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유빈 May 05. 2024

'1인분 못 하던 신입'의 1년 뒤 놀라운 반전

우리 회사에 미친 실력자가 있어요

오늘은 내가 정말 사랑하는 후배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아리씨에 입사하기 전 이곳에도 콘텐츠를 만드는 친구가 있다고 소개 받았다. 내가 멘토로서 조언이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달라는 요청이었다. 첫 인상은 뭐랄까. 위축과 자존감 상실을 사람으로 만들면 이랬을까, 싶었다. 당시 아리씨에는 이 친구를 제외하고 지자체 컨설턴트만 7명이었다. 지자체에게 연락하고, 곧잘 상품에 대해 잘 설명해서 매출을 내는 사람이 1등인 시기였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전화해서 문을 두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콘텐츠를 만들든 광고를 내든 해서 아리씨를 알리는 임무가 예솔 리더에게 주어졌다. 당연히 못했다. 처음인데 어떻게 잘하겠나, 싶었지만 그 당시 예솔은 못하는 것들을 모두 제 탓을 하고, 제 살을 깎아 먹고 있었다.


"예솔아, 너는 아리씨에서 꿈이 뭐야?"

"저는 다른 분들께 피해 안 주고 1인분만 하고 싶어요."


그 모습에 나는 화가 났다. 첫 직장에서의 내 모습이 겹쳐보였다. 신입이 못 하는 걸 신입 탓하는 회사에서 나는 맨날 울며 야근하고, 눈치 보던 나날이. 3년차가 지나고 나서는 생각했다. 신입이 못 하는 건 신입을 못 가르치는 회사와 사수의 문제라고. 근거는 없었다. 그래서 예솔을 만나고 처음으로 사수가 된 이 시점에 나는 예솔을 통해 그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내가 좋은 사수가 되는 건 기본이고, 일을 못 하는 신입에게 손가락질 하지 않는 회사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모든 신입의 처음은 처참하다. 예솔은 정말 모든 게 느렸다. 말도 느리고, 글도 느렸다. 내가 일러준 말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똑같은 톤으로 정확히 다섯 번씩을 말했다. 내가 피드백을 다시 해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만 지어서 내 복장이 터졌다. 예솔은 언제나 내가 준 피드백에서 벗어난 결과물을 가져왔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첫 블로그 콘텐츠를 만들어서 보여줬을 때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예솔이 쓴 표현 중에 '담당자(광고주)님 땡 잡으셨습니다'라는 표현이 있었다. 기사나 데이터 관련 진지한 얘기만 쓰던 나에게 '땡잡았다'라는 표현은 가히 충격 그 자체였다. 어떻게 콘텐츠에 이런 표현을 쓸 생각을 하지? 고치게 하려다가 그냥 뒀다. 웃기니까. 우스운 표현이라곤 절대 안 쓸 거 같은 공무원 타깃 콘텐츠에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게 반전이었다. 너무 웃기고 재밌는데 문제는 이 블로그 콘텐츠에 자그마치 사흘이라는 시간을 쏟아붓는 데 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 늦을까? 화도 내보고, 달래도 보고, 몇 시간씩 붙들고 설명도 해봤지만 효과는 없었다. 주변 팀장급인 친구들에게 물어보고, 좋은 사수가 되는 책도, 글도 많이 읽었다.


'걔는 안 될 거 같은데? 아무리 가르쳐도 되는 애들이 있고, 안 되는 애들이 있어.'

'마이크로매니징은 일을 하는 사람의 모든 일에 간섭하고, 통제하는 행위로 모두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런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점점 더 악에 받히기 시작했다. 니네가 예솔이를 알아? 예솔이에게는 지금 마이크로매니징이 필요해! 아무도 알려주지 않고 해오라고 닦달만 하잖아! 누굴 낳은 사람마냥 여기 저기 외쳐대고 싸웠다. 예솔에게도 화를 많이 냈다. 주눅 들지 마! 네가 뭘 잘못했어! 눈치 보지 마! 당당하게 해! 이게 그렇게 오래 걸릴 일이야? 고민하지 말고 해! 잘하고 싶으면 이번엔 그냥 발행하고 제발 다음에 잘해!


