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씨를 다니고 있으면 내가 어떻게 다른 회사를 다녔는지 잊을 때가 있다. 이렇게 학교 같은 스타트업이 있을 수 있을까? 아침에 계획서를 내고, 오후에 그 계획을 어떻게 실행했는지 매일 발표했다. 교육 시간이 마련되어 있고 그 시간에 배운 것을 어떻게 적용했는지 발표하는 시간이 있다. 매출성과를 낸 사람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면서 환호한다. 처음 이 광경을 보았을 때 나는 생각했다. 이 회사 대체 어떻게 돈을 버는 거지?
1년 정도 다녀본 결과, 청년이 갖는 동기부여에 달린 돈 벌기를 하고 있다. 청년들의 잘하고 싶은 마음, 성장하고 싶은 마음, 더 잘 해내고 싶은 본질적인 마음을 건드려서 그게 매출로 이어지게 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할 텐데, 원리는 단순하다. 잘한 사례를 만들고, 그 사례를 지지하고, 더 나은 방식을 말하는 사람을 칭송한다. 이 방식은 아주 효과적이다. 관성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다. 자기 일을 주도적으로 찾는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이다.
다른 회사 먼저 경험한 이들은 이 대목에서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나는 회사에서 시간을 내어 칭찬을 해주는 문화가 가히 충격적이었다. 첫 직장에서인가, 어떤 선배가 나한테 회사는 칭찬 받으려고 다니는 데가 아니다. 내가 너한테 칭찬해주려고 월급 받는 줄 아냐고 혼냈던 순간이 있었다.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게 직장 생활이지, 역시 쉽지 않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회의에서 내가 잘 한 부분을 발표하면 '다같이 지지해주고, 영감을 나누어 봅시다!' 라는 말을 시작으로 내가 이 일을 해낸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토론이 벌어진다. 이건 혹시 고도의 맥이기인가? 싶은 순간들을 견디고 나면 칭찬의 순기능을 직시하게 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더 잘하고 싶다. 더 칭찬을 받고 싶어! 더 잘한다고 해 줘! 그 마음으로 회사를 다니게 되었다. 정말 믿기지 않게도.
물론 부작용도 있다. 칭찬과 긍정과 웃음이 넘쳐나는 회의가 지속된다고 해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실수를 하고, 태도가 삐딱해질 때도 있고, 서로의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는 순간은 온다. 피드백이 필요한 순간이다. 지지와 칭찬은 쉬운데, 피드백은 한 차원 더 위의 숙제다. 지적하면 상대가 기분이 나쁠 것 같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망칠 것 같고, 그에게 적절한 문제 해결책을 주지 않으면 무책임해보인다. 결국 좋은 얘기만 하게 되고, 나쁜 얘기는 둘둘 말아서 뒤에서 꼭 숨겨놓게 된다. 의도가 아니더라도.
비단 아리씨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나이 서른 다섯만 넘어도 나에게 관심을 갖고 잔소리하는 사람이 싹 사라진다고 한다. 너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이런 말들을 하기란 껄끄럽다. 그 말을 한다고 해서 상대가 바뀐다는 보장도 없다. 바뀌어야 하나? 저 사람의 스타일인 걸 하고 한 발 물러서고 나면 함께하고 싶지 않은 부분들이 불쑥 불쑥 보여질 때도 두 발 세 발 물러서게 된다. 나이 들어서 인간관계가 좁아지는 것도 사실 이런 원리일지 모른다.
아리씨의 회의 문화를 대대적으로 고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좋은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부활시키면 되었다. 바로 '브랜드 평가'다. 브랜드 평가는 손유빈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평가를 해보자, 라는 것이다. 화장품 브랜드 평가 1위, 평판 1위 같은 기사들에 등장하는 브랜드들처럼 '손유빈'이라는 사람의 브랜드 평판을 돌아가면서 얘기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굉장히 공포스럽고 고통스러운 시간으로 예상되지만 그 결과는 순조롭게 흘러간다.
나도 처음 브랜드 평가를 받을 때 지레 겁을 먹고 바들바들 떨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피드백을 받을 일은 없었다. 브랜드평가를 받을 때마다 새로운 인사이트가 있었다.
"손유빈 리더는 잠재력이 많은 사람이다. 본인을 계속 작은 그릇에 담고 스스로의 능력을 제한하는 모습이 있다. 그 그릇을 깨면 더 크고 넓은 그릇의 사람이 될 것이다."
"가끔 감정적일 때가 있는데, 금방 털어내고 일에 집중하려는 모습에 영감이 있다."
나의 부정적인 모습에 대한 일방적인 평가가 온다기 보다는 일장일단의 원리가 잘 적용된 피드백이 돌아온다. 팀이 달라질 때마다 브랜드평가를 했지만, 나에게 상처를 주거나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공개적이고, 다수가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를 비난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드러운 말만 오고 가지도 않는다. 불변의 진리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눈이 똑같다는 것이다. 한 사람에 대한 긍정/부정 평가가 그리 차이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있으면 내가 타인에게 보여지고 있는 모습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해진다. 내가 보여지고 싶은 모습과 실제 보여지는 모습의 괴리를 인식하게 된다.
