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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 수 없는 싸움도 싸우는 게 인간이란 거지"

올레19길(하), 북촌ㆍ동복 4.3 유적지 가는 길

by 정순동

너븐숭이 대학살 현장에 세워진 '4.3 희생자 북촌리 원혼 위령비' 앞에서 묵념을 하고 북촌마을 4.3길을 찾아간다.


일주동로의 대로변에서 양민 학살이 자행된다. 북촌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동쪽은 당팟, 서쪽은 너븐숭이에서 대참사가 일어난다.

'4.3 희생자 북촌리 원혼 위령비' 앞에서 묵념을 한다.


너븐숭이 학살터의 아기 돌무덤


동생들을 찾으려 헤매고 다녔어요.
나중에 저 소낭 밭에서 찾았어요. 시신을.

당시 다섯 살이던 동생은 총상은 없이 얼어 죽었고,
열 살 누이동생은 가시덤불 위에 넘어져 죽었고,
여덟 살이던 동생은 이마에 총을 맞았어요.

손에 고무신을 움켜쥐고 죽어 있었어요.
그래서 너븐숭이에 무덤이 있어요.

김석보(북천리 주민) 증언, 너븐숭이 4.3 기념관


너븐숭이 아기 돌무덤

북촌 대학살 때 희생된 어린아이들의 주검이 당시 임시 매장한 상태 그대로 돌더미 속에 묻혀 있다. 애기 돌무덤이 20여 기 모여 있는데 적어도 8기 이상은 북촌 대학살 때 희생된 어린아이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어린아이 돌무덤 앞에 서니 목이 멘다. 돌무덤 앞에 장난감과 과자가 놓여 있다. 4.3 기념관에서 겨우 참고 아랫배에 눌러두었던 불덩어리 같은 감정의 응어리가 목으로 차오른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한 줌 흙조차 허락하지 않은 처참하리만큼 애처로운 애기 돌무덤을 두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오열을 참는다. 용서를 빈다. 외면하고 살아온 것이 죄스러워 용서를 빌고 또 빈다.


ㆍ ㆍㆍㆍㆍㆍ
아직 눈도 떠보지 못한 아기들일까
제대로 묻어주지도 못한
어머니의 한도 함께 묻힌 애기 돌무덤
사람이 죽으면 흙 속에 묻히는 줄만 알았던 우리 눈에는
너무 낯선 돌무덤 앞에
목이 메인다
목이 메인다 ㆍㆍㆍㆍㆍㆍㆍ

<애기 돌무덤 앞에서> 양영길



'순이삼촌'은 4.3 진상 규명의 기폭제가 된다.


소나무 아래 옴팍하게 내려앉은 숲 속으로 들어간다. 4·3 사건 당시 군 최대 규모의 학살이 자행되었던 너븐숭이 학살터에 ‘순이삼촌’ 문학비가 있다. 땅바닥에 빗돌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엎어진 빗돌에 쓰여있는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속 깊은 곳에 들어와 새겨진다.

너븐숭이 학살터에 ‘순이삼촌’ 문학비가 있다.

현기영은 소설 '순이삼촌'을 통해 4.3의 참혹상과 그 후유증을 고발하고, 사건의 진실을 문학을 통해 공론화시켰다. 정부는 2008년에 옴팡밭 부지를 매입하여 '순이삼촌 문학비'를 세웠다. 붉은 피로 상징되는 송이 위에 눕혀져 있는 비석들은 당시 쓰러져간 희생자들의 모습이다. / 제주특별자치도 2012

1978년 소설가 현기영 선생은 더 이상의 침묵을 거부하고 중편소설 '순이삼촌'을 발표한다. 이는 우리나라 현대사와 문학사에 엄청난 파장을 일어 킨다. 이 소설로 현기영 선생은 유신독재 정권의 정보기관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받는다. 군사정권의 의도와는 다르게 '순이삼촌'은 4.3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어 진상 규명의 기폭제가 된다.

ㆍㆍㆍㆍㆍ오백 위도 넘는 귀신들이 밥 먹으려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ㆍㆍㆍㆍㆍ우리는 한밤중의 그 지긋지긋한 곡소리가 딱 질색이었다. 자정 넘어 제사 시간을 기다리며 듣던 소각 당시의 그 비참한 이야기도 싫었다. 하도 들어서ㆍㆍㆍㆍㆍㆍ

<순이삼촌> 현기영


북촌 대학살 현장의 한 곳인 옴팡밭에 북촌 리민들이 '상생, 평화, 번영의 탑'을 쌓아 놓았다. 4.3의 비운이 다시는 이 땅 위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며 이 방사탑을 세운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옴팡밭에 세운 방사탑


4.3 최대의 학살 현장, 북촌초등학교


4.3 최대의 학살 현장인 북촌초등학교를 찾아간다. 배움터 지킴이께서 친절하게 안내해 준다. 1918년 설립된 창흥사숙으로 설립되어 조천 동 공립학교로 운영되던 중 4.3 사건으로 폐교된다. 주민 학살의 참혹한 역사 현장은 그 후 북촌초등학교로 이어져 온다.


