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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낫밷 Dec 11. 2023

일주일 동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

정신생리불면증(psychophysiological insomnia)

C 씨의 이야기


 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울증은커녕, 불면증에 걸려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머리만 대면 잠드는 스타일이었고, 학창 시절에도 너무 잠이 많은 거 아니냐는 엄마의 쨍한 잔소리를 들으며 아침에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하곤 했다. 


때로는 새벽까지 해야 할 게 있거나, 큰 고민거리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잠드는 게 평소 같지 않을 때가 있긴 했지만, 뭐 그 정도는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도 비슷하게 겪어 보았을 정도지, 하루이틀 그러면 그다음 날에는 엄청 일찍부터 피로감이 몰려와 초저녁부터 쓰러져 잠들곤 했었다. 



그런데, 난 지금 열흘째 한숨도 못 자고 있어 미쳐버릴 지경이다.



 처음 하루이틀은 그러려니 했다. 


건강검진에서 예전부터 갑상선에 있던 혹이 커져서 정밀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들은 날 밤, 혹시 나도 언니처럼 갑상선암이 돼서 수술을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머릿속에 생각들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잠자리에 누워서 목덜미를 만져보니 뭐가 오돌토돌 만져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괜스레 침도 잘 안 넘어가는 것 같고 입도 바짝바짝 타들어가 몇 번이나 거실을 오가며 물로 입을 축였다. 


그러고 다시 누우면 마치 너무 꽉 끼는 폴라티를 입은 것처럼 목이 조여드는 것 같아 여러 번 한숨을 쉬게 되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새벽 3시가 넘어간 시간이었다. 


'이러다 밤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눈을 질끈 감고 양 100마리를 세다가 어찌저찌 잠은 든 것 같은데, 2시간 남짓 선잠 밖에 못 잤던 것 같다.




 그러고는 하루를 비몽사몽 하며 보냈다. 


애들 학교 보내고 집안일 좀 하다, 대출 연장 때문에 남편과 여러 차례 연락을 주고받으며 은행 업무를 보다 보니 애들 학교 끝날 시간이라, 눈이 시큰시큰해도 중간에 잠깐 누울 틈 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초저녁부터는 피로감이 오히려 덜 느껴져서 평소처럼 저녁시간을 보내고 12시 넘어 다시 자려고 누웠다.

'오늘은 잘 자야지' 마음먹으려 했으나 어젯밤 들었던 생각들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와 괴롭히기 시작했다.

 

언니는 결국 갑상선을 다 떼버려 더 신경 쓸 게 없는 상태가 됐지만, 그러기까지 이 병원 저 병원을 오가며 고생을 꽤 했었다. 


처음에는 아주 안 좋은 암세포가 보인다고 해서 앞이 캄캄했다가...

지인을 통해 다른 대학병원에 가서 한 재검사에서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그런데 갑상선이 왼쪽 오른쪽이 있는데 한쪽만 수술을 할 건지 양쪽 다  할 건지도 말이 왔다 갔다... 

수술을 하면 평생 갑상선약을 또 먹어야 하네 마네...  


또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시간은 새벽이 넘어갔다.



내가 왜 이러지?



 평소엔 고민이 있어도 적당히 하다가 생각을 딱 접고 자야지 하는 게 됐었는데, 이상했다. 


나 같은 경우는 꾸준히 검진받다가 요번에 약간 커진 거라 혹여 뭐가 나와도 초기일 거라고,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 지도 않고 있었던 것 같은데...


사실 그 문제가 아니더라도, 올해 첫째가 고3 수험생활을 시작하기도 했고, 

몇 달 전부터는 친정엄마가 무릎 수술을 받으시면서 수술부터 재활 치료까지 쫓아다니면서 몸도 피곤하고 신경도 좀 곤두서 있는 채로 지냈었다. 


예민해진 여자 둘을 쫓아다니면서 뒷바라지하다 보니 나까지 신경이 곤두서 있는 시간들이 많긴 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스트레스 관리를 잘하고 있다고 자신했었다. 