브랜드 평가를 받고 난 이후로 나는 내가 스스로를 너무 제한한다는 감각을 느끼기 시작했다. 일을 하다가 감정이 솟구칠 때가 생겨나면 최대한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으려는 방향으로 집중했다. 그리고 정말 나에게 필요한 변화가 생기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평소 내가 스스로의 문제를 직시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전혀 직시하지 못하고 있었구나 깨닫게 되기도 했다.
이런 메커니즘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이론충인 나는 구글링을 시작했다.
기획의 정석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알게된 4MAT 이론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습득하고 배우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쉽게 도식화 해놓은 것이다. 우리가 학습하는 바에 대해 왜, 무엇을, 어떻게, 만약? 이라는 흐름을 거쳐 내재화해야만 삶에 깊숙이 관여하는 학습이 가능하다고 본다.
내가 생각하기에 네 가지 단계에서 가장 핵심은 '인식'이다. 왜-무엇을-어떻게-만약의 구조 안에서 나는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이 과정을 통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인식해야만 결국 이 과정에서 얻게 될 학습 내용이 내 삶에 완전히 적용될 수 있는 초석을 만들게 된다. 피드백이 누군가에게 새로운 것을 학습하게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올바른 피드백의 시작점도 바로 이 '인식'이 되겠다.
피드백에서 오는 문제는 대부분 타인의 시선에서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이건 별론데?', '왜 이렇게 했어? 이해가 안 돼', '이렇게 하면 별로 설득력이 없을 것 같은데' 등등 타인의 시선에서 평가하고, 그것이 더 많은 타인의 시선에 맞추기 위한 작업으로 변질될 때가 많다. 누군가의 의견에 따라 뭔갈 바꾸고, 만들었는데 그 결과물이 더 좋지 않았던 경험이 이럴 때 발생한다. 앞서 말한 '인식'의 중요성을 간과한 결과다.
피드백의 시작점은 타인의 시선에서 판단한 문제점을 '나' 본인의 시선으로 들어가도록 '인식'하게 하는 게 우선이 되어야 한다. 모두가 자신의 방식이 가장 최선인 상태로 일한다. 콘텐츠를 만들 수도 있고, 업무의 순서를 정할 수도 있다. 그 방식에는 다 나름의 근거가 있고, 그 근거를 세우기에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수 있다. 그 방식이 견고할수록 잘못된 부분에 대한 지적은 일종의 에러로 취급될 가능성이 크다.
타인의 시선에서 보이는 모습을 말하되, 평가하지 않는다. 여기에 이 사진이 있는 게 문맥 흐름상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의도한 거야? 내가 생각하는 컨설팅은 이거고, 그래서 가장 중요한 업무 우선순위는 이거라고 생각하는데, 이걸 3순위로 한 이유가 있어? 의문을 던지면 본인이 세운 근거를 말하여 관철시키거나, 문제를 인식하고 바꾸게 된다. 그럼 사실 내가 한 피드백이 큰 무게가 없다. 넛지. 슬쩍 찔러보는 수준으로 얘기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좋은 피드백이라고 생각한다.
브랜드 평가는 흔적을 남기지만, 효과가 확실한 방법이다. 즉각적으로 인식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나의 브랜드가 다른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그 방향이 내가 의도한 것인지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그저 나의 인식과 타인의 인식이 교차하는 지점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 부분이 저 위 혼란한 도표에는 형광색 네모로 표시되어 있다. Reflective Observation 반성적 관찰.
해석이 너무 번역체 같아서 나는 이것을 '상관찰'이라고 부른다. 성찰과 반성이라는 단어는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느낌이 들어서다. 쉽게 말하면 '보여지는 모습을 관찰한다'이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나와 타인의 양방향적인 관찰이다. 내가 보여지고 싶은 모습대로 타인에게 비춰지고 있는지, 그 간극을 인식하고 줄일 수록 나를 발전시키고 학습해야할 무엇이 뚜렷해진다.
회사는 직원에 대한 많은 평가 방식을 고민한다. 점수를 매기는 방식은 너무 폭력적이고, 그렇다고 해서 회사의 일원들의 역량 평가를 뒷전으로 할 수도 없다. 익명 평가도 효과적이지 않다. 여러 사람의 이름 뒤에 숨어 의견을 남기고, 그게 무뚝뚝한 텍스트로 전달되는 방식이 효과가 있을 리가. 나는 5인 내외가 다같이 모여서 대놓고 브랜드 평가를 통해 상관찰을 하는 시간을 갖기를 추천한다.
다같이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지... 좋기야 하겠지... 라고 생각이 들지만 엄두가 안 나는 분들이 있을 수 있다. 이 다음에는 조금 더 실전으로 넘어가서 브랜드평가를 위해 세워야 할 몇 가지 룰에 대한 얘기를 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