1949년 1월 17일 오전 11시 무장군인이 북촌마을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마을을 불태운다. 공포에 떨고 있는 주민들을 몇십 명씩 끌고 나가 사살한다.

주민 학살의 참혹한 역사 현장, 북촌초등학교
군인들이 맨 처음에 민보단원들을 호명하여 학교 서쪽에 있는 너븐숭이 소나무밭으로 가서 학살했습니다.
두 번째 희생자도 너븐숭이 소나무밭 바로 건너에서 학살했습니다.
그다음부터는 그냥 무작위로 한꺼번에 수십 명씩 끌려갔는데, 그때가 제일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습니다.

조희권(북촌리 주민) 증언, 너븐숭이 4.3 기념관


너븐숭이에 가까운 학교의 서쪽 출입구에 '제주 4.3 북촌주민참사의현장' 표식비가 서 있다.

'제주 4.3 북촌주민참사의현장' 표식비가 서 있다.


당팟 학살 현장에 총탄 흔적이 남은 비석들


일주동로 북촌리 버스정류소 인근, 북촌 교차로 정자나무 옆에 총탄 자국들이 선명히 남아 있는 제주목사 선정비가 양민 학살을 증언하고 있다. 이곳은 정지퐁낭과 연못이 있었던 곳이다. 수령 약 800년 된 팽나무는 1958년 9월 태풍 ‘사라’호 때 쓰러지고 다시 심었은 것이다.

당팟 학살 현장에 총탄 흔적이 남은 비석들

비석 뒤의 채소밭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면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세 그루의 팽나무가 서 있다. 마을 사람들의 쉼터이자 당목으로 신성시되던 팽나무 아래 당팟은 1949. 1. 17 북촌리 주민 100여 명이 처참하게 학살된 현장이다.

마을 사람들의 쉼터이자 당목으로 신성시되던 팽나무 아래 당팟은 북촌리 주민 100여 명이 처참하게 학살된 현장이다.


현대사의 격랑에 휩쓸렸던 북촌포구


다시 너븐숭이로 돌아와서 올레 리본을 따라 해안으로 내려간다.


검섯개. 보리가 익어가는 밭길을 지나면 검섯개에 닿는다. 일제 동굴진지 구축 시 일본군 대장이 먹은 물이라 하여 장군물이라고도 불리던 곳이다. 예전에 용천수의 양이 많을 땐 식수로, 빨래터로 이용된 곳이다.

검섯개

북촌환해장성. 바다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고려 때부터 조선까지 계속 쌓은 북촌환해장성이 해안을 둘러싸고 있다. 북촌환해장성은 이곳과 동쪽으로 500m 지점에 일부가 남아 있다. 동쪽 환해장성은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49-5호로 지정되어 있다.

북촌환해장성

다려도. 서우봉을 내려오며 바라보던 다려도가 가까이 보인다. 3~4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일몰이 아름다운 무인도다. 4.3 당시 토벌대를 피해 숨기도 했던 곳으로 해안에서 400여 m 떨어져 있다. 해산물이 풍부하고 어종이 다양하다.

다려도

가릿당과 등명대. 가릿당은 북촌마을의 본향당이다. 기와집으로 조성된 제장의 당신은 ‘구짓머루 노름한집’이고, 밖의 자연석으로 조성된 제장의 당신은 ‘구짓머루 용녀부인’이다. 북촌마을 사람들의 삶과 죽음, 호적과 질병, 육아, 해녀, 어선 등을 관장하는 신들이다.

북촌마을의 본향단인 가릿당
북촌 등명대

가릿당, 등명대를 거쳐 북촌포구를 지나간다. 점심을 먹을까 하고 주변을 둘려보지만 영업하는 식당이 없다.


북촌포구. 1948. 6. 16 풍랑 때문에 북촌포구로 피항하던 배에 탄 우도 지서장이 포구에 들어서면서 고기떼를 향해 총을 쏜다. 이 총소리를 듣고 접근한 무장대의 공격을 받아 경찰 2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장소다. 현대사의 격랑에 휩쓸렸던 북촌포구 광장에 주홍색 그물을 펼쳐서 말리고 있다.

현대사의 격랑에 휩쓸렸던 북촌포구


조천에서 구좌로 넘어간다.


