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는 모범생이었다.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공부도 잘했다. 하지만 B는 하루의 대부분을 지루하게 느꼈다. 매일 공부만 하는 것도 지겨워서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중요한 시험에서 삐끗했다. 덕분에 주변의 기대와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 무엇을 할지 고민하며 다른 재미를 찾았다. 게임도 해보고, 책도 읽었다. 친구들과 놀고, 가족들이랑 여행도 갔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미술이었다. 정말 우연히, 가족들과 간 아트뮤지엄에서 그림에 대한 흥미를 느꼈다. B는 집에 돌아와 여러 미술 작품을 찾아봤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밤을 새 버렸다. 다음날 B는 하루 종일 피곤했지만, 동시에 주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B는 미대에 갔다. 딱히 재능은 없었지만 그저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지방의 대학교로 갔다. B가 갈 수 있는 미대 중 가장 높은 곳이었다. 그래도 그리 불만은 없었다. 인터넷에서 누군가 지잡대라고 놀려도, B는 그림을 그릴 때면 그런 사소한 것을 떠올릴 틈이 없었다.
B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바로 의자에 앉았다. 연필을 들고 원하는 모양으로 다듬었다. 조용한 방 안에서 연필이 깎이는 사각거림만이 들렸다. B는 종이에 떠오르는 것을 그렸다. 어느새 그림 하나를 완성했다. 그릴 때는 몰랐는데 다 그리고 나니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B는 그림을 그린 종이를 구겨버렸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종이를 꺼내 다시 그림을 그렸다. 그걸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러다 꽤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렸다. 그제야 B는 의자에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아침부터 그리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어있었다.
B는 알바시간에 맞춰 점심을 먹으려고 냉장고를 열었다. 어제 사놓은 삼각김밥 하나가 보였다. 청양참치마요맛. 물을 끓여 컵라면과 함께 먹었다. 조금 부족했지만 나름 맛있게 먹었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데 양말에 구멍이 나있었다. 아주 작은, 하지만 곧 커질 구멍이었다. B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신발을 신고 집을 나왔다. B는 동네 편의점에서 일했다. 계산을 하고 물건을 채워 넣는 일을 매일 반복했다. 그리고 시간 날 때면 틈틈이 초안을 그렸다. 할 일만 잘하면 게임을 하든 만화를 보든 상관없다는 사장님의 말을 잘 따르고 있었다. 그래서 B는 손님이 없을 때면 신나게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사장님에게는 슬픈 일이라는 생각에 그림을 그리다가도 편의점 천장에 달려있는 CCTV를 힐끔 쳐다보곤 했다.
저 CCTV는 최근에 B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설치한 것이었다. 아주 평화로운 낮 시간에 어느 노인이 자신의 손보다 큰 돌을 들고 와서는 담배를 공짜로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B는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자 그 노인은 B의 그림을 보며 그런 그림이나 그리니 그 나이 먹고 편의점 알바나 하고 있는 거라고 비난했다. B는 그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노인이 안쓰러웠다. B가 반응이 없자 노인은 편의점 한쪽 구석으로 자신이 들고 있던 돌을 던졌다. 돌은 위스키 진열장으로 향했다. 와장창. 유리가 깨지고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술냄새가 편의점을 가득 채웠다. 노인이 경찰과 함께 편의점을 떠나고 B는 혼자 청소를 시작했다. 여러 위스키 병이 깨져서 조각이 난 상태로 뒤섞여 있었다. 그중에는 최근 술자리에서 친구 A가 보여준 술도 있었다. A가 마신 술은 이런 냄새였을까. 대체 무슨 맛이길래 그렇게 자랑스럽게 보여주었을까. B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사실 관심도 없었다.
알바가 끝나니 저녁시간이 되어 있었다. B는 몸이 녹초가 되어 빨리 씻고 눕고 싶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몸살이 난 듯 온몸이 쑤시고 열도 조금 났다. 무언가 먹을 기운이 나지 않아 끙끙거리며 침대에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그러다 저번주에 다 못 봤던 미술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그거라도 틀어놓고 보다가 자버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2시간이 흘렀다. B는 자지 못했다. 오히려 더 활기를 찾았다. 냉장고에 남은 피자가 보였다. 얼마 전 폐기로 가져온 냉동피자의 일부였다. 냉동피자의 일부를 다시 데워먹고 감기약을 먹었다. 그리고 B는 다시 의자에 앉아 잠시 그림을 그렸다. 이번에는 거의 낙서에 가까운 그림이었지만, 마음에 들어서 구겨버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시 종이를 꺼내 그림을 그렸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어제의 몸살은 완전히 나은 듯 몸이 가벼웠다. 오늘은 알바를 가지 않아도 되었다. 편의점 리모델링으로 며칠은 휴업이었다. 아직 빠지지 않은 술냄새를 빼는 것도 포함이었다. B는 더 누워있으려다가 몸을 일으켰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아침을 든든히 먹었다. 그래봤자 라면에 김치뿐이었지만. B는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릴 생각이었다. 의자에 앉아 연필을 들고 고개를 숙여 종이를 바라봤다. 그러자 갑자기 미소가 지어졌다. 아직 그림은 그리지도 않았는데. 이제 곧 고장 날 전등에서 틱틱거리는 소리가 났다. B가 입은 티셔츠에는 B 자신도 모르는 구멍이 나 있었고, 냉장고에는 엄마가 보내준 김치뿐이었다. 그래도 연필을 들고 종이를 바라보고 있으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B는 자신이 미술을 시작했을 때를 떠올렸다. 선 하나 제대로 긋지 못해 학원 선생에게 혼났던, 어설프지만 처음으로 그림을 완성했던, 졸업을 하고 무엇을 할지 막막해하던 동기들 사이에서 신나게 그림을 그리던, 그런 자신의 모습이 종이 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B는 지금 자신이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B는 그렇게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렸다. B는 이것이 행복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