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포개항가도(정공단로, 매축지)를 걷다

동구 골목투어 2 (범일동, 좌천동)

by 정순동

웹툰 이바구길


증산공원을 내려간다. 이번엔 정문으로 나간다. 성북고개 쪽으로 가는 길은 만화 캐릭터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성북 웹툰 이바구길이다. 증산공원 입구부터 성북고개까지, 1960년에 생긴 성북 재래시장이 만화간판, 만화벽화로 꾸며져 있다.

가게의 셔터에도, 진열대에도, 창문에도, 이정표에도 만화 속으로 빠져든다. 성북시장 웹툰 이바구길은 2017년 산복도로 르네상스 프로젝트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다. 시장 사람의 캐리커처도 그려져 있다. 생동감이 넘치는 거리로 탈바꿈했다.

성북 웹툰 이바구길

성북시장을 둘러보고 부산포 개항가도를 걷기 위해 금성고등학교 쪽으로 돌아 나오는데, 특이한 집이 눈에 띈다. 가정집 대문과 벽면에 빈 캔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드나드는 출입구와 우편함, 도로명 주소 표지판만 남겨 놓고 온통 캔으로 뒤덮였다.


알 듯 말 듯한 재미있는 글도 내걸어 놓았다.


'오늘 가기 싫으면 내일 가고, 동쪽으로 가기 싫으면 서쪽으로 가면 그만인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온다.'

'개가 사나우면 사람 발길 끊겨 술집의 술이 쉰다'



정공단로와 일신여학교


다시 경사진 엘리베이터를 탄다. 도시재생사업을 하면서 설치된 경사진 엘리베이터는 '노인과 바다'만 남았다는 동구 산복도로 르네상스 시대의 편리한 고지대 이동수단이다.

안용복 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안용복과 개항을 연결시키는 것이 왠지 자연스럽지 않다. 그러나 금방 의문은 해소된다. 안용복의 생가터가 건너편 매축지에 있다. 부산포개항문화관에 어떤 콘텐츠가 있는지 보고 싶었는데 코로나로 휴관이다.

관직을 한 적이 없는 천민 신분의 안용복. 조선조 숙종 때 울릉도, 독도 영유권 문제를 일본과 확실하게 담판 을 짓는다. 민간 외교관과 같은 활약을 한 사람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일본과 독도 영유권 문제로 신경전이 벌어지자 안용복 장군으로 추앙되며 주목받고 있다. 수영사적공원에 안용복 장군의 사당이 세워져 있다.

부산포개항문화관

오른쪽으로 높은 축대 위에 금성고등학교가 있다. 1954년 경남 기독교 노회가 설립한 학교다. 중학교는 2020년 학생수 감소로 폐교되었다. 금성고등학교 축대에 동구 출신 독립운동가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서영해, 장건상, 박재혁, 최천택 ㆍㆍㆍㆍㆍㆍ

좌천동에서 태어난 장건상은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고 자주적 통일정부를 위해 일생을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운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역시 좌천동 출신인 최천택은 항일단체 구세단 조직, 의열단 활동, 언론운동 등으로 일제 강점기 50여 차례 구금, 구속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영해와 박재혁은 따로 소개할 기회가 있어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금성고등학교 축대에 동구 출신 독립운동가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내려다보니 정공단과 부산진교회 지붕이 보인다.

부산진교회는 1891년 내한한 호주 여선교사 멘지스에 의해 설립되었다. 일신여학교, 일신 기독병원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지역의 근대화에 기여한 장로교회다.

부산진교회 쪽으로 돌아 내려가면 버스정류소 밑 축대에 독립선언문 가벽이 있다. 맞은 편의 붉은 벽돌 건물은 호주의 장로교 선교회에서 세운 일신여학교다. ​일신여학교는 1895년 초가집 한 칸으로 시작한다. 지금의 벽돌 건물은 1905년에 세웠고, 2006년 6월 복원하였다.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비례와 균형미가 뛰어난 근대 건축물이다.

부산경남지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일신여학교. 3.1 독립만세의 깃발을 부산에서 처음으로 올렸던 독립운동의 산실이었으며,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919년 3월 11일 밤 9시 일제 압박에 저항하여 교사와 학생들은 전날 밤새 만든 태극기를 들고 기숙사를 뛰쳐나왔다.

일신여학교(위), 좌천동굴(아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좌천동을 누볐던 만세길을 따라가 보자. 지금의 정공단로다.

왕길지기념관. 부산진교회 초대 당회장, 부산진 일신여학교 교장 등을 지낸 호주 선교회의 왕길지 목사를 기리는 기념관이다. 부산진교회가 마련하였다.

