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꼴랑 써놓고 잠적해버린 손본입니다. 2월 제안과 3월 아카데미 준비로 바빴다. 글에 미련이 많이 없어졌다. 더 잘 써야지 하는 욕심이 없어졌다기보다는 어차피 쓰면 잘 쓰기 때문에 괜히 초조해 하지 않기로 했달까. 어느 경지에 도달한 마음으로 읽고 말하기, 디자인이나 시각화 쪽을 연마하는 데 시간을 더 보냈다.
지난 12월부터 아리씨에는 아카데미가 생겼다. 매주 화, 수, 목, 금 오전 9시부터 10시까지 모여 함께 공부하고 흩어진다. 생긴 지 얼마 안되어 현재 아카데미는 시스템이랄 것보다는 '원장 맘대로' 운영되는 곳이다. 원장이 누구냐고? 누구겠어요. 접니다.
내가 하고 싶다고 자원한 것은 아니고, 이사님이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신설 기구 알림'을 카톡으로 보내셨다. '아리씨의 인풋, 인사이트, 트렌드, 지자체 컨설팅 등을 전환/적용 만들기'라고 보내주셨더라(방금 한 번 더 확인해 봄). 처음에 이게 뭔 말이지? 하다가 나중에서야 이게 보통 회사에 있는 인재 성장팀, HR팀 같은 거구나했다. 근데 왜 내가 원장이지? 물음표는 많아졌지만 회사가 시킨 일에 질문이 많으면 고달프다. 일단 하고 안 되면 질문한다. 그렇게 시작된 아카데미 테스트 한 달, 두 달 동안 시즌 2까지 진행되었고, 이 글을 쓰는 지금 시즌 3를 앞두고 있다.
오늘은 내가 얼기설기 만들어놓은 시스템과 성공 사례를 얘기한다. 스타트업에서 어떻게 인재를 키울 것인가 하는 고민을 시작한 분들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힌트라도 될 수 있기를.
내가 여태 피고용인으로서 일하며 요청받은 성장은 무엇이었나. 회사의 사업이 있고, 그 사업에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요소를 더 잘하거나, 시간을 더 줄이는 데 있었다. 에디터로 성장하기 위해 제목 짓기부터 원고 완성까지 트렌디하고 퀄리티는 높지만 시간은 짧게 작성하는 훈련을 해왔다. 그걸 역량 강화라고 부르며 스스로 성장했다고 감각했다.
그렇게 이직한 아리씨는 정말 기이한 조직이었다. 20대 직원 하나가 상품 개발부터 기획, 영업, 행정처리까지 다 한다. 좋소라고 퉁치기에는 평균 연차라고는 2년차쯤 되는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이 8년차처럼 매출을 낸다. 그런데 문서 역량은 그에 비해 턱없이 모잘랐다. 제안서 내용도 깔끔하지 않고, 카피나 멘트들이 명확하게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도 매출이 난다고? 어떻게? 천재들의 허당 일상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 대표 주자가 사업본부 박미라 본부장이었다. 내가 입사했을 무렵부터 본부장 후보자였고, 얼마 전 3년차에 접어들었다. 다른 회사에서는 주임급 정도 되는 그녀가 어떻게 '본부장'이 될 수 있지? 라는 의문의 눈초리가 많았다. 우리가 아는 본부장이 딱 있지 않은가. 카리스마 있게 결재 서류를 뒤적이며 '이게 최선이에요?'라고 서류를 팍 날리는. 드라마와 섞이어 다소 과장된 부분은 있겠지만 딱 봐도 '일 잘해보인다', '깐깐해보인다'라는 이미지가 있을 것만 같은. 그 모든 게 본부장 아니던가.