그런 일들 쯤이야 누구나 겪기 마련이고,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감당 못할 일도 전혀 아니니까 말이다. 


그렇게 또 여러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은 계속 흘렀고, 전 날보다 한 시간 정도는 더 잔 것 같지만 마찬가지로 온몸이 천근만근처럼 느껴지는 아침을 맞이하고 말았다. 



오늘은 차라리 아주 피곤하게 하루를 보내고, 초저녁부터 일찍 자야겠다.



 마침 매주 두 번씩 다니는 엄마의 재활치료를 모셔다 드리는 날이라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긴 했다. 


노인네가 겁이 많아서 무조건 큰 병원에 다녀야 한다고, 동네 의원에서 간단하게 받을 수 있는 재활치료인데도, 주차도 힘들고 사람도 바글바글한 대학병원을 고집하신다. 


좁디좁은 지하주차장에서 접촉사고 안 내려고 잔뜩 긴장한 채로 병원에 들어섰고, 엄마를 치료실로 들여보내고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몸이 노곤노곤해져서 깜빡 졸다 스스로 코 고는 소리에 흠칫 놀라 정신을 차렸다. 


커피 한 잔 진하게 사 먹을까 하다가 밤에 잠을 못 잘 것 같아 참기로 하고 복도를 왔다 갔다 걸으며 잠을 쫓아 보았다. 


기진맥진해 집에 돌아와 저녁거리를 대충 만들어 놓고 저녁 7시부터 침대에 쓰러져 누워 버렸다. 



오늘은 기필코 푹 자고 말 테다.



 어제그저께 잠드는데 4~5시간씩 걸렸으니까, 지금 누우면 자정 전에는 잠들겠지 하는 계산이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잠을 부르기 시작했다. 


잠아 와라, 잠아 와라.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전투적인 자세로 잠을 쟁취하고자 노력했다. 


똑바로 누워서 온몸에 힘을 줬다 풀었다 해보고, 베개를 하나 품에 안고 옆으로 누워도 보고 잠자는데 좋다고 들었던 여러 가지 방법을 막 동원하고 있었다. 


근데 그러면 그럴수록, 하루종일 몽롱하고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던 정신이 눕고 나니 오히려 더 또렷또렷 말똥말똥해지기만 했다. 


몸은 피곤해서 축 쳐지고 허리도 쑤시고 하는데, 심장은 쿵쿵 뛰고 더웠다 추웠다 하다가 머리도 아팠다가, 자려고 하면 할수록 더 고통스러운 느낌만 들었다. 


밖에서 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10시 반이 넘었나 보네... 오늘도 못 자면 내일은 정말 큰일 날 텐데.


 딸내미 내다볼 겨를도 없이 알아서 밥 차려 먹으라고 방문 너머 소리를 치고, 다시 눈을 질끈 감고 베개를 끌어안았다.


한참 또 그러다 시계를 보니 11시 반이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하루가 넘어가는데...' 쫓기는 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 밤에는 30분마다 시계를 보면서 밤을 꼬박 새웠다. 


그러고 나서 하루하루 지옥 같은 날들이 지속되었다. 


낮동안에는 죽을 것 같은 피로감과 싸우며 버텼고, 오후가 지나가면 '오늘도 못 자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피어오르기 시작해 도통 무엇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는 진짜 금방 죽겠구나 싶어졌다...




자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잘 먹고 잘 자는' 것은 생존을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만큼, 먹고 자는 게 잘 안되기 시작하면 그 무엇보다 큰 고통에 빠질 수 있겠죠. 


다음 날 중요한 시험이 예정되어 있어 긴장이 가라앉지 않아서, 정리되지 않은 중요한 고민이 있어서, 궂은 날씨에 안 좋던 허리가 아파서 밤새 잠을 설치는 경우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겠죠. 