좌천동굴. 만세길을 따라 좌천고가교 쪽으로 간다. 정공단로 끝 지점에 일제강점기에 개발된 방공호가 있다. 한국전쟁 때는 피란민들의 주거지로 사용되기도 하였던 동굴이다. 내 기억으로는 막걸리와 파전, 도토리 묵을 팔던 '동굴집'이란 술집이다.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냉온방이 필요치 않았다. 젓가락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러도 밖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훗날 정부 고위직을 지낸,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한 후배가 당시 학생회장에 출마했다. 동굴집에서 한턱낸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로는 예사로 하던 일이다. 접대받은 자나 접대한 자나 불량 학생을 넘어 부정선거운동을 한 것이다. 다음 날 난리가 난다. 학생부에 불려가서 혼줄이 났다.

좌천동의 일본식 집

좌천고가로를 지나면 고관로가 시작된다. 천동굴 위, 고관로 길가의 좌천동에는 아직도 일본식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봉생병원 근처에 미성극장이 있었다. 2본 동시 상영을 하던 3류 극장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1942년 대화관으로 출발하한 역사가 오래된 극장이었다. 해방 후 여섯 차례 이름을 바꾸며 자리를 지키다가 1976년 폐관되었다.


다시 정공단으로 돌아간다.

정공단은 임진왜란 첫 전투지이었던 부산진성에서 전사한 정발장군과 그와 함께 목숨을 바친 분들을 위해서 비석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사단법인 정공단 보존회에서 매년 음력 4월 14일(부산진성이 함락된 날)에 제향을 주관한다.

정공단

매견시 일가의 아름다운 이야기


정공단 바로 옆에 매견시 목사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매견시 목사는 스코틀랜드 태생의 호주 선교사다. 1910년 부산에 와서 29년간 선교활동을 하였다. 감만동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요양소 상애원을 설립하여 환자를 수용하고 치료한 '나환자의 친구'였다.

당시 한센병 환자는 사회적으로 냉대를 받았다. 매견시 목사는 이러한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 한센병 환자에게 사회적 역할을 부여한다. 앞서 지나온 금성고등학교의 높은 축대를 음성 환자가 쌓도록 하였다.

부인 켈리 여사는 한센병 환자의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미감아의 집'을 세웠다. 부산진 일신여학교 설립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각각 산부인과 의사와 간호사가 된 두 딸 헬렌 맥켄지와 케서린 맥켄지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호주에서 부산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일신부인병원을 세웠다. 그래서 일신기독병원은 일신산부인과로 더 알려져 있다.

매견시 목사 일가를 기리는 기념비와 안내판
매견시가 사람들의 활동 모습(왼쪽), 현재의 일신기독병원(오른쪽)

정오연 생가터. 정공단 맞은편 가게가 새 단장을 했다. 일제 말, 정오연은 부산공고 재학 중 순국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된다. 해방을 몇 달 앞두고 순국한 항일 독립유공자 '정오연 생가터'를 최근에 발굴하였다.

정오연 열사 생가터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지하철 좌천역으로 가는 좁은 길이 나온다. 골목 안에 대형 태극기가 휘날리는 것 같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부산진성 전투 장면을 그린 '부산진 순절도', 3.1 만세운동, 매견시 목사의 활동 등을 벽화와 사진으로 설명하는 항일역사 스토리 골목이다.

골목 끝이 도시철도 1호선 좌천역이다. 4번 출구로 나가 경부선 철로 위의 육교를 넘어 매축지로 간다. 매축지는 일제강점기 군수물자와 병력을 수송하기 위해, 일제가 북항과 함께 부산진 해안을 매립하면서 생겨난 마을이다. 북항도 남항도 새마당도 다 매립한 곳인데 유독 이곳만 매축지라 불린다. 철도 및 항만시설이 인접한 도심 속의 저소득층 밀집지역이다.

항일역사 스토리 골목


바다를 메까 땅을 맹글다


매축지. 도심지의 가운데 위치하면서 고립된 섬처럼 세월의 흐름이 멈춰 선 곳이다. 친구 성주, 진상이의 집이 여기에 있어 1970년대 말까지 자주 들렀던 곳이다. 현재 도심 재개발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오션 브리지, 두산위브 등의 아파트 단지가 이미 들어서 있고, 마을의 오른쪽 4개 블록은 또 다른 두산위브 아파트 공사를 하고 있다. 마을의 절반이 사라졌다. 아직 마을의 중심부는 그때의 마을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매축지는 부두에서 내리는 말이나 마부, 짐꾼들이 쉬는 곳이었다.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부터다. 귀국 동포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부두나 철도에서 일자리를 찾아 이곳에 눌러앉으면서 마을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으로 피란민이 몰려오자, 마구간을 칸칸이 잘라 생활공간을 마련하고 판잣집을 지어 지금의 매축지가 만들어졌다.

