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기를 머금은 산속에서

상쾌한 풀내음(과는 무관한 이야기)

by 박냥이

역시 산은 생각 없이 올라야 하는데... 이미 썼던, 쓸 예정인 머릿속 활자들이 무겁다. 이 글은, 중간중간 쉬는 장소에서 조금씩 써내려 갈 예정이다. 사실 산에서만 볼 수 있는 경관들을 보고 걷기도 눈이 바쁘니, 한편으로는 등산할 때에는 무거운 스마트폰을 집에 두고 오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러지 못하는 것은, 잡다한 걱정과 등산하다 몸이 지치면 찾아오는 허전함 같은 것 때문일 수도 있겠다.

평일에는 사람들이 잘 없는 우리 집 뒷산인데, 공휴일인 오늘은 꽤나 많은 사람들을 마주친다.


나는 나이가 좀 든 아저씨들에 대해 불필요할 정도의 경계심이 있다. 산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마 어렸을 적, 주위의 무관심 속에서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를 가까운 어른들로부터 몇 차례 당하는 중 그 과정들에 혼자 맞서 싸우면서 생긴 감정일 수도 있다.

'야, 이 변태 새끼야!'라고 외치며 꽤나 가까운 어른에게 대들기도 했었는데(당연히 부모님은 아니다) 명절 때마다 얼굴을 보는 그들 중 내가 왜 그러는지 누구도 묻지 않았다. 어쩌면 '지 예뻐해 주려고 그러시는 건데 쟈는 와저라노'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 나중에야 듣게 되었는데, 남동생은 뒤에서 다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내성적인 동생도 마찬가지로 내성적인 누나의 그런 폭발하는 듯한 발악에는 딱히 어쩔 도리가 없었으리라. 여하튼 지금은 등산 중이니 이런 떠올리기 싫은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일단 더 올라가서 쓰려고 한다.


아마 그런 여파들로 여성스러운 옷에도 거부감이 생겼는지, 지금도 중성적인 검은색 옷을 선호하고, '마음이' 편한 옷만 입는 편이다. 그래도 내가 그 당시 마냥 당하고만 있지 않고 재빨리 거부하고 피하면서 내 몸을 보호할 수 있었던 데는, '불같은 내성질'도 크게 기여를 했다. 겉으로는 내성적이라도 내 안에 들어선 화(火)를 다독이며 홀로 삭이는 데는 미숙했기 때문에.

물론 지금도, 언제든 휘두를 수 있는 초록색의 등산스틱과, 아버지의 남색 등산 모자와, 진회색 바지, 검은색 상의, 회색 마스크 즉, 대부분 무채색으로 나를 보호하며 등산하는 중이다. 어머니는 '아무도 니한테 해코지 안 한다'라고 하시지만, 쓸데없고 과도한 걱정이 만든 방어막들이 오히려 내 마음을 편하게 한다.

상쾌한 풀내음처럼 마냥 상쾌한 글을 써보려 했더니 바로 엇나가고 말았다.(이후 소제목을 조금 수정했다)

새벽에 내린 비로 하늘은 아직까진 흐려도 산속에는 날이 맑을 때보다 더 향긋하게 풀내음이 도진다.

집에서 누워있기만 하면 못 느꼈을 기분.

다시 또 더 올라가서 이어서 써보려고 한다.

다음 정거장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이다.(아, 일단 누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서 먼저 가시면 가야지, 얼핏 보니 아줌마라서 한결 익숙하고 편하다_어머니의 무릎이 괜찮을 적마다 같이 오르곤 했어서 아줌마들에게 유독 유대감이 있는가)

드디어 내가 좋아하는 장소 도착. 사진은 이곳에서 올려다본 하늘인데 오랜만에 온터라 기념으로 남겨본다. 맑은 날 오전에 오면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데, 안과에서 진료 후에 적외선 쬐어 주는 것보다 훨씬 따듯한 햇살을 눈을 감으면 느낄 수 있다. 사진이 완벽하게 담지 못하지만, 자세히 보면 좌측 상단에 흐릿한 태양이 보인다.

이제 목표지점까지는 얼마 안 남았다. 이곳에서 좀 더 쉬다가 빠르면 그 지점에서 아니면 하산하고 나서 글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내리막 길을 갈 때는 넘어질 수 있으니 아무래도 더 집중해서 스피디하게 내려가야 하니 도중에 핸드폰을 보는 것은 무리다.

헉헉거리면서 온갖 앙탈을 부리며 엄마 뒤를 졸졸 따라 오르던 내가, 그래도 육지를 걷는 거북이 속도라도 이곳까지 오르내리는 것은 어쩌면 장족의 발전이다.

(평탄한 구간이 많아서 고도는 그리 높지 않다)


이제서야 마지막 지점 도착,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약수터인데 낯선 이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보통 여기서 돌아내려간다. 갈대인지 억새인지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지만 눈이 편한 연한 황갈색. 뜨개실을 고를 때 이런 색의 실을 찾아보려 한 적도 있으나 찾기가 쉽지 않더라.

이제 하산하는 일만 남았다. 역시 집에 가서 맞춤법 검사도 한 번하고 글을 마무리해야겠군.


브런치 작가가 된지는 얼마 안 됐지만, 잡다한 글을 많이 써오고 있는 데는 지금 백수라 시간이 많은 이유가 가장 크다. 다시 직장 다니면 하루에 하나 쓰기도 벅찰 거 같다.

가족들한테는 브런치에 글을 쓴다고만 하고, 부모님의 폰에 애써 어플을 설치해드리거나 글을 읽는 방법에 대해서까지 알려드리지 않은 것은, 부모님이나 지인에게는 알리고 싶은 이야기보다 숨기고 싶은 이야기가 더 많을 거 같아서다.

이번 글은 이 정도만 적고, 이제 진짜로 집으로 출발.

으휴, 산속이라 그런지 저장하는데 계속 에러가 발생하네.



추신: 산에 쓰레기 좀 작작 버립시데이.

그리고 먼지떨이 기계는 요긴하긴 하지만, 손으로 털면 안 되나? 흙의 세균? 음... 이미 산을 걸으면서 눈코입에도 다 묻어 있지 않나. 기계에서 나는 소음으로 산속의 기존 입주민들에게 피해가 갈 듯한 건... 괜한 걱정일까.

곳곳에 새로 생긴 기계가 마냥 반갑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