그러나 이렇다 할 이유가 없이 잠이 안 좋아지면서 '오늘도 못 자면 어떡하나. 자야 해. 자야 해.' 하는 생각에 꽂혀 잠이 오기는커녕 잔뜩 긴장한 채로 밤을 지새우는 경우를 정신생리불면 [psychophysiological insomnia]이라고 합니다.  




 이름은 어렵게 붙여 놨는데, 해석하자면 신체적 문제나 정신질환 때문은 아니면서 심리적 이유 때문에 못 자는 불면이라는 말입니다. 


그 심리적 이유 '자야 한다!' 내지는 '왜 못 자나?' 하는 마음 때문에 너무 과하게 잠을 자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죠. 


잠이라는 게 내 의지대로 딱 빠져 드는 게 아니잖아요? 


근데 그걸 내 의지로 컨트롤하려고 하면 할수록, 바늘귀에 밧줄을 꿰려 하는 것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을 붙잡고 끙끙대는 꼴이니 스트레스가 발생하며 몸은 점점 긴장하고 각성이 됩니다. 


잠이 오기는커녕 더 멀리 쫓아 버리고 있는 셈이죠. 


어떻게 해서 잠이 든다고 하더라도 꿈을 계속 꾸면서 굉장히 얕게 잔 것 같은 느낌으로, 또는 주변 소리를 다 들으면서 반만 잠들어 있는 것 같은 질 나쁜 잠만 잔 것 같아 오히려 더 심한 피로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렇게 잠에 대한 강박이 한번 자리를 잡아 버리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가 가진 지식과 노하우를 몽땅 동원해 이런저런 시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하루에 3~4잔씩 먹던 커피도 딱 끊어보고, 몸을 피곤하게 하기 위해서 땀 뻘뻘 흘리며 운동도 해보고, 잠드는데 몇 시간씩 걸리니 평소보다 그만큼 일찍 누워서 잠을 기다려보기도 하고, 정 안되면 술을 몇 잔 먹고 잠을 청해 보기도 하죠. 


그런 여러 가지 방법들 중에서는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것도 있지만, 대개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여 상황을 악화시키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다시 잘 잘 수가 있을까요?


 앞서 자려고 너무 애쓰는 게 문제라고 했었죠? 


그렇다면 해답은 [자려고 애쓰지 않는다]가 되겠습니다. 


아이러니합니다. 


그렇게 설명을 드리면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나는 잠을 못 자 죽겠는데, 자려고 하지 말라니? 


'일주일 동안 한숨도 못 자서 죽을 것 같은데 어디 돌팔이 같은 게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지 않으면, 몇 달씩 고생하는 경우도 흔치 않게 생기더라고요. 




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노하우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1. 시간을 정해 놓고 눕지 말고, 졸리면 누우세요. 


2. 15분 이내에 잠들지 못하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활동을 하세요. 


3. 그러다 눈꺼풀이 진짜 무겁다 싶을 때 잠자리에 다시 드세요. 


4. 단,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시간은 월화수목금토일 일정하게 유지하세요.




 이것만 잘 지키셔도 불과 며칠 내에 수면제를 안 먹고도 다시 잘 자는 날이 생기기 시작할 겁니다. 


하지만 두려워지죠... 졸릴 때 누우라 했는데 그럼 새벽 4~5시까지 안 졸리면 어떻게 하라는 거냐? 


그럼 그때 자고 7시 반에 평소처럼 일어나서 하루를 보내는 겁니다. 


장담컨대, 그다음 날 밤에는 새벽 4~5시보다는 훨씬 일찍 잠들 수 있을 겁니다. 




 수면 시간을 조절하려고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는, 

잠에 드는 시간을 컨트롤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수면이 비교적 건강한 사람들은 큰 어려움 없이 그 방법이 통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잠드는 시간보다 일어나는 시간을 조절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막말로 잠에 드는 건 내 의지로 할 수 없지만, 일어나는 건 내 의지로, 그게 안되면 같이 사는 사람한테 깨워달라고 해서라도 조절할 수 있잖아요? 


