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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BE Sep 04. 2023

12 나와 닮은 사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 군대 속 커밍아웃 02


12 나와 닮은 사람


섹시 콘셉트의 여자 솔로 가수가 데뷔를 하면, ‘제2의 이효리’라는 기사가 한 무대기로 쏟아져 나올 때가 있었다. 이는 누군가의 유명세에 힘입어 인기를 얻으려 하는 흔한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마케팅 방식이었다.


예전에는 신인 여가수 입장에서 제2의 이효리라고 불리면 무한한 영광이나 감사함을 느낄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제2의 누군가라고 불리는 건 서로에게 딱히 달가운 일은 아니었던 거 같다. 이효리 입장에서는 젊고 실력 있는 신인들과 비교되어서 피곤하고, 제2의 타이틀로 데뷔하는 신인들은 대선배와 견주어지니 얼마나 스트레스일까.


이런 비교가 분명 칭찬의 의도인 것은 알겠지만, 어딘가 좀 별로인 느낌이 든다.



군대에서 행정병 직무로 처음 사무실 배치를 받은 날. 근무지 선임은 나와 몇 분 대화를 나누더니 ‘제2의 엘리’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나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저런 별명을 지어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2의 이효리라고 취급받는 신인의 경우, 적어도 그 신인은 이효리가 누군지는 알지 않는가. 하지만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엘리와 비교가 되고 있었다. 기분은 좀 나빴지만, 이병인 내가 무얼 할 수 있겠는가. 화를 내는 대신 너스레 떠는 것을 택했다.


- 혹시 엘리 일병님도 저처럼 금천구에 사십니까?


- 하하하 이런 재미없는 개그도 똑같아. 아 잠만, 이거 빨리 엘리 불러와야겠다. 엘리 일병! 엘리야!


근무지 선임은 옆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엘리를 큰 소리로 부르며 뛰어나갔다. 나는 속으로 ‘엘리 일병이라는 사람은 옆에서 복무하고 있군.’이라고 생각하며 선임들의 이름과 계급이 적힌 조직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모자 계급의 작대기가 2,3,4개인. 하여튼 나보다 높은 계급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여럿이 들어왔다.


- 얼굴은 안 닮았는데?


- 그래. 엘리 일병님이 좀 더 차분하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선임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를 품평 해댔다. 근데, 거기서 가장 껄렁거리는 선임이 갑자기.


- 하, 근데 얘 한참 빠졌네. 훈련소에서 경례하라고 안 배웠냐?


라고 말하며 나를 당황시켰다. 나는 곧 의자를 뒤로 밀치고.


- 필승! 경례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병 000입니다.


라고 관등성명을 댔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3초 정도 순간 정적이 되었다. 그러더니 자기네들끼리 껄껄거리며 다시 웃었다.


- 봐봐. 내가 닮았다고 했잖아. 엘리랑 판박이라니까. 제2의 엘리인 거 인정하지, 다들?


그 이후 다른 선임들과 간부들이 신병인 나를 보려고 사무실을 들렸고,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게 질리지도 않는지 근무지 선임은 나를 제2의 엘리라고 소리 높여 소개했다.


정작 주인공인 엘리는 그날 얼굴을 볼 수 없었고, 그 이후에도 바빠서 인사할 기회를 계속 놓쳤다. 근무지 선임이 나를 제2의 엘리라고 부르기를 멈추기까지는 정확히 일주일이 걸렸다. 그동안 놀림거리가 되는 것 같아서 짜증이 났는데, 내 표정에 약간 티가 난 것 같다. 그리고 그쪽(엘리 쪽)에서도 이제 그만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내 선임에게 핀잔을 준 것 같았다. 선임의 놀림이 사라지니 그 자리에 엘리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 생겼다.




어느 날. 저녁을 다 먹고 나오는 길에, 엘리 일병이 혼자 늦은 저녁을 먹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같이 식사를 한 동기들에게는 잠깐 할 일이 있다며 먼저 보내고, 엘리 일병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이병 주제에 감히 일병 말 호봉되는 엘리에게 필승 경례를 하고 앉아도 되냐고 물었다. 엘리는 나의 경례에 손사래 치며 앉으라고 대답했고, 처음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와 엘리는 젓가락 질 하는 자세도 다르고, 얼굴 모양도 다르고, 쓰고 있는 안경테도 다르고, 계급도 다르고, 모든 게 달랐다. 하지만 분명. 밥을 먹으면서 하는 간단한 안부만 나누었을 뿐인데. 왜 사람들이 나와 엘리를 닮았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건 분명… 촉이었고, 게이더였다.


그때 어디선가 나와 엘리 일병이 함께 있다는 소리를 들은 근무지 선임은 감색 슬리퍼와 질질 끌리는 생활복 바지를 엉거주춤 입고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 오오. 유유상종 끼리끼리. 도플갱어끼리 드디어 만나네. 오늘 누구 한 명 어떻게 되는 거 아니야? 야 이것도 기분인데. 내가 너네 위해 준비했다. 이거 BX에서 가장 비싼 커피인 거 알지? 이거 마시면서 데이트라도 해.


