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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림진 Mar 19. 2024

수레바퀴 아래서 - 공부하는 학생

헤르만 헤세

p.13 예쁘장하고 부드러운 소년의 얼굴에서
움푹 들어간 눈이 불안하면서도 은은하게 빛을 발했고,
아름다운 이마에는 총명함을
드러내는 가느다란 주름살이 잡혔으며
그러잖아도 가냘프고
여윈 팔과 손은
우아하게 축 처져 있어서
보티첼리를 연상시켰다.


이 구문 때문에 좋아하는 박희정 만화가님이 이 책의 삽화를 맡은 것인가?!

눈이 반짝이고, 아름다운 이마에 총명함이라니!

거기에 가냘프고 여윈 팔과 손이라니!


p.23 한스는 작은 방으로 들어와 불을 켜지 않은 채
한참 동안이나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이 작은 방은 시험을 준비하면서
그가 누린 유일한 축복이었다.
이 방에서 저녁마다
피로와 졸음과 두통과 싸워가며
시저, 크세노폰, 문법책과 사전 그리고 수학 문제와 씨름했다.
끈질기고 완고하고 야심 차게 공부에 매달리면서도
때로는 절망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하지만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즐거움보다
더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뿌듯함과 도취와 승리감으로 가득했던
신기하고 꿈만 같은 시간들이었다.
학교와 시험 등 모든 것을 뛰어넘어
고귀한 존재가 되기를 꿈꾸며 동경했다.

이렇게 집중하고 고통을 이겨내고서 뿌듯함과 도취와 승리감으로 가득했던 적이 있었을까?

나에게 내게 그런 반짝이던 날들이 있었나?

우리 아이들이 이런 것들을 경험해 볼 수 있을까?

이런 반복적인 성공의 경험을 느낄 수 있을까?

공부가 즐겁고 도취될 수 있을까?

집중할 수 있는 엉덩이 힘과 (두통과 맞서 싸우는) 두뇌의 힘이 있을까?

있었다면 좋겠다.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다른 사람과 다른, AI와는 다른 우월한 존재라는 게 아닐까 싶다.

견디고 꾸준하다는 것이 한 존재가 다르다는 거 아닐까 싶다.

아닌가, 매크로인가.


p.26~27 오후에 그리스어 불변화사를
다시 한번 공부해 보려고 했는데
숙모가 산책을 하러 나가자고 했다.
그 순간 한스의 마음속에는
푸르른 잔디밭과 숲의 소리가
떠올라 흔쾌히 따라나서기로 했다.
~ (중략)
그런데 이미 내려가는 계단에서
고통이 시작되었다.
(중략)
수다는 무려 15분 이상 계속되었다.
한스는 계단 옆 난간에 기대어 계속 서 있었고
그 부인의 개가 한스의 냄새를 맡고 짖어 대기도 했다.
(중략)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내 동생이 3살도 안된 시점부터 맞벌이를 할 때 매일밤 엄마를 기다리던 어린 시절.

유치원에서 선생님과 함께 수업준비를 만들면서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시절.

친정엄마와 결혼 폐백을 함께 보려고 종로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몇 시간이나 훌쩍 넘어오신 기억.

약국에서 엄마를 기다리던 시간.

어른이 아이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당연한 것쯤으로 치부되는,...

이제 엄마는 나를 이렇게까지 기다리게 하지도 않고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나는 내 아이들에게도 기다리게 하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3시 50분 하원시간을 맞추는 연습을 해왔다. 3시 55분만 돼도 두어 명 정도밖에 남지 않던 그 기다리는 시간이 아이에게 얼마나 길지 알기에. (지금은 1시 50분...)


자랑이나 험담, 불만을 공유하고 공감받을 때 나의 기분은 좋아질 정 우리 아이와 남편의 기다림은 고되고 힘들 것이다.


깨닫게 되었다. 군중 속에 외로움은 모두가 타인이고 나와 대화할 상대가 마음을 나눌 상대가 없어서겠다.


전업주부로 아이들과 약속을 지키고 할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은 것 같다. 이것이야말로 내 결핍을 아이들이 느끼지 않고 컸으면 하는 것 같다. 아이들을 존중하는 엄마, 부모의 선택이나 강요 혹은 어른에 시간에 희생되지 않는 아이들로 컸으면 싶은 거다.


p. 66~73 "(목사님이 한스에게 입학 전 그리스어를 조금 배워보라고 하는 장면) 하루에 한 시간, 길어야 두 시간 정도 공부를 하면 돼. 그 이상은 할 필요 없어. 너는 지금 무엇보다 충분한 휴식을 누려야 하니까. 물론 이건 내 제안일 뿐이다. 너의 즐거운 방학 기분을 망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중략)
목사와 한스는 문장을 몇 개만 읽고 그 문장들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꼼꼼하게 번역했다. 그런 다음에 목사는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어가며 라틴어 특유의 정신을 매끄럽게 설명했고 누가복음이 지어진 시대와 배경에 대해 들려주었다. (중략) 한스는 마치 자신이 이번 수업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의 집단에 받아들여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즐겁게 공부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지?

아주 강제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한스의 기질이 좋은 것인가.

책상에 앉아 공부던 사색이던 무언가를 할 시절에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드라마 소리와 언성 높은 부부싸움 소리 그런 것들이 내게 스트레스였던 시절이 있었는데... 나는 정말... 조용한 거실이 갖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 집 거실에 티브이가 퇴출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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