이사님이 처음 평한 미라 본부장은 '무색무취'였다. 이것도 저것도 특출나게 잘 한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큰 그릇을 갖고 사람들을 대해서 자기가 다 품어내는 사람이라고. 아, 그런 사람인 건 오케이. 근데 그런 사람인 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고로 회사란 특출나게 자기의 색깔이 없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곳 아닌가? '없음'을 장점으로 내걸기에는 3년차는 꽤 경력이 쌓였고, 개성이 없다는 건 미디어 홍보 회사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처럼 느껴졌다. 나는 또 그걸 있는 그대로 이사님께 말했지만, 이사님은 그때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두고 보면 안다'는 뉘앙스로 설명해주셨던 기억이다.
미라 본부장에 대한 첫인상은 나와 친구였던 정수(5년차 아리씨 고인물)와 자주 어울리는 회사 동료였다. 친구도 정말 많고, 밖순이에다 낯을 많이 가리지 않고 흔쾌한 스타일이었다. 나와 달리 생각이 많지 않고 대체로 표현이 단순했다. 좋아요(정말 좋음), 모르겠어요(정말 모르겠음), 왜 그렇게 해야 돼요?(정말 이해 안 됨)으로 회사에서 모든 의사소통을 해결했다. 뭐든 설명이 많이 붙는 나로서는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싶을 정도였다.
작년 12월 아카데미 테스트 버전을 시작했을 때 다같이 태니지먼트를 해 봤다. 가장 먼저 결과물을 공유한 사람이 미라 본부장이었다. 그 뒤로 줄줄이 태니지먼트 결과가 나왔지만, 미라본부장만이 재능이 '단순화'가 나왔다. 결과에 한바탕 웃었다. 정말 미라 본부장다운 결과가 나왔다고.
반대로 나는 정~말 생각이 많아서 환경이 휙휙 바뀌는 아리씨가 너무 불안했다. 새로운 일들도 많이 주어지고, 고객사도 여럿이라 생각의 폭이 좁혀지기는커녕 늘 넓어지기만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주로 이사님을 찾았으나, 너무 사소한 일(제안서)이라고 생각이 들면 다른 동료를 붙잡고 자주 물어보곤 했다. 그러면 자연스레 불안한 상황에 대한 경우의 수는 많아졌다. A는 이게 별론 거 같아서 이걸 더 보완해야 할 것 같다는 부분을 B는 너무 좋으니 발전시켜보라는 식으로 변질되어 갔다. 내 원안은 점점 사라지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기획만 남게 되는 것이다. 좋은 기획이고 싶은 마음만 굴뚝 같아질 뿐이었다.
"미라 본부장님, 이거 맞는 거 같아요?"
"괜찮은데 왜요?"
나는 그 대답이 성의없게 느껴졌다. 내 기획에는 별로 입을 대기가 싫은 건가? 싶을 정도로. 그래서 집요하게 계속 물어보게 되었다.
"뭐가 좋은데요?"
"그냥 다 좋아요."
"고칠 건 없어요?"
"딱히?"
"이대로 했다가 잘못 되지는 않겠죠?"
"문제 없어 보이는데요?"
문제가 없기는 뭐가 없어, 되도 않은 오기를 부리고 발표에 가져가면 어김 없이 호평이 돌아오곤 했다. 나는 의아한 얼굴이어도 미라 본부장은 태연했다. 그때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여태 기획이 어그러질까 초조했던 내 세월이 다 수포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며 내가 너무 복잡한가? 저렇게 단순하게 살아야 스트레스를 안 받나? 어떻게 저렇게 늘 초연하지?
그래서 다음번에는 최대한 단순하게 일을 해보자 했지만 당연하게도 실패했다. 도저히 단순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늘 일을 쪼개고 벌리지 않고 넘어가는 게 더 스트레스 받았다. 단순해지려다가 더 복잡해지고, 섞이고 난리였다. 에라이, 그냥 하던 대로 해! 하고 복잡한 방법을 선택해 작업을 마쳤다. 그리고 또 업무상의 공유를 위해서 미라 본부장에게 보여주었다. "다 좋은데 이건 이해가 잘 안 되는 듯." 정말 나오지 않는 수정사항을 다 고치고 나니 결과물이 한결 마음에 들었다. 꽤나 크리티컬했던 부분을 고칠 수 있어서 불안도 줄었다.
