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래사장에 왔다. 파도가 철썩이며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헐벗은 맨몸으로 도착한 나는 모래성을 쌓았다. 아주 엉성하게. 파도가 그 모래성을 무너트렸다. 다시 모래성을 쌓았다. 또다시 엉성하게. 이번에도 파도가 모래성을 무너트렸다. 조금 화가 났다. 이번에는 조금 더 단단하게 쌓았다. 그리고 다시 파도가 그걸 무너트렸다. 점점 실력이 늘었다. 이제는 얼추 괜찮은 모래성을 만들었지만, 이번에도 파도는 모래성을 무너트렸다. 무너지고 무너지고 무너졌다.
2.
모래사장에서는 울었다.
이제는 다시 보지 못할 거 같아서.
돌아오는 길에는 화를 냈다.
그 파도가 너무 미워서.
집에 와서야 웃을 수 있었다.
다시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침대에서는 불안했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싶어서.
집을 나와서는 조급했다.
빨리 믿고 싶어서.
도착해서야 안심했다.
헛되지 않아서.
3. 다시 모래사장에 앉았다. 처음부터 다시 모래성을 쌓아 올렸다.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가 하나같이 자신의 모래성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화를 냈다. 울기 시작했다. 큰 소리로 웃었다. 모래를 던졌다. 파도에게 발길질을 했다. 다른 모래성을 부셨다. 다른 이를 쫓아갔다. 그리고 도망쳤다. 또다시 모래성을 만들었다. 처음부터. 눈물을 흘리며, 씩씩대며, 익숙한 듯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다시. 언젠가 무너질 모래성을 완성했다.
4. 모래성을 두고 집에 돌아왔다. 언제쯤 무너질까. 내일, 아니면 오늘 저녁, 이미 무너졌을까. 빨리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간이 빨리 흘렀으면 했다. 빨리빨리. 시계는 무심하게 천천히 흘렀다. 밤이 되어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그러다 문뜩 두려워졌다. 다시 그 고생을 해야 할까. 불안해졌다. 또다시? 언제까지? 이렇게 평생? 그래서 시간이 느리게 흘렀으면 했다. 느려져라 느려져라. 시계는 무심히 빠르게 흘렀다.
5. 오늘도 모래사장에 왔다. 역시. 이미 무너져있었다. 다시 자리를 잡았다. 하나씩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렸다. 무너진 부분을 보강했다. 파도가 올 곳에 둑을 쌓았다. 이번에는 완벽하겠지. 하지만 이번에도 무너졌다. 그제야 알았다. 인생이란 건 원래 무너지고 무너지고 무너지는 것이라는 걸. 내가 할 수 있는 건 또다시 무너질 모래성을 계속 쌓는 것뿐이라는 걸. 그래서 조개껍질을 주웠다. 모래성을 조개껍질로 꾸몄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파도가 모래성을 무너트렸다. 이번에는 다른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조개껍질을 주웠다.
6. 다 만들고 나니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모래성은 무너져 있겠지. 다음에는 무슨 모양으로 만들지 생각했다. 네모는 단순하고, 별 모양은 어렵겠지. 그래도 해보고 싶었다. 해보고 싶은 것이 점점 많아졌다. 내일이 빨리 왔으면 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생각할 오늘이 더 있었으면 했다. 시계는 고장 난 듯 빨리도 흐르고 느리게도 흘렀다. 심장이 정확히 1초마다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