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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경 May 12. 2024

의식 흐름

1. 눈뜨자마자 하루가 길었다. 영화나 보려고 CGV어플을 켜보니 상영 작품이 많지 않았다. 10분마다 자리 잡범죄도시 4 때문이다. 사전정보 없이 <남은 인생 10년>을 예매했다. 일본 영화였다.


2. 예측가능한 스토리였고 역시 그랬다. 주인공 마츠리는 희귀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고, 중학교 동창회에서 재회한 '가즈토'는 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서 베란다에서 뛰어내린다. 조금 다쳤을 뿐 생명엔 지장이 없었다. 중학교 동창들은 타임캡슐을 열었다.


3. 1998년 봄방학 직전 담임 선생님께서 10년 뒤인 2008년 어린이날? 에 모교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정하셨던 게 떠올랐다. 선생님께서 모든 아이들 집 전화번호를 적은 종이도 한 장씩 나눠주셨다. 나는 동창회에 나가진 않았다. 선약이 있었나? 왜 나가지 않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4. 생의 의미개인적인 영역이다. 인간은 사물과 달리 존재 목적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의미 같은 것은 없어도 상관없다. 대신 있으면 삶의 동력이 다. 삶의 의미를 가진 사람은 어떤 일이라도 이겨낼 수 있다는 말도 있으니.


5. 최근 읽은 장강명의 장편소설 『표백』이 생각났다. 표백은 1978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뤄야 할 역사적 사명이나 투쟁해서 실현할 이데올로기도 없는, 더 이상 나아갈 필요가 없는 사회를 뜻한다.

표백 세대는 정신적인 면에서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보다도 더 한심한 처지에 있다.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사회라는 ‘다음 단계’를 꿈꾸며, 프롤레타리아운동의 주체로서 뚜렷한 이념과 이상을 갖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표백 세대는 지배 이념에 맞서 그들을 묶어주거나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이념이 없으며, 그렇기에 원자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낙원’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이상향은 있을 수 없기에, 표백 세대는 혁명과 변혁에 관한 한 아무런 희망을 품을 수 없다. 이들은 사회를 비난할 권리조차 박탈당한다.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의 실패는 그들 개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귀결된다.

- 『표백』중 에서-

등장인물 '세연'은 시장가치로만 평가되는 표백세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세속적인 부나 지위 획득 정도라고 말한다. '세연'은 위대한 목표가 사라진 시대에 저항하기 위하여 표백세대에게 집단 자살을 종용한다. 하지만 주인공 '나'와 '휘영'을 통해서 장강명은 반론을 제기한다. 이념 투쟁이나 민주화 역시 위대한 특정 개인만의 공적이 아니며 민중이 함께 한 결과고, 민중 한 명 한 명은 일상에 충실하며 하루하루를 살았을 뿐이라고. 그리고 굳이 개인 모두가 위대한 목표를 추구할 필요는 없다고. 공감한다. 각자 소신에 따신념을 지키며 살 뿐이다. 삶의 대부분은 일상이고.


6. <남은 인생 10년>의 서사는 뻔했지만 영상이 이뻤다. 장면 하나하나에 애정을 담았다. 벚꽃, 바다, 단풍, 눈 그리고 비까지 모두 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화 같았다. 배우들 연기도 나쁘지 않았다. 시한부 주인공은 자전적 소설을 통해 관객에게 인생이 10년 남았다면 뭘 하겠냐고 물었다. 바다가 가까운 곳에서 자유롭게 책 읽고, 시대를 담아 글 쓰지 않을까.


7. 내 삶을 관조할수록 영화와 드라마에 감정 이입이 힘들다. 주인공과 같은 시점에서 상황을 바라보아야 공감을 통한 몰입이 쉬운데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관조하작품 밖으로 튕겨져 나온다. 영화관 여기저기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몰입하지 못했고 그저 그렇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소설은 몰입할 수 있어 다행이다.


8. 2008년 동창회는 열렸을까. 선생님만 우리를 기다리신 건 아니었을지 늦은 걱정이 된다.


* 사진: Unsplash의 jurien hugg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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