근무지 선임이 되지도 않는 드립을 치며 우리에게 커피를 건넸다. 나와 엘리 일병은 두 눈을 마주치며 서로 띠용하는 표정을 지었다. 선임은 진짜 데이트하라고 지원해 주는 든든한 삼촌 마냥 커피만 주고 의외로 별말을 하지 않고 떠났다.




자연스럽게 대화할 시간이 마련되자. 오히려 그의 커밍아웃을 끌어내는 게 쉬울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밥을 다 먹고 커피를 한 손에 쥐며 산책을 했다. 나는 주의해야 할 선임들이나 생활관 별로 분위기는 어떤지. 근무지에서 다른 자격증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황인지 등. 군 내 생활에 대해 이모저모 물어보았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게이인 것을 떠볼 수 있는 질문들도 했다.


- 엘리 일병님은 좋아하는 가수 누구 있습니까?


- 나는 가리지 않고 들어. 최근에 팔로잉 한 가수는 레이디가가야.


- 해외 팝 가수 말하시는 겁니까?


- 응. 맞아. 요즘 레이디가가의 Born This Way에 완전 꽂혔어. 최근 Applause 신곡 내서 프로모션 돌고 있는데, 인터뷰도 철학이 있고 멋있더라고.


보통 이성애자 남자들이 대답한 것과는 조금 결이 다른 대답이었고, 레이디가가는 게이 커뮤니티에서 인기 있는 가수였기 때문에 엘리 일병이 게이라는 확신이 더 커져갔다. 그래도 쉽사리 커밍아웃할 수는 없었다. 적절한 타이밍을 찾기 위해 질질 대화를 끌었다. 이곳은 군대고, 그는 선임이었기 때문에 자칫 내 게이더가 오류 값을 출력한 것이라면, 군번이 꼬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두 시간쯤 걸었을까. 청소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초조해졌다. 승질머리가 급한 나는 오늘 커밍아웃을 끝내버리고 싶었다. 그 결과, 결국은 돌아오는 길에 덜컥 커밍아웃했다.


- 엘리 일병님. 저 사실 남자를 좋아합니다.


- 나는 그런 사람을 이해해.


엘리는 그런 사람 이해한다며 말을 아꼈다. 이해한다니? 그게 끝이야? 속으로 생각하며 내가 좋아하는 부류의 남자 이야기를 했다.


- 제가 좋아하는 남자 스타일은 근육질에 약간은 기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엘리는 내 말을 듣고는, ‘그런 사람 참 매력적이지. 그런데 나는 좀 여리여리한 남자가 더 매력이 있는 거 같다.’라고 말했다. 속으로 ‘그래 그렇지. 이것 봐봐. 남자를 좋아하니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엘리는 시간을 보더니 발걸음 좀 빠르게 옮기자고 했다.


- 이제 아무래도 빨리 가야 할 것 같다. 점오 시간도 있고. 우리 좀 빨리 걸을까?


재촉하는 걸음에 나는 마무리는 짓고 싶었다. 나는 게이인 것을 밝혔지만, 엘리는 남자를 좋아한다고도. 게이라고도 말하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나는 속으로 ‘아니 얘 게이 맞는데… 분명 맞는데. 주변 사람들도 얘랑 닮았다고 하는 거 보면 게이가 분명했고, 내 게이더도 발동했고. 레이디가가를 좋아하는 거면 백퍼 게이인데…’라고 생각만 한다는 것이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 너 …!! 너!!! 레이디가가 좋아한다며!


엘리 일병은 다나까 투를 버린 나를 보며 놀라 했다. 


- 레이디가가를 좋아하는 게 어때서!


엘리는 반박했다.


- 노래가 좋은 거일 수도 있잖아! 그리고 왜 반말이야. 너 생활관에 집합하고 싶어?


나는 계급에 밀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아니 그러니까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커밍아웃했는데, 엘리 일병님도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게이끼리 같이 공생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자 말입니다.


- 나는 남자 좋아한다고 안 했는데? 그리고 나 일단 성당 가야 해. 이건 나중에 얘기하자.


엘리와 나는 생활관에 도착했고, 엘리는 분주하게 짐을 챙긴 뒤 성당으로 떠났다. 패가 내어진 시점에서 가슴이 쿵쾅거렸다. 엘리가 디나이얼일 수도 있고, 게이 기질을 가진 이성애자일 수도 있었다. 나랑 닮아 있다는 이유로 급하게 커밍아웃한 건 무리수였다.