제주도는 제주시와 서귀포시로 나누어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섬 동쪽은 좌면, 서쪽은 우면이라 했다. 1895년 좌면이 신좌면과 구좌면으로, 1935년 신좌면은 조천면으로 바뀌었다가 조천읍이 된다. 구좌면은 그대로 구좌읍이 된다.


올레19길은 난시빌레를 지나 구좌읍 동복리로 들어선다. 동복리는 조천면의 마지막 마을인 북촌리에 접한 구좌면의 첫 마을이다. 동복리도 북촌리와 함께 4.3 당시 토벌대의 집단학살로 피해를 입은 마을이다.


동복리 '굴왓'

4·3 당시 이 마을 주민 86명이 군인 토벌대들에게 집단으로 학살된 곳이다. 1949년 1월 17일 오후 4시쯤 북촌 학살을 끝내고 돌아가던 악명 높은 서청 특별중대(제2연대 2대대 11중대)는 마을 주민 전체를 장복밭에 집합시키고, 모든 집을 불태운다. '굴왓'에서 집단 학살한다. 심지어 대검으로 확인사살까지 한다.


같은 날, 같은 부대가 저지른 끔찍한 집단학살임에도 동복리의 굴왓 학살사건은 북촌리 학살사건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올레길도 굴왓이나 장복밭과는 떨어진 곳으로 지나간다.

동복리 4.3 희생자 추모기념비

제주 4·3으로 희생된 동복리 주민은 1백40여 명에 이른다. 학살터였던 '굴왓'은 밭이 되었고, 집결지였던 '장복밭'에 서 있는 팽나무는 동복리 마을의 비극을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다. 제주시 구좌읍 동복리 937에 '4.3희생자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우리는 난시빌레에서 1.8km 정도 떨어져 있는 위령탑을 다녀온다.

동복리 4.3희생자위령탑

동복새생명교회를 지난다. 숲 속으로 들어선다. 1949년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길섶에는 예쁜 들꽃들이 모여 꽃을 피우고 있다.

양장구채(위), 잔개자리(아래)

생각지 못 한 곳에 운동장이 있다. 제주올레19코스 중간 기착지인 동복리 마을 운동장은 천연잔디 축구장이다. 관리는 잘되지 않는 것 같다. 반은 잔디고 반은 토끼풀이다.

동복리 마을 운동장

숲 속의 독서

숲 속을 걸으며 간간이 박노해의 '걷는 독서'를 만난다. 삶의 길잡이로는 긴 글이 필요 없다. 한 줄이면 충분하다.


"서둘지 마라. 그러나 쉬지도 마라. 위대한 것은 다 자신만의 때가 있으니"
"여행은 편견과의 대결이다."

<걷는 독서> 박노해
벌러진동산의 '숲속의 독서'

올레는 숲 속의 아름다운 옛길로 이어진다. 낙엽이 깔린 푹신한 길과 울퉁불퉁한 돌길이 번갈아 나타난다. 두 마을로 갈라지는 곳, 혹은 넓은 바위가 번개에 맞아 벌어진 곳이라고 하여 '벌러진동산'이라 재미있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나무가 우거지고,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넓은 공터가 있다.


숲길에 무언가가 휙 하고 지나간다. 산짐승인가 놀란다. 다시 또 지나간다. 풍력발전기 날개의 그림자가 숲 사이로 지나간다. 멀리서 볼 때는 천천히 돌아가는 것 같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도는 속도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다. 육중한 굉음을 내면서 돌아간다.

풍력발전기의 날개가 굉음을 내면서 돌아간다.

곶자왈을 빠져나와 넓은 보리밭을 바라보며 현기영 작가의 말을 곱씹는다.


"한 공동체가 멜싸지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 말이야. (중략) 누이가 능욕당하고, 재산이 약탈당하고,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친구가 고문당하고, 씨 멸족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항쟁이란 당연한 거야. 이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서 항복하고 굴복해야 하나? 이길 수 없는 싸움도 싸우는 게 인간이란 거지. " / 현기영, <제주작가> 22호

넓은 보리밭을 바라보며 현기영 작가의 말을 곱씹는다.

김녕 농로를 지나 백련사로 간다.

올레 19코스 종점인 김녕 서포구를 460m 남겨놓고, 남흘동 버스 정류장에서 오늘의 일정을 마친다. 올레 20코스를 여기서 시작할 것이다. 201번 버스를 타고 조천 만세동산으로 돌아간다. (2022. 5. 9)




운동 시간 4시간 45분(총 시간 6시간 17분)

걸은 거리 20km (공식 거리 : 19.4km)

걸음 수 32,497보

소모 열량 1,902kcal

평균 속도 4.2k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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