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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은별 Mar 27. 2022

비 새는 구멍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천장을 메우는 사람처럼


넓은 땅에 사람이 없어 황량해요. 평소 외로움을 자주 느끼나요?

나의 생년월일시 받아 적은 이가 한 말이다.



과중에 업무에 지쳐 두 번째 퇴사를 결심했다. 왼쪽 이마 위 한두 가닥이었던 새치가 한 움큼이 될 정도로 괴로운 날이었다. 취재 대상의 이야기를 다듬고 또 다듬어 한 편의 글로 완성하며 진이 빠졌다. 글을 쓰기 위해선 엉덩이가 무거워야 한다는 시쳇말이 떠올랐다. 다 썼다고 생각한 글을 들여다보면 고칠 것 투성이었다. 순간 몰입해 놀랄 만한 속도로 일을 끝내는 내게도 버거울 만큼 업무가 많았다. 무엇보다 내가 쓴 기사가 선하든 악하든 어떠한 영향이라도 미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간간이 누군가 남긴 댓글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한 달 지나 새로운 한 달이 시작되고 누가 읽는지 모를 기사를 쓰다 제풀에 지쳤다. 작년에는 잠에서 깨자마자 '자리매김' 네 글자를 되뇌었다. 좀처럼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 떠도는 나를 한 곳에 붙잡아 두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비 새는 구멍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천장을 메우는 사람처럼 느끼는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나의 불안한 정서를 부모님에게 물려받았다 탓하기엔 나이가 너무 들어버렸다.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직장에 오래 머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연인에게도 순애보를 가지지 못한다. 늘상  곳으로의 여행을 계획하거나 유학을 꿈꾸며 산다. 혼자 떠난 낯선 나라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같다. 며칠 전에는 오빠에게 이제 결혼을 생각하라는 전화를 받고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심심한 일상을 견디지 못하고  순간 화려하게 살고 싶은 내가 결혼을   있을까? 나를 믿지 못해 결혼도 포기하고 정신과 주름진 몸의 괴리를 느끼는 노인이 될까 두렵다. 요즘 나는 머리가 꽃밭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천진난만하게 홀로 늙은 미래의 내게 하는  같기도 하다. 다른 이와 함께 있을  모나지 않도록 오랜 시간 나를 조각해 무르익은 처세술과 태연함을 가지고 있지만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 않나.



좋아하는 작가 이름 몇을 나열하면 금세 나를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이와 결별하고 술과 눈물에 절어 생활한 실제 침대를 전시장에 내놓은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칼 같은 글쓰기로 외국인 대사관과 불륜 저지른 사생활을 책 펴낸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자신의 인생을 작품 매체 삼아 세계적인 작가로 도약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 음주 중독자의 일기를 고백하며 자기 성찰 에세이를 쓴 캐럴라인 냅Caroline Knapp까지. 자꾸만 엉망이 되려 몸부림쳤던 지난날을 예술로 승화해 끝내 인생의 도리를 다한 그들에게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나는 몇 주 전 친한 언니들과 이태원에서 술 마시고 놀다 코로나에 확진되었다. 혼곤한 잠에 빠지고 눈 뜨면 다시 약 먹을 시간이었다. 안 그래도 직장 때문에 괴로웠는데 이참에 쉬게 되어 좋다며 능청을 떨었지만 이불을 덮고 창문을 꼼꼼히 닫아도 가시지 않는 오한 때문에 겁이 났다. 머리맡에 생강 꿀차를 놓아주는 다정한 동거인에게도 사경 헤매듯 신경질적인 혼잣말을 할 뿐이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지만 사흘간 혹독하게 앓으니 주색잡기에 빠졌던 나를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퇴사 후 돈을 벌지 못할 것이 걱정돼 급하게 다른 회사에 서류 지원을 하고 최종 면접을 앞둔 상태다. 엉망진창 살고 싶어도 끝내 나를 붙잡는 모티베이션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아니었다면 조금 있는 글재주를 믿고 위에 쓴 작가처럼 살리라 까불다 패가망신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만약 조각이라면 거센 비와 바람에도 끄떡없도록 어떤 연장도 들이밀 수 없는 단단함과 견고함을 갖춰야겠다. 허나 이 사이 자꾸만 나를 들로, 산으로, 바다로 모는 불안함은 어떻게 다뤄야 하나. 연인과 나란히 누워 미래를 약속하고 내가 어떤 모습으로 늙을지언정 사랑하리라는 맹세에 안심하면 될 일인가. 많은 사람이 '그것이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을 받아들인 채 묵묵히 걸어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사실 영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닌가. 누구를 붙잡고 토로해도 외로울 이야기를 이곳에나마 흩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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