그 뒤로 나는 내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했어도 미라 본부장을 찾게 됐다. 나만의 루틴이 생긴 것이다.
1. 발표 전이나 문서 마감 전에 꼭 미라 본부장에게 보여준다.
2. 딱 두 가지 종류의 대답이 돌아온다.
(1) "괜찮은데 왜요?" 또는 (2) "다 좋은데 여기가 이해가 안 돼요."
2-(1)의 경우 이 부분이 불안하거나 고치고 싶다는 등 의견을 표현했을 때 '굿'이라는 답변을 받으면 끝
2.(2)의 경우 그 부분을 이렇게 고치면 되겠다고 했을 때 '굿'이라는 답변을 받으면 끝.
3. 한결 후련한 마음으로 자료를 발표(소개)한다.
단순하다는 건 두려울 시간이 적다는 것이었다. 생각이 많아지면서 몰아치는 경우의 수는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어도 줄지 않는 생각에 고민만 하고 시도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았다. 미라 본부장은 그 사이에 그냥 한 번 해보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카데미를 진행하면서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인 것도 그녀였다. 많이 고민하지 않고, 아카데미의 교육 내용이 자기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바로 적용한다. 무색무취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낮은 단계에서 시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없는 공간에 넣을 일만 남았다는 의미였던 거다.
아카데미에서 <기획의 정석>이라는 책을 교재로 활용했을 때였다. 다들 책 읽기를 너무 싫어해서 어떻게 이걸 읽히나 고민하다가 랜덤으로 팀을 나눠 각각 주요 챕터 중 하나를 선정해주었다. 예정된 팀별 토론 시간까지 이 챕터를 가장 먼저 해야한다고 주장과 근거를 가져오라고 했다.
"기본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이 챕터를 먼저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맞다고 관철시키기 위해 수많은 주장과 근거가 오가는 사이에서 미라 본부장은 '기본기'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토론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머리에 남은 것은 미라 본부장이 내세운 키워드인 '기본기'뿐이었다. 나는 그때 단순함이 정말 탐나는 재능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2년차들 사이에서 느낀 8년차의 향기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경력이 쌓이고 한 분야의 역량이 강해지면 다른 역량은 상대화될 수밖에 없다. 내가 아리씨에 입사하며 지자체 컨설팅을 직접 나서지 않겠다고 선을 그은 이유도 거기에서 출발했다. 콘텐츠 역량은 날이 갈수록 커졌지만 영업을 통해 돈을 벌어 오는 능력은 점점 퇴화했다. 그러니 영업에 대한 두려움은 커져만 가고 실제로 일하는 시간보다 마음을 먹는 시간이 더 소요됐다. 하지만 아리씨의 리더들은 지자체 컨설턴트라는 틀 안에서 모두 고루 성장하고 있어서 6년차라 당연하게 해내는 일들을 못하기도 하고, 8년차에도 용을 써도 못할 일들을 척척 해내고 있었다.
결국 성장이란 무엇일까? 무엇 하나를 스페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어리석었다. 복잡해서 타이밍만 재는 나는 시기를 잘 맞추고, 많이 고쳐서 퀄리티로 승부하는 콘텐츠나 전략에 특화될 수 밖에 없다. 단순해서 바로 해버리는 미라 본부장은 불도저처럼 매출성과 목표 달성에 특화된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없는 부분을 채우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아리씨는 우리에게 본부장이라는 자리를 주어서 우리가 잘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회사다.
내가 원장으로 만들어가는 아카데미의 기조 또한 미라 본부장과 나의 관계에서 더 나아가 모두가 갖고 있는 다른 강점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자! 이다. 나는 내일도 미라 본부장의 단순함에 빚지고, 나의 문제해결력으로 빚 갚으며 아리씨의 목표를 채워나갈 것이다. 우리의 성장은 그렇게 계속되고 있다! 3월 매출성과 목표도 달성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