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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BE Sep 04. 2023

13 섣부른 커밍아웃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 군대 속 커밍아웃 03


13 섣부른 커밍아웃


나는 부대 내에서 커밍아웃계 콜럼버스 같은 존재였다. 나와 처음 볼지라도 통한다는 느낌이 들면 새로운 대륙을 개척하는 것 마냥 계급에 상관없이 이곳저곳 커밍아웃했기 때문이다. 일병부터 병장, 그리고 신병 생활관의 상담사까지 부대 내에서 내가 게이라고 말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발언한 것은 아니었다. 계급 별로 몇 명씩만 부분적으로 내 정체성에 대해 알 뿐이었다.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도 못한 채로 나는 무모한 한수를 그들에게 던졌었다. 군대에서 2년 동안 같이 생활해야 한다면, 신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들을 먼저 믿어본 것이었다. 그리고 신뢰는 약점의 칼을 그들에게 쥐어주는 것으로 형성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정체성이라는 칼을 나 스스로 그들에게 쥐어준 것이었다.


이따금 꿈속에서는 내가 발견한 신대륙이 노다지가 아니라 지뢰밭으로 등장하고는 했다. 계급 별로 속속들이 숨어있던 용병들은 어느새 프락치로 전락하여 나에 대한 헛된 소문들을 열심히 퍼뜨리는 꿈이었다.


- 00는 게이잖아! 더러워! 


꿈에서 깨고 나면 가쁜 숨을 헐떡였다. 당장 군대가 감옥처럼 느껴졌고, 얼른 전역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몰아쳤다.


나의 아웃팅 트리거를 당기는 것은 꿈뿐만이 아니었다. 돌아가면서 여자 이야기를 하다가 내 차례가 되면 의심의 눈초리가 주변 공기를 차갑게 만들 때도 그랬다. 이외에도 일반 남성들과는 다른 답변이 예상되는 주제의 대화가 오고 갈 때면 나는 초조해졌다. 2년 동안 군 생활을 해야 하는데 게이라는 낙인으로 군번이 꼬일 것 같은 불안감이 나를 지치게 했다.


그럼에도 나는 꾸준히 정진하며 커밍아웃을 해나아 갔다. 콜럼버스가 앞의 일을 모르고 항해하는 것처럼 무모하다는 걸 알면서도 한 명 한 명 정성스럽게 나의 정체성을 말했다. 난 내 특유의 선함과 진정성이 그들에게 닿기를 바랐다. 아웃팅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커밍아웃이라는 지뢰를 이곳저곳 심는 것이 모순되었지만, 당시에는 그게 옳은 일이라 믿었다.



운이 좋게도 내가 커밍아웃했을 때, 꽤 많은 상대가 게이였다. 덕분에 우리 부대 내 게이커뮤니티가 나를 주축으로 형성되기도 했다. 계급별로 포진되어 있던 우리 커뮤니티 속 전우들은 대륙 간의 동맹처럼 서로 의지하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내 미래의 커밍아웃에 대해 지지해 준 것은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 주변의 친한 친구들한테 조차 커밍아웃을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맞 커밍아웃을 할 때면, 말미에는 꼭 당분의 말을 붙였다. 특히 나보다 나이가 어렸던 후임 A가 그랬다.


- 나는 형이 앞으로는 커밍아웃을 멈췄으면 좋겠어.


- 어? 왜? 내가 커밍아웃해서 너도 나한테 게이라는 것을 말하고 더 편하게 군 생활하게 된 거 아니야?


- 그건 고맙지. 형덕에 난생처음으로 누군가한테 커밍아웃할 수 있었고. 그런데 두려워.


- 어떤 점이 두려운데?


- 형이 말한 사람들이 나랑 형이랑 친하게 지내는 걸 알고 나도 게이라고 소문내고 다닐까 봐.


- 너 게이 맞잖아.


- 형처럼은 아니잖아.


