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1)

by 고캣

평소보다 조금 늦게 나왔다. 그래도 지각은 아니라 큰 문제는 없었다.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도로 위의 차들이 평소보다 급하고 빠르다는 점이었다. 여차하면 끼어들고 과속하는 장면이 도로 여기저기서 보였다. 이미 어느 차는 사고가 나 있었다. 차주로 보이는 사람이 갓길에 세워진 차를 뒤에 두고선 다가오는 차들에게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휴대폰을 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흔들리는 손이 더 빨라지는 듯했다. 뭐든 해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액셀을 밟아 그와 그의 차를 지나갔다. 사이드미러로 보이는 그의 차에서는 하얀 연기가 조금씩 피어났다.


업무를 보다 보니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팀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샌드위치를 사러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가는 나와 다르게 일제히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평소 점심시간이었으면 직장인들로 가득 차 있는 거리에서 사람이 드물게 보였다. 책가방을 메고 있는 대학생, 수다를 떨러 카페로 들어가고 있는 아줌마 두 명, 그리고 일에 지쳐 쭈그려 앉아있는 샌드위치 가게 알바. 보이는 사람은 그들이 전부였다. 나는 그를 지나 문을 열고 샌드위치 가게로 들어갔다. 나와 같이 늦은 점심을 먹으러 온 사람이 꽤 있었다. 키오스크 앞에도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나도 따라섰다. 10분이 흘렀다. 어느 정도 중요한 업무는 마쳤고, 돌아가서 검수만 하면 되니 기다리는 것에 조급해지지는 않았다. 급하다면 점심을 빨리 먹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내 순서가 거의 다가왔을 때쯤, 뒤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나에게 하는 소리인가 싶어서 뒤를 돌아봤다. 사십대로 보이는 단발의 여자가 스마트폰을 향해 낸 소리였다.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니까! 그건 이 팀장이 할 일이고 우리 팀은...

여자는 그제야 자신의 목소리가 컸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조금 있다가 연락한다는 말을 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조바심과 불안함이 다리까지 전해지면서 그녀의 구두가 딱딱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음 순서면 내 차례였고 앞사람이 끝날 때까지 나는 그녀의 구두굽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앞사람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토핑으로 넣을 채소 중 어떤 것을 더 넣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앞사람은 올리브를 추가했다. 올리브라니. 오히려 중간에 씹히면 별로일 거 같은데. 여전히 뒤에서 딱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딱딱 소리가 멈췄다. 나는 최대한 상냥하게 웃으며 먼저 주문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아직 메뉴를 정하지 못했다는 소리와 함께. 여자는 환한 표정을 한 채로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녀는 키오스크 화면을 대충 누르며 주문을 마쳤다. 나는 미리 생각해 놓은 메뉴를 입력하고 샌드위치를 기다렸다. 내 샌드위치가 나왔을 즘에 그 여자는 이미 가게를 떠나 있었다.


퇴근을 하고 청계천을 걷고 있었다. 집에 빨리 돌아가도 딱히 할 것도 없어서 바람이나 쐬며 걷고 싶었다. 늦은 저녁인데도 사람들이 꽤 있었다. 달리기를 하거나 구석에 앉아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었고 같이 온 사람과 마주 보며 대화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 이번에도 뒤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뒤돌아봤더니 한 커플이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며 싸우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도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주변의 시선을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의 말로 상대방을 때리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년이랑 잤다는 거잖아.

-아니라니까, 다 같이 간 거라고 몇 번을 말해.

-거짓말하지 마!

그러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얼굴로 강하게 다가갔다. 이번에는 남자가 실제로 그녀를 때린 것이다. 그제야 주변 사람들이 다가가 그를 말렸다. 맞은 여자는 주저앉은 채 울고 있었다. 남자는 주변에서 말리니 더욱 흥분한 듯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말은 주저앉은 여자에게 전해지지 않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니 같은 팀의 이 대리가 떠올랐다. 얼마 전에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고 담담하게 말하던 이 대리는 평소에는 보여주지 못한 업무 효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성격은 개차반으로 변했다. 무언가를 물어도 툴툴거리기만 하고 도와주지는 않았고, 자신의 잘못이 컸음에도 다른 사람의 작은 실수에 꼬투리를 잡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비난을 했다. 싹싹한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 대리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것은 회사의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그 사태가 너무 심해지는 거 같아 내가 따로 이 대리를 불러 상황을 묻자 얼마 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밝혔다. 나는 아무리 그래도 정도가 심하다고, 지금 밖에서 울고 있는 박주임은 무슨 죄냐고, 마음 잘 추스르라고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정도만 하고 그곳에서 벗어났다. 더 해줄 것도 없었고 그 정도가 딱 좋았다. 나중에 박주임에게 기죽지 말라는 의미의 메시지와 커피 기프티콘을 보냈다. 그때를 떠올리며 청계천을 걷다가 책장이 하나 보였다. 그곳에는 책이 몇 권 꽂혀있었다. 책장에 듬성듬성 꽂혀있는 책을 보니 오랜만에 책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충동적으로 들었다. 앞으로 더 가면 가끔 가는 서점이 나온다. 나는 그 방향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9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서점이 더 늦게까지 하지 않아서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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