나는 조급한 마음에 사이버 지식 정보방으로 내려가 성당이 퀴어에 친화적인지 검색해 보았다. 교회나 절은 몇 번 가본 적이 있었지만, 성당을 가는 사람은 내 주변에서 엘리가 처음이었다. 천주교 게이. 성당 게이. 여럿 검색해 봤지만 부정적인 기사가 많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첫 산책이 독단적인 커밍아웃으로 끝났지만, 그날 이후 우리는 저녁을 먹고 같이 걷는 게 루틴이 되었다. 대부분 우리의 대화는 상병 말호봉 되는 부대 내 최악질의 선임이 주인공이었다. 뒷담화가 고조에 다 달아 하강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아이돌 가수나 올리브영에서 사 온 샴푸 따위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다.


대화의 내용이나 엘리의 성격은 누가 봐도 나랑 비슷했고, 그건…. 보통 게이의 것이었다. 하지만 본인이 게이인 것을 말 안 하고 싶다면, 굳이 들추면 안 됐다. 이성애자들 사이에서도 꽤 센시티브 한 부류의 친구들이 있을 수 있었는데, 내가 괜한 오해한 것이 아닐까 미안했다. 만약 엘리가 이성애자라면, 말이 잘 통하는 일반 남자가 생긴다는 게 나에게는 진귀한 경험이 될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그것도 군대 내에서 커밍아웃을 한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그걸 듣고도 재빨리 성당으로 가려했던 저의가 궁금했다. 후임이 게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산책하던 도중에 성당으로 가려한 이유를 알아야 했다. 과연 내가 게이이기 때문에 성당에 가서 신도들과 탈동성애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간 것인지, 아니면 그저 집회가 있는 날이어서 간 것인지 확실히 하고 싶었다.


아무리 천주교가 몇몇 기독교 광신도자들처럼 게이타파를 외치는 집단이 아니라는 글을 봤다지만, 이제 막 알게 된 선임이 성당을 열심히 다니는 것은 성당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에게 큰 위험수였다.


- 엘리 일병님, 왜 성당에 빨리 가려고 하십니까?


산책을 하던 어느 날, 또 갑자기 성당으로 가려는 엘리를 붙잡고 말했다.


- 그건 내가 천주교인이니까 그렇지. 옛날부터 갔어.


- 근데 보통 일요일만 가지 않나요? 오늘은 화요일인걸요? 어제는 월요일인데도 가셨지 말입니다.


- ….


매일 성당에 가려고 하는 엘리를 이상하게 본 나는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 엘리 일병님. 솔직히 군대에서 커밍아웃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입대한 지 고작 3개월 정도밖에 안되었고, 엘리 일병님은 선임이기도 했으니까 말입니다.


- 그렇지. 어려운 일이지. 그래서 내가 뭐라고 하지는 않았잖아. 소문내지도 않을 거야.


- 그런데 제가 어렵게 한 커밍아웃에도 성당에 가려는 모습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는 처음에 성당에서 게이들을 배척해서 그 가르침을 받은 엘리 일병님이 급하게 자리를 뜨려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 아, 그건 아닌데….


엘리는 내가 뭔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처럼 반응했다.


- 그럼 뭐지 말입니까? 그게 아니면 뭔지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 성당에 가려고 하는 이유를 말입니다.


나는 오늘이 아니면 또 말할 기회를 놓치게 될까 봐 엘리를 다그쳤다. 엘리는 그때 내 말을 자르며 말했다.



- 성당에 군종병을 좋아해.



에필로그. 


- 이거 소설 맞지?


이 부분을 다 쓰고 나서 당사자인 엘리에게 파일을 보냈다. 그리고 소설이 맞냐는 대답을 듣게 되었다. 분명 에세이라고 말하며 파일을 보냈는데, 소설이 맞냐는 질문에 어쩐지 섭섭했다. 사실대로 쓰기에 아웃팅 위험이 있기 때문에 약간의 변조를 준 부분에서 소설로 느낀 게 아닐까 생각했다. 게이로 추정되는 아이돌을 ‘레이디가가’로 각색한 게 문제인지, 아니면 성당을 언급한 것을 안 좋게 봤는지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었다.


- MSG가 팍팍 뿌려진 거 같아서 물어봤어. 이건 우리가 알던 추억이 아닌 거 같아. 우리의 첫 대화는 현실이지만, 좀 더 드라마틱하고 청춘물 같았어.


그리고는 우리는 우리가 처음 마주했던 때를 다시 상기해 보았다. 대화를 나누면서, (여기에는 쓸 수 없지만) 내가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을 엘리가 갖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 엘리야, 우리 추억을 잘 기억해 줘서 너무 고마워. 나 저 글 쓰면서…. 너무 답답했거든. 내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건 이게 아닌데…. 하면서 계속 썼는데, 오늘 대화가 그 부분을 속시원히 긁어준 느낌이야.


나랑 닮은 엘리는 군대에서 서로 커밍아웃 한 이후 지금까지, 쌍둥이처럼 잘 지내고 있다. 그리고 군종병이랑은 오래 짝사랑을 했지만 결국 잘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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