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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세인 Mar 05. 2024

반항과 전락

아홉 번째 반항_알베르 카뮈 <전락>을 읽고

카뮈의 창작 과정, 즉 작품 주제는

크게 부조리-반항-사랑으로 나눌 수 있다.

세 장편소설 <이방인>, <페스트>, <전락> 중에서 이방인과 페스트는 이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전락>은 다르다.

충실히, 이 주제를 따라 글을 쓰던 카뮈에게 특이점 같은 책이다.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책


알베르 카뮈


전락은 반항에서 사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의 카뮈를 담고 있다.

고통스러운 과도적 시기에 카뮈의 "쓰디쓴 열매"와도 같은 작품 (로제 그르니에)


이방인은 정신 나갈 정도로 쨍한 햇빛,

페스트는 죽음 앞에서 물러나지 않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면

전락은 뿌연 안개로 가려져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암스트레담 항구 같은 글이다.

   

뭐랄까..

딱 인생의 권태기, 인생무상을 느꼈을 때 쓴 글 같다.

아니나 다를까 이 글을 쓸 때가 카뮈 생애 중 가장 극단적인 고통의 시기였다고 한다.

폐결핵 재발, 알제리(카뮈 고향) 전쟁 시작, 아내의 우울증, 동료들로부터의 외면 등등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최악의 상황 속에 있었다.


어느 누구라도 반항할 힘, 사랑할 힘을 잃었을 상황 속에서 카뮈 또한 계속해서 추락하는 전락의 주인공 '클라망스'처럼 절망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카뮈는 그런 고통을 이 작품을 쓰며 해소하려 하지 않았을까.



전락은..

정상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던 주인공 클라망스가 파리에서 젊은 여자의 익사사건을 겪고 추락, 전락하게 되는 이야기


전락은 추락의 이미지를 클라망스의 입을 빌려 떨어지는 물의 이미지로 표현한다.

암스트레담의 바다, 운하, 안개는 물의 지옥과 같고

내리는 비와 젊은 여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강물은 끊임없는 추락이다.


물로 표현한 추락의 이미지는 바로 인생의 본질이다.

누군가는 패배주의적, 허무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람은 죽어가는(추락하는) 존재다.

물이 본질적으로 중력의 힘에 못 이겨 추락할 수밖에 없듯이, 강물을 절대 거슬러갈 수 없듯이 생명 또한 그러하다. 절대 거슬러 갈 수 없는 시간의 힘에 못 이겨 끝없이 죽음으로 흘러갈 뿐이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알베르 카뮈, <반항하는 인간>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 반항하며 살아간다.

아침엔 다가올 밤을 위해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밤엔 내일 아침을 위해 일찍 잠에 든다.

미래를 계획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한다.

우리가 '살아간다'라고 말하는 모든 행동이 바로 물의 힘을 거슬러 헤엄치는 반항이다.

작품 속 젊은 여자가 죽기 전 내질렀던 비명처럼 죽음을 거스르려는 인간의 의지다.


물을 대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떨어지는 물의 힘을 거슬러 헤엄치는 반항의 방법이요, 다른 하나는 떨어지는 물을 따라 함께 추락하는 방법이다.
김화영

페스트라는 거대한 죽음의 소용돌이 속에서 묵묵히 죽음을 거부하는 의사 리유와 사형을 앞두고 죽음에 반항하는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전자의 방법을 택한 대표적인 카뮈의 반항하는 자아이다.


하지만, 전락의 주인공 클라망스는 후자를 택한다.

남에게 심판받는 걸 견디지 못해 자신을 비판하고, 끊임없이 남들보다 우위에 있으려 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전락해 버린다. 뿌연 안개, 떨어지는 빗방울, 흘러가는 강물과 함께 추락한다.


사실 추락하는 것(죽음, 방황)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헤엄치는 것(살아감)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클라망스는 그릇된 선택이 아닌 자연스러운 선택을 한 게 아닐까?


그렇기에 클라망스는 지극히 허무주의적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지극히 인간적인 인물이다.

항상 작품 속에서 반항하는 자아를 만들어냈던 카뮈가 이 작품에서만 이런 인물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또 의미가 있다.


평생을 반항하며 살아왔던 카뮈이기에 이 이야기는 그저 ‘아무렇게나 살자’로 귀결되지 않는다.

죽음과 진실의 고통, 좌절과 추락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면 진정한 반항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인 추락을 알아야만 우리 삶 또한 완성될 수 있다.


전락이 있어야 반항도 있을 수 있다.

반항하는 삶에서 전락하는 인물을 그려낸 카뮈처럼.


그래서 난 페스트도 이방인도 아닌 전락을 읽었을 때,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전락의 운명을 목도했을 때 비로소 반항의 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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