하러 들어간 후 돌아왔을 때 반드시 빙수가 있어야만 한다고 고집을 부렸더랬지.
결국 또 둘러 앉아 일은 어떤지, 어떤 부분이 어려운지에 대한 똑같고 똑같은 이야기만 한 것 같은 기분이라 미안하다.
매 금요일이 이랬으면 좋겠건만.
금요일, P가 왔다.
오는 길, 여느 때 같이 꽃을 들고서.
자기는 거베라를 좋아한다며.
화병에 꽃을 꽂고는, 소파에 누워 하릴없이 P가 내는 소리를 듣는다.
손 씻는 소리, 집에 쌓인 설거지를 해결하는 소리, 배고프다며 삼겹살은 언제 도착하냐고 묻는 소리.
이 소리를 들어서 기쁘다.
토요일 오전, 일어나자마자 P는 점심으로 뭘 먹을 거냐고 묻는다. 김치찌개? 쌀국수?
늘 내가 먹고, 좋아하는 메뉴들의 나열을 듣다 대답했다.
돈가스 먹자. 돈가스 먹으러 나가자.
P는 5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소리에 놀라 쳐다보는 것 같다.
니가? 돈가스가 먹고 싶다고? 별일이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얼른 차려입고 나와 밝고 청명한 가을 하늘을 보며, 신메뉴로 나왔다는 돈가스를 먹었다.
입술에는 튀김가루와 기름이 덕지덕지다.
나는 바로 B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돈가스 너무 맛있다고. 월요일에 먹으러 오자며.
매주 코너에 몰린 것만 같은 일주일을 보낸다는 것은, 내면에 쌓이는 여유 같은건 설자리가 아예 없음을 의미한다.
생각할 시간도, 생각을 안할 시간도, 아무것도 안할 시간도 없다.
겨우 시간을 짜내 나온 세상의 새로운 가게들과 늘 가던 카페에서의 시간이 날 반기는 것만 같았던 주말이었다.
그렇게 잠시나마 P와 손을 잡고 앉아 벽에 펼져친 낙서를 봤다.
온갖 세련되고 예쁜 것들 사이에 피어 있는 들꽃처럼, 길거리에 늘어진 좌판의 ‘덩킹도너스’ 같은 것을 볼 때, 오른 편은 아치형 문이 있는 대형 카페가 들어올 예정인데 왼편에는 한약과 단감, 6,000원짜리 롤빵을 파는 광경을 볼 때 생각한다.
세련됨이란 것이 주는 역설은 엄청나다고.
왼편의 광경이 훨씬 더 정감이 가고, 자유롭고 힙해보였다.
그 길을 지나는 순간 왠지 모를 순수한 기쁨이 느껴지기도 했고.
저 롤빵 사올걸 그랬다. 확성기에서는 사장님이 직접 녹음하신 빵 사세요~ 빵! 이 무한으로 반복해서 나오고 있다.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P는 옷을 샀다.
늘 가는 빈티지샵에서, 당연히 P가 고를 것만 같은 옷들을 말이다.
나는 작은 의자에 앉아 P가 옷을 입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방금까지 입은 것을 다 사자는 조언을 했다.
평소 같으면 싫다고, 마음에 드는 것만 사겠다고 고집을 피웠을 텐데, 왠일인지 P도 선뜻 그러겠다고 한다.
심지어는 사장님조차, 원래 옷을 입어보는 경우가 많지 않은 손님이니 입고 싶은 옷을 다 입어보시라고 했었는데.
사장님은 떠나려는 우리를 붙잡고, 자꾸만 맛집을 추천해주려고 하신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갈 마음이 없는 식당임에도 끝까지 들었다.
식당에 앉자마자부터 일요일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내일 회사에 가면, 또 얼마나 많은 것을 해야만 할까.
나는 언제쯤 일이 확실히 늘까. 언제쯤 별 생각 없이도 일을 척척 해낼 수 있을까.
불평과 불만과 걱정을 늘어놓으니 음식이 나왔다.
이럴 땐, 일단 자극적인 것들로 속을 코팅시키고 봐야 한다.
주말 저녁,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를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오픈 시간의 식당가는 한산해서 다행이었다.
웨이팅 없이 얼른 자리에 앉아 빠르게 밥을 먹어치우면서, P는 행복하다고 했다.
음식도 맛있고, 분위기도 좋다고.
토요일 밤이 지나기 전, 누워 있는 P의 모습이 좋아보여 갑자기 사진을 남겼다.
강요를 섞은 질문도 했더랬다.
‘내가 사준 잠옷 좋지? 내 베개커버 색깔 예쁘지?’
p는 오늘로써 90번은 대답하고 있는 것 같을 것이다.
기분 탓이 아니다.
순식간에 일요일이 지났다.
늦게 일어나 한 것이라곤, 집에서 영화를 보고 느지막히 P를 역에 데려다 준 것이 전부였는데.
그리고 월요일이 되자마자, 나는 정말로, 다시 b와 돈가스를 먹었다.
2년 6개월간 사용하던 휴대폰도 팔았다.
몇년 전 휴대폰을 사던 때만 해도, 2년 약정이라니 2년이 언제 가겠어 했었는데.
나는 그 2년이 훌쩍 지나 통신사를 바꿔버릴 때까지도, 같은 휴대폰을 썼다.
새로운 휴대폰은 기능이 좋다고는 하지만, 카메라가 커도 너무 커서 뒷면을 보고 있노라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언젠가는 이 렌즈가 뒷편을 다 차지하는 것은 아닐까?
오랫동안 함께한 휴대폰도 내 곁을 떠나고, 날은 쌀쌀해져 옷장 깊숙히 넣어둔 스웨터를 꺼내입고 욕조를 청소할 때까지 나의 삶에는 변한 것이 별로 없다.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이 출근을 하고, 매주 누구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마감을 지킨다.
그럼에도 시간은 점과 같아서, 지금 이 순간은 지금뿐이니 똑같은 것이란 없음을 안다.
가을은 매년 오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가을이 지금 뿐이라는 것도.
그러니 사실은 변하는 것이 별로 없는게 아니다.
늘 같은 매일을, 이 평온한 일상을 선택할 특권을 누릴 뿐이다.
가을을 만끽하며, 목전에 온 겨울을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