내가 그렇게 화를 내는데도 예솔은 나를 좋아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같으면 '니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할 것 같은데 예솔은 꼭 '저 잘 돼라고 하는 말씀이잖아요. 저는 좋아요~' 라고 짱구 또는 맹구 같은 특유의 목소리로 말했다. 보면 웃음이 났다. 나뿐만 아니라 예솔이 말하면 다들 웃었다. 예솔은 진지하고 묵직한 목소리로 당황스러운 말을 자주 했다. 어이 없어서도 웃고, 신기해서도 웃고, 어떻게 저렇게 모난 데 없이 진지할까 싶어서 웃었다. 맨날 야근하고, 늦게까지 남아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거 중요한 거 아니야! 그냥 퇴근하고 내일 와서 해! 또 뭐라고 했다. 그러면 또 해야하는데.. 조금만 하고 갈게요 하면서 헤헤 웃고 야근하는 예솔이었다.


입사 전 한달 간 여행을 가서 멘토 생활을 쉬기로 했을 때는 예솔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저는 멘토님 없으면 안 돼요' 했다. 그 당시 나는 내 인생도, 내 앞가림도 못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예솔의 시련과 불안을 뒤로 하고 미련 없이 비행기에 올랐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예솔은 열심히 블로그 콘텐츠를 만들었다.


그렇게 예솔을 키운 지 어언 6개월 쯤 되었을 때였나. 놀랍게도(?) 예솔의 눈에 보이는 성장은 미미했다. 속도도 여전히 느리고, 말도 느리고... 이제는 내가 예솔을 느리다고 꾸짖는 게 아니라 예솔이는 원래 느리지, 내가 너무 빠른 거지~ 하면서 무뎌져 버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어느날, 내가 회사에서 처음 제안서를 써야 했다. 신입 온보딩 교육을 받아야 해서 계속 자리를 비웠고, 야근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예솔에게 몇 가지 들어가야할 자료를 찾아만 달라고 요청해두고 자리를 떴다. 그러고 다시 제안서를 켰는데, 비워둔 사진이랑 멘트 몇 개가 다 정리되어 채워져 있는 게 아닌가. 심지어 내가 넣으려고 생각한 대로. 나는 고개를 돌려 예솔을 바라보았다.


"이거 너가 했어?"

"네. 그냥 넣으면 될 거 같아서 했어요."


우리 예솔이가 내가 말하지 않은 일을 주도적으로 해낸 첫, 역사적 사건이었다. 나는 감동 받아서 하루종일 예솔이 칭찬만 했다. 누군가에게는 정말 별거 아닌 일이겠지만, 콘텐츠 발행의 모든 절차에서 모든 사람의 눈치를 보던 친구에게는 정말 거국적인 성장이었다. 걸음마를 보는 부모의 마음이 이럴까? 속에서 후욱 뜨거운 김이 오르고, 눈물도 나고 그랬다. 우리 예솔이가 뭘 했는지 아세요? 온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다. 그러고 그 뒤로 예솔은 갑자기 이상하리만치 일을 잘하기 시작했다. 블로그도 1시간 만에 써내고, 뉴스레터 아이디어를 기깔나게 가져오기 시작했다. 예솔이 만든 콘텐츠를 보고 구매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와 만난지 6개월 정도 되었을, 작년 8월 쯤의 이야기다. 우리는 뛸 듯이 기뻤다. 그뒤로 그런 일들이 무수히 생겨났다.