6,70년대 분위기를 느끼기에 충분한 매축지에도 이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골목 앞쪽에 고층 아파트가 보인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집과 집이 마주 보고 있다. 집집마다 장독, 가스통, 세탁기 등을 골목에 내놓았다. 빨랫줄과 전깃줄이 어지럽게 엉켜 있다. 이 낡고 오래된 공간은 일제강점기, 해방기, 한국전쟁기, 산업화 시대를 살아온 우리의 지난날을 정직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고유한 곳으로 남아 있다. 매축지는 영화감독이 주목하는 장소다. 마을 입구에 이 동네를 배경으로 촬영한 영화를 소개하는 안내판이 서 있다. <친구>, <하류인생>, <마더>, <아저씨> 등을 이곳에서 촬영하였다.​

매축지를 배경으로 촬영한 영화를 소개하는 안내판

통영칠기사 공장 바깥에 주민들이 사용하던 생활용품이 이제는 골동품이 되어 가득 전시되어 있다. 쓰다 버려진 물품을 통하여 탐방객은 과거로 즐거운 여행을 떠난다.

하나뿐이었던 목욕탕, 성남탕은 명절이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뒤에 최신탕이 생겨 경쟁체제인 때도 있었다. 마을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지만 아직도 6,70년대 분위기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본다. 이곳에도 이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골목 앞쪽에 고층 아파트가 보인다.

통영칠기사 전시장

경부선 철로 담장 옆길을 따라 부산진시장 쪽으로 간다. 1941년 10월부터 운영되었던 옛 문현선 철로가 1972년 12월 폐선된다. 부산광역시 동구청은 2017년 1월 폐선부지에 주민 통행을 위해 보도를 만들고, 터널의 빈 공간에 도시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매축지 역사갤러리를 조성했다. 인형극 <매축지 이야기> 등을 전시하고 있다.


매축지 마을은 1920년 이전에는 원래 바다였던 기라. 일제강점기 때 바다를 메까 가지고 땅으로 맹글었는데 그래서 여기를 매축지 마을이라 칸다.

우리 영감은 젊을 때 55 보급창에서 일을 했능기라. 미군들 보급 물자가 배로 들어오면 도라꾸에 싣는 일을 했다 아이가.

한국전쟁이 일어나가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야구야구 몰려오기 시작했능기라. 천막에 살던 사람들이 어디서 판자를 구해 와 가, 뚝딱뚝딱 집을 짓기 시작했다 아이가.

이영자 할머니, 인형극 <매축지 이야기>, 2014년
1952년 매축지 마을 모습 (출처: 동구청)

매축지 역사갤러리를 지나서 영가대 옛터를 만난다. 영가대는 조선 후기 통신사가 무사 항해를 기원하며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누각이다. 역대 대일 사신들의 해신당 역할을 하였다. 또 출발과 귀환의 상징적 지점이 되기도 했다.

영가대 선착장은 경부선 철도 공사 때 매축되었다. 원래의 영가대는 1917년 부산의 일본 거류민 단장을 지낸 오이게 타다스케가 매입하여 자신의 별장 능풍장으로 옮긴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2003년 자성대 남쪽에 영가대를 복원하였다.

1920년대 영가대 (출처: 동구청)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길 가운데 촛대 같은 예쁜 3층 건물이 골목을 구분하고 있다. '소소한 옷집 리틀 테라스'란다.

부산포 개항가도는 남문시장을 거쳐 성남초등학교로 향한다. 성남초등학교는 해방 직후 개교하여 오늘에 이른 오래된 학교다. 부산진성 지성(자성대)의 서문이 있었던 곳에 세워진 일본인 학교, 부산제8심상소학교가 전신이다.

성남초등학교 담장에 동래부사 접왜사도_부산진성, 영가대, 좌천동 일대, 범일역 등 과거 좌천동, 범일동의 풍경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속에 나의 흔적을 남겨가면서, 한국전쟁 피란시절 부산진시장 풍경이 담긴 사진을 옮겨 놓는다.


동구 골목투어 3 (범일동, 좌천동)에서 부산포개항가도 걷기를 이어간다.

성남초등학교(위), 담장에 전시된 과거 부산진시장 일대의 풍경 사진(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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