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 군대 속 커밍아웃 01
- 이 설문지, 정답이 있는 건가요?
군대 안에 있는 상담사가 예상과는 다른 내 답변에 어쩔 줄 몰라한다.
- 정답이 있다기보다는. 보통은 이런 답변을 하지 않으니까요…. 보통은 좋아하는 성별을 여자라고 체크하거든요. 그런데…. 남자를 좋아한다고 체크가 되어있어서요. 잘못 체크한 게 아닌가 하고 물어봤어요.
- 아니요. 맞게 체크했어요. 남자친구가 있거든요.
입대를 하게 되면 다양한 설문조사를 한다. 신체검사를 할 때도 하고. 훈련소에 들어가서도 하고. 자대배치를 받고서도 하고. 중간중간 주임원사실에 불려 가서 하기도 한다.
군장병들이 심리검사를 하는 이유는 아마도 탈영 위험 때문일 것이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군대에 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아무리 국민의 의무라고 해도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 (물론 20대가 넘어가 30대 이상이 자유를 억압받으면 더더더 스트레스를 받을 듯싶다.)
군 내 심리검사는 탈영 맞춤으로 질문이 구성되어 있다. 내무반에서 생활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가. 선임이 괴롭히지는 않는가. 현재 심경은 어떤가 등 군대 생활이 어떤지에 대한 물음들 뿐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설문지의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 Q. 당신이 좋아하는 성별은 무엇인가요?
- A. 1번 남자. 2번 여자. 3번 둘 다.
자대배치를 받기 전에 자대 안에 있는 상담실에서 신입 병사들을 모아두고 검사를 하는 때였는데, 뭔가 석연찮음이 느껴졌다. 그전까지의 검사들은 군생활에 잘 적응하는지 물어놓고, 왜 갑자기 성적 취향에 대해서 물음을 갖는지 의문이 들었다.
어디 부대에서인가 게이 색출 작업의 일환으로 직접 데이팅 어플을 사용하는 병사들을 찾아내어 처벌했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내 앞에 놓인 질문은 그 의도가 너무 훤히 보이는 1차원적인 물음이어서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대놓고 어떤 성별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누가 남자라고 대답하겠는가. 남자를 좋아하는 게이들도 대부분 여자라고 체크할 게 훤히 보이는데. 이런 질문을 하는 저의는 무엇일까. 혹시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면, 전역을 시켜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지만, 이런 사유로 전역시켜 줄 리 없었다. 그랬으면 모두 여자를 좋아해도 남자를 좋아한다고 체크했겠지. 그런 편법이 통하는 국가면 난 이미 이민을 갔겠지. 이런 생각 끝에 여자를 체크하고, 다음 문항들을 보았다.
다른 질문들을 밑으로 내리며 하나하나 읽어볼수록 좋아하는 성별이 무엇이냐는 물음이 머리에 맴돌았다. 어쩌면 화가 났다. 당시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그와의 교제가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여자를 좋아한다고 체크하면서, 나는 그의 존재를 부정해야만 했고 나 자신을 부정해야 했다. 왜 국가는 군대라는 곳에 나를 끌어들여 이 상황을 만드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별 질문 아니었지만 헤어 나오기 힘든 무력감과 분노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막판에 여자라고 체크한 문항을 두 줄로 쫙쫙 긋고 남자라고 고쳐 제출했다.
상담사는 상담실에 있는 신병들의 설문지를 다 훑더니 나만 남고, 각자 생활실로 돌아가라고 했다. 다들 신입답게 각이 살아있는 발걸음으로 들어갔고, 나는 허리를 곧게 세워 앉아 상담사를 기다렸다.
상담사가 무슨 말을 할지 예측이 갔다. 아마도 내가 게이라고 설문지에 밝힌 것 때문이겠지. 다른 부분은 다 정상적이어서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나는 긴장되었지만, 이미 설문지에 체크한 이상 솔직하게 대답하리라고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아이스브레이킹 차원에서 군대 생활은 괜찮냐며. 여기 부대의 짬밥은 생각보다 맛있을 거니 음식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나의 군생활을 위로했다. 그리고 매끄럽지 않게 본격적인 다음 대화 주제로 넘어갔다.
- 8번 문항에 남자를 좋아한다고 체크되어있는데, 잘못 체크한 거죠?
마치 답이 있는 문제였던 것 마냥 말하는 것이 성가셨다.
- 아니요. 맞게 체크했어요. 지금 남자친구가 있거든요. 그러면 좋아하는 상대가 남자라고 보는 게 맞죠?
솔직하게 대답하니 속이 시원했다. 어느 정도 이 상황을 예견했던 터라 말문이 막혀있는 상담사를 대신해서 내가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 저도 이 문항을 보면서 짧은 시간 고민을 많이 했어요. 솔직하게 답할까. 말까. 그런데 이거 정답이 있는 질문은 아니잖아요. 그렇죠?
- 네, 아니죠, 정답은 없어요. 솔직하게 대답해 주셔서 감사해요.
- 근데 제가 궁금한 건, 이렇게 남자 좋아한다고 체크한 병사가 있기는 해요?
- 음, 글쎄요,
- 아, 별로 없군요.
- 꼭 그런 거는 아니고요.
상담사는 해당 게이 병사를 숨기려는 것인지 아니면 커밍아웃을 한 게이가 없었던 건지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 그래도 여기는 군대니까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이건 그냥 걱정하는 차원에서 얘기하는 거예요.
어쩐지 김이 식는 말을 했다. 고작 한다는 조언이라는 것이 조심하라는 것뿐이라니. 상담사에게 말꼬투리를 잡으며 이런 질문을 한 이유는 무엇이냐. 이렇게 별 시답지 않은 충고를 할 거면 왜 나를 불러서 이야기했냐며 다그치고 싶었지만, 가만히 있기로 했다. 군대 상담사로서 그는 자기가 할 일을 했을 뿐이고, 한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에 책임감을 운운하고 싶지는 않았다.
에필로그. 상병쯤 되었을 때, 동기 한 명이 핸드폰을 반입하여 사용한 적이 있다. 게이인 동기가 데이팅 어플을 다운로드하여 부대 근처에 있는 게이를 탐색했었다. 근처에 있는 게이는 단 한 명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근방 10km 너머에 있었다. 근처에 있다면, 같은 부대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궁금해했다.
예상가겠다시피, 그 사람은 상담사였다. 평소에는 사진을 내리고 있어서 누군지 알 수 없었는데, 주말이 되면 사진을 올려서 우리에게 들통이 나버린 것이다. 상담사의 정체를 알게 되니, 왠지 찾아가서 한 마디 해주고 싶어 졌었다.
- 여기는 군대니까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이건 그냥 걱정하는 차원에서 얘기하는 거예요.
이건 비아냥 거림이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나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