A는 커밍아웃에서 얻는 이점보다 아웃팅에 대한 두려움을 걱정하고 있었다. 커밍아웃 경험이 전무했던 누군가에게는 나라는 존재가 큰 위험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아웃팅 폭탄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A의 우려와는 달리 다행히도 나의 커밍아웃이 큰 사건으로 번지는 일은 없었다. 또 끝이 안 보였던 커밍아웃에도 끝이 있었다. 적어도 군대 내에서 믿을 만한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커밍아웃을 마쳤기 때문에 이제는 커밍아웃을 매듭지어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그때의 내 심정은 모든 항해를 마치고 제자리로 온 모험가와 같았다.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감. 원 없이 커밍아웃한 것에 대한 성취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제자리에 오기까지 여러 난관들이 있었다. 커밍아웃을 한 상대들과 싸우기도 했고, 성격이 안 맞아서 초반의 친함은 온 데 간데 없이 멀어지기도 했다. 한 때는 그들이 내 정체성을 빌미로 나쁜 소문을 낼 까봐 걱정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싸움의 승률을 높이려고 내 약점을 들추는 유치한 사람은 없었다. 군대 내에서 커밍아웃이 순탄할 수 있었던 건 내 덕이 아니라 타인의 선한 상식 덕분이었다.



후임 A는 다수에게 커밍아웃한 것에 대한 나의 전리품을 부러워했다. 그 전리품은 아마 자유로움이었던 것 같다. A와 다르게 호감 가는 남자 연예인이나 상대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고, 군대에서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따위들 말이다. 그리고 나에게 사과를 했다. 섣부른 커밍아웃을 한 게 아니라 현명한 커밍아웃한 거라며 칭찬을 했다. 그리고 자기도 생각을 고쳐먹고 지금부터는 주변에게 커밍아웃을 하리라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띠용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의 커밍아웃을 말리던 사람이 줏대 없이 오늘부터 커밍아웃을 한다니 불안했다. 또 이제 막 고된 항해를 마친 나였기에 A의 커밍아웃 여행을 말리고 싶었다.


- A야, 네가 커밍아웃하는 건 섣부를 수 있다고 생각해.


- 왜?


- 부대 전원에게 커밍아웃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커밍아웃을 멈추기로 한 것은 이외의 사람들은 아직 동성애자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라고 판단해서거든.


- 그건 형의 편견 아니야? 그리고 형도 내로남불인 거 같아. 형은 내 아웃팅은 고려하지 않고 커밍아웃해놓고, 이제 와서 나는 커밍아웃하지 말라니.


- 그런 의미는 아니야. 너는 사회에서 커밍아웃한 적도 없잖아. 나한테 커밍아웃한 것도 내가 커밍아웃해서였잖아.


- 아니, 나는 형이 커밍아웃 안 했어도 커밍아웃할 시기여서 했을 거야. 그만 얘기하자. 점오시간이다.


A는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았다. A의 커밍아웃의 부작용으로 발생할 수 있는 아웃팅에 대한 불안감보다 A 스스로에게 상처가 될 일이 생기지 않을까 불안했다. 나야 커밍아웃을 많이 하면서 내성이 생겼다지만, A는 첫 커밍아웃이었기 때문이다.


첫 커밍아웃은 긍정적으로 성공해야 한다. 그래야 그 기억을 삼고 앞으로의 커밍아웃도 순탄하게 될 것이다. 옆에서 도움을 주고 싶었다. 경험이 많은 선배로서 형으로서 쌓인 노하우를 알려주고 싶었다.


서로의 뜻대로 서로가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A와 나는 같은 생활관을 썼지만, 며칠 동안 말이 없었다. A와 나는 일과 시간이 끝나면 같은 침상에 누워 영화를 보기도 하고, 과자를 먹을 정도로 친밀한 사이었지만, 냉전 기간에는 그러지 못했다. 