같은 원리로 해외여행을 가서 시차적응을 해야 할 때

현지 사람들이 자는 시간에 자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현지인들이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에 나도 억지로 깨어 있도록 노력하는 편이 압도적으로 시차적응에 필요한 시간을 단축할 수가 있습니다. 




 그 외의 노하우들은 인터넷에 [수면 위생]이라고 검색을 해 보시면 여러 유용한 얘기들이 나오니 참고해 보세요. 




 병원에 찾아오시게 되면 약물치료를 활용하기도 하는데요, 기계적으로 잠에 빠지게 하는 수면유도제를 복용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약의 특성상 금방 내성이 생기면서 오히려 '약을 먹어도 못 자네' 하는 불안감만 증폭시킬 수 있죠. 


그래서 저 같은 경우에는 불안과 긴장을 낮춰주는 항불안제(=안정제) 계열의 약을 2~3주 정도 처방을 드립니다. 


그렇지만 역시 약 복용보다는 위에 말씀드린 행동수정 기법을 훨씬 더 많이 강조드립니다. 




C 씨의 치료 경과


 병원에 찾아오신 C 씨에게 이와 같은 행동수정 기법을 설명드렸고, 약 처방도 드릴까 여쭤 봤더니 약까지 먹는다는 것이 처음에는 좀 무서워서 일단 약 없이 해보겠다고 하셨습니다. 


 한 주 뒤 방문에서 C 씨가 말씀하시길,


첫날은 거의 밤을 꼴딱 새우다시피 했고,  


둘째 날은 그래도 자정 넘어서 잠이 드셨다고, 하지만 새벽 4시쯤 깨서는 또 잠이 안 와서 아침 7시까지 잠자리에서 뒤척거리셨다고 하시더군요.


셋째 날부터는 또 못 자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과 함께 목에 답답한 느낌이 올라와 1시까지 기다리다가 별로 졸리지 않은데 그냥 누워버렸고, 또 밤새 고통스러웠다고 합니다.


주말이 돼서 오후 2시쯤에 소파에 누워 있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한 3시간 정도를 엄청나게 달게 주무셨다고 해요. 그때는 자야지 하는 생각 없이 그냥 누워 있다가 편안하게 잠에 빠져들었던 거죠. 


하지만 그렇게 꿀잠을 자고 일어나서는 '이제 좀 살 것 같다.'라는 안심이 되기는커녕, '낮잠을 너무 잘 자서 오늘 밤에 잘 자기는 글렀구나.' 하는 생각이 치고 올라오더랍니다.




 2주 차 방문 때 결국 약을 드셔보겠다고 하셔서 보통은 낮에 먹어도 심하게 졸리지는 않을 정도의 항불안제를 처방드리면서,

[약은 밤 9시에 꼭 맞춰서 드시고, 졸음이 날 찾아올 때만 누우세요. 그리고 새벽에 깨서 다시 잠이 안 올 때도 억지로 누워 계시지 말고 침실 밖으로 나와 계세요.]라는 지시사항을 추가로 드렸습니다. 




3주 차 방문하셨을 때는 처음 뵌 날 그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안색이 밝아지신 모습으로 말씀하셨어요.



 이제 좀 살겠어요. 그래도 약 먹고 하니까 5시간은 얼추 자게 되는 것 같아요. 물론 아직 매일 걱정은 되긴 하지만요.



그래서  '이제 좀 잘 자는 것 같으니 약을 안 먹고 자 보자.'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으실 텐데, 지금 바로 약을 중단하지 마시고, 2~3주 정도는 확실하고 꾸준하게 잘 자는 상태가 지속될 때까지 드시다가 줄여 보자고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3주 치 처방을 드렸는데, 그 이후로 몇 달째 다시 내원하지는 않고 계시네요. 


아마 원래 잘 주무셨을 때의 감을 되찾고 잘 지내고 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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