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모범생이었다.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공부도 잘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이름 있는 대학에도 무난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대학에 가서 친구들도 사귀고 학점도 무난하게 잘 받았다. 처음으로 애인도 사귀어봤다. 웃는 모습이 귀여운 사람이었다. 알바도 시작했다. 카페 알바였는데 사람이 한적한 골목에 있어서 최저시급이었지만 몸이 고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돈을 모아 일본으로 교환학생도 다녀왔다. 일본에서 바쁘게 지내다 보니 애인과의 연락이 뜸해져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이별통보를 받았다. 졸업을 하고 나서 바로 취직 준비를 했다. 다른 친구들은 여행도 다녀오곤 했지만, A는 빨리 돈을 벌고 싶었다. 여러 기업을 비교해 보다가 공무원에도 관심을 가졌다. 아직은 여유가 있다고 생각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다. 1년간 친구들의 연락도 받지 않고 공부에 전념했다. 답답한 고시원 안에서 불안할 때면 내년까지만 해보자고 마음을 다잡고 다시 펜을 들었다. 다행히 운 좋게 한 번에 바로 붙었다. 주변에 이 소식을 알리자 모두가 한 번에 붙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A가 공무원이 된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을 했다. 문서를 정리하고, 민원을 받았다. A는 일에서 특별함을 찾을 수는 없었다. 다른 부서에서 온 문서를 확인하고 정리한 후에 보고를 했다. 민원인이 화를 내며 찾아오면 일단 미소를 짓고 응대를 한다. 겨우 민원인을 돌려보내면 이제는 다른 민원을 처리하러 움직였다. 일을 시작한 지 꽤 지났지만 화난 민원인을 대하는 것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얼굴을 붉히고 침을 튀기며 말하는 이름 모를 인간에게, 미소를 유지하며 두서없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은 당연히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A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라서 언제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런 일을 많이 겪은 날에는 확 그만둬버릴까 싶다가도 때마침 울리는 휴대폰 알람을 보며 참았다. 월급이 들어왔다. 저번달도, 이번 달도, 다음 달도, 통장에 돈이 들어온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할지 생각했다.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리고, 사고 싶었던 책도 사고, 먹고 싶었던 것도 사 먹을 것이다. 더 일해서 돈을 모으면 새로운 컴퓨터를 맞출 생각이었다. 아주 화려하게 번쩍이는 걸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다들 바빠 시간이 맞지 않아서 겨우 모일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본 친구들의 얼굴이 폭싹 늙었다는 것을 느꼈다. A는 자신도 저런 얼굴일까 싶어 나중에 피부과를 알아볼까 싶었다. 대학생 시절 돈이 없어서 한 가지 안주로 나눠먹었던 예전과는 다르게 여러 음식을 시켰다. 치킨, 감자튀김, 닭발, 어묵탕. 당연히 맥주도 시켰다. 크게 소리를 지르며 맥주잔을 부딪혔다. 맥주가 흔들려서 테이블에 떨어졌다. 다들 한참을 떠들며 먹고 마셨다. 점점 취기가 올라왔다. 모두가 반쯤 취한 채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F는 최근에 폭락한 주식 이야기, U는 얼마 전부터 가지고 싶었던 자동차 이야기, D는 사귄 지 1년 된 여자친구 이야기. 누군가를 욕하기도 하고, 자신이 겪은 부조리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고, 소소한 행복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A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A는 전날 겪은 민원인에 대해, 그리고 최근에 선물 받은 비싼 술 사진을 친구들에게 보여줬다. 그러자 P가 위스키의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A의 차례는 자연스럽게 끝났다. 이제 슬슬 배도 부르고 밤이 늦어져서 다들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모두가 기분 좋게 취해 가게를 나왔다. 서로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곤 등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방금까지 같이 있었던 B를 발견했다. 생각해 보니 유일하게 B의 이야기만 듣지 않았다. B는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중간에 딴생각도 하고 있는 듯했다. A는 B에게 말을 걸려다가 그만두었다. B가 무언가를 열중해서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A는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창밖에는 어두운 한강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집에 돌아왔는데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까지는 더 이상 마시지 못할 거 같았는데, 혼자 집에 있으니 공허함을 느꼈다. 그래서 최근에 선물 받은 술을 마시기로 했다. 부엌 찬장에 장식되어 있는 반정도 남은 위스키. 미리 얼려놓은 대형 얼음을 꺼내 잔에 담았다. 위스키병을 열어 잔에 따랐다. 잔을 살짝 흔들자 얼음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 한 모금 마셨더니 목에서 타는 느낌이 났다. A는 술이 온몸에 퍼져 기분 좋은 취기를 느꼈다. A는 그대로 눈을 감고 지금을 떠올렸다. 좋아하는 영화 포스터, 작년에 할부로 산 스마트폰, 그리고 방금 마신 위스키. 다음으로 미래를 떠올렸다. 새로 맞출 고사양 컴퓨터, 곧 이사 갈 전셋집. 마지막으로 과거를 떠올렸다. 웃는 모습이 귀여운 전애인, 중앙 잔디밭이 유난히 예뻤던 대학교,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났지만 이제는 연락하지 않는 고등학교 친구들. 그냥 그렇게 떠올리기만 하는데도 미소가 지어졌다. A는 지금 자신이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일해서 돈을 벌어 사고 싶은 것을 사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되었다. A는 이것이 행복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