대신 A는 자신의 후임인 B를 데려와 같이 누워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둘은 친하지 않았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갑자기 친해지는 것을 보니 A가 B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커밍아웃한 것 같았다. A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친한 친구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B에게 질투를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그 둘이 계속 눈에 걸렸다.


A가 나와 B를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달랐다. 매일 나와 같은 침상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는 했지만, 나와는 이불을 같이 뒤집어쓰고 속닥거리는 일은 일절 없었다. 하지만 A와 B는 무엇을 하는지 모르게 같은 이불 아래에서 잡담을 나누었고, 나는 그 모습이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뭐랄까. 보이지 않아서 수위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남자들끼리만 있으면 가끔 장난의 수위는 높았다. 나조차 같은 생활관을 쓰는 사람들끼리 목욕탕에서 서로의 엉덩이를 장난조로 만지며 놀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었지만, 그 둘이 이불속에서 하는 장난이 자칫하면 위험한 상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석연찮음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아침에 사무실로 출근을 하는데 주변 간부들이 긴급회의를 하고 있었다. 나와는 별 상관없는 내용이겠거니 하며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부대 인트라넷에 접속하였는데 눈에 띄는 문서가 하나 보였다.


동성 성추행 관련 문서였다. 문서를 읽어보니 부대 내에서 한 선임이 과도한 업무 지시는 물론 침대에서 성추행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심장이 덜컹하면서 꼼꼼히 정독하였는데 익숙한 이름들이 있었다. A와 B였다.


당장 A에게로 달려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A와 B는 같이 놀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상황 설명이 필요했다. A는 곧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소 눈망울을 하며 나에게 이야기했다.


- 형, 사실 어제 B랑 업무적으로 의견 차이가 있었거든. 이제 B도 상병이 되어가니까, 업무량을 줄여달라고 나한테 말을 하는 거야. 그런데 B가 상병이 되어도 아래 근무지 후임이 들어온 게 아니어서 일을 줄여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어. B는 감정이 격해지더니 큰 소리를 내더라고. 나도 참을 수 없어서 화를 냈고.


- 그런 거는 너네가 맡은 보직에서 예전부터 흔하게 일어났던 일 아니야?


- 맞아.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긴 했는데. 형 나 어쩌면 좋아. 얘가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나 게이라는 걸 신고 센터에 알려버렸어. 나 이제 군대 생활 어떡해. 이미 간부들이랑 주변이 다 알고 있다고.


- 너 기어코 B한테 커밍아웃을 했었구나.


- 나 너무 후회돼. 커밍아웃만 안 했어도. 커밍아웃만 안 했어도 이런 일 일어나지 않았을 거 아니야.


이야기를 듣는데 너무 화가 났다. 그때 커밍아웃 때문에 문제가 생긴 광경을 처음 보게 되었다. 또 평소에 자신감 넘치던 A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겁에 질린 모습뿐이었다.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 말이 나오려고 할 때면, 지금 상황에서는 하등 도움이 안 되는 말인 ‘그러길래 내가 섣부르다고 하지 말라고 했었잖아’와 같은 내용들만 머릿속을 스쳤다.


그 사건 이후 A는 B와 단 둘이 이야기하기도, 주임원사와 삼자대면을 하기도 했다. 또 간부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결론은 A와 B가 같은 생활관을 쓰면 안 된다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그 둘은 완벽히 분리되었다. 생각보다 시시한 조치와 결말에 좋은 의미로 ‘역시 군대구나(?)’라고 생각했다.



사건의 당사자는 아니라 제대로 내막을 듣지는 못했지만, 간부들은 평소 일하기 싫어하고 남의 약점을 잡는 B의 행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B가 진술한 말들이 엉키며 솔직하게 성추행은 아니었다고 말한 것 같았다.


A는 사건이 일단락되고 나서 평안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 일 이후 커밍아웃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단 한 번의 섣부른 커밍아웃이 마지막 커밍아웃이 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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