지금은 어떨까? 예솔은 작년 12월, 아리씨 내부 공로상인 연간 MVP를 수상하고, 현재 아리씨의 자랑이자 개그맨, 미친 존재감의 콘텐츠 기획자이자 브랜드마케팅팀장이 되었다. '땡 잡았다'는 말을 쓰던 99년생 그녀는 성장해서 중장년 팀장급 공무원의 마음을 저격할 표현과 요즘 트렌드를 가미한 지자체 전문 콘텐츠를 만드는 독보적인 사람이 되었다. 충주에 김선태 주무관이 있다면, 아리씨에는 오예솔이 있는 셈이다.


'아이씨 아니고 아리씨입니다'(2024. 4.8 발행 아리랑레터)

- 아리씨 브랜드 알리기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을 당시에 이런 레터 제목을 보내서, 다른 컨설턴트가 모 지역에 전화했을 때 '아, 아이씨 아니고 아리씨죠?'라는 소리를 듣게 함.


'지자체도 소개팅을 한다고?' (2024. 4. 15 발행 아리랑레터)

- 대체 뭔 내용일지 감도 안 오는 제목과 실제로 들어가보면 그럴 듯하게 연결되는 내용이 너무 어이없을 정도로 충격.


뉴스레터를 줄기차게 보낸 예솔 덕분에 이제는 어디든 전화해도 '아, 그 이메일 맨날 보내는 곳 맞죠? 재밌게 잘 보고 있어요~' 라는 말을 들으며 호감을 사고 시작한다. 1인분이라도 하고 싶어요, 하던 그녀가 쓴 블로그 콘텐츠를 보고 기업에서 의뢰가 들어와 매출성과가 났다. 금요일에는 예솔이 우리 내부 강의 연사로 활약해 지금껏 자신의 역사를 발표하고 향후 마케팅 전략에 대한 교육도 했다. 느리고 굵직한 목소리로 앞에서 설명하니 공명이 생겨서 단어가 귀에 쏙쏙 박히고,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예솔이 자신의 역사를 말하면서 나에게 배운 내용이 드문드문 배어나오는데, 그게 전혀 내가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다. 나는 표현이나, 아이템 선정에 대한 피드백을 많이 줬던 것 같은데 예솔은 오히려 전략이나 계획에서 나를 닮은 구석이 생겼더라. 신기했다.


나는 그런 예솔을 보면서 누군가를 키우는 건 내 맘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걸 배웠다. 자식교육이든 부사수 교육이든 그리 명쾌하게 무엇으로 정의되었으면 오은영 교수나 많은 컨설턴트들이 일자리를 잃었겠지.(ㅋㅋ) 예솔은 언제나 내가 예상하지 않은 결과물을 만들고, 내가 예측할 수 없는 폭으로 성장했다. 내가 그걸 제한하고, 내 기준에 나은 방향을 제안한다고 해서 그게 절대 예솔에게 좋은 방식일 리는 없었을 테다. 웃기면 웃긴 대로, 느리면 느린 대로 즐기고 응원하다보면, 갑자기 놀라운 크기의 성장으로 다가오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구나 배울 수 있었다.


언젠가 예솔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된다면 나는 굉장히 논리적이고 분석적으로 쓸 수 있게 될 줄 알았다. 진정한 사수라면 다섯 번은 같은 텐션으로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뭐시기.. 이러면서. 하지만 쓰다보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내 방식이 통한 모든 이유는 예솔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내가 화를 내도, 질타해도, 내 스스로도 잘나지 않았다고 자책해도 언제나 나를 믿어주고 최고라고 말해준 예솔이었다. 자기는 아무것도 한 게 없이 내가 하는 말만 듣고 따라왔다고 말하지만, 누군가가 그렇게 내 말을 한결같이 믿어주고 이해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심지어 그게 첫 부사수일거라고는 생각해본 일이 없다. 내가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예솔아! 우리는 정말 운 좋은 사람들이야! 하면서 또 내일을 맞이하기로 한다.


예솔이네 집 근처에서 예솔이 아버지가 찍어주신 사진


이전 06화 나, 브랜드 사회복지사 북토크 후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