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2)

by 고캣

집에 돌아오니 밤 11시였다. 원래는 모두가 잠들어 있어야 하는 시간이었지만, 엄마 아빠 모두 일어나 있었다. 아마 나를 기다린 듯했다. 그들은 내가 오자 반가움과 미안함이 섞인 이상한 표정을 했다. 특히 아빠는 행동까지 어색했다. 엄마가 옆에서 아빠를 툭툭 치자 아빠가 입을 열었다.

-잠시 이야기 가능하니?


방으로 돌아와서 숨을 크게 쉬었다. 소리를 너무 질러서 그런지 목이 따끔거렸다. 아직 씻지도 않아서 얼굴이 간지러웠다. 그렇다고 씻을 힘이 남아있지는 않았다. 그냥 오늘이라는 하루를 기억에서 지우고 싶을 뿐이었다. 아빠와의 대화는 이랬다. 아빠는 보이스 피싱을 당했고, 현금 이천만원을 송금했다. 지금은 일본에 있는 여동생이 큰 사고를 당해 이 돈이 없으면 수술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았고, 당장 가진 돈이 없어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내 통장에서 그 돈을 빼갔다고 했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요즘은 보이스피싱 수단이 많이 알려졌는데 그런 뻔한 것에 걸리다니. 스마트폰도 잘 못 만지는 사람이 이천만원 송금은 또 어떻게 하셨는지. 언제부터 내 통장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는지. 아마 OTP는 내 방에서 찾아갔겠지. 엄마는 옆에서 눈치를 보다 일단 경찰에 신고를 했으니 기다려보자는 말만 했다. 뉴스만 봐도 그걸 잡지 못한다는 것을 알 텐데. 머리가 아파왔다. 점점 강하게 지끈거렸다.


그 이천만원은 애 엄마에게 보내야 하는 양육비의 일부였다. 딸을 당장 유학을 보내야 한다며 오천만원을 보내라는 지시였다. 나는 돈이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하는 줄 아냐며 따졌다. 그럼 삼천만원이라도 보내라는 말이 돌아왔다.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알겠다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애 엄마가 삼천만원을 내놓으라는 말이 쉽게 나오는 게 신기했다. 나도 있으면 주고 싶다. 삼천만원.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불만을 터트릴 때마다 애 엄마는 애가 아빠가 없으니 교육이라도 잘 받아야 한다는 말만 하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혼 재판에서 승소를 했어야 했는데. 사실상 외도를 한 내가 이기질 못할 싸움을 한 것이지만. 그러니 돈을 모아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없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애 엄마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짜증을 냈다. 최대한 빠르게 보내라는 재촉과 혹시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냐는 의심 섞인 말투로.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큰 소리가 오고 가지 않은 채로 대화를 하다가 전화가 끝났다. 이제 처음부터 다시 돈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했다. 부업이라도 해야 할까 싶어 구직 사이트를 찾아봤다. 그러다 이 대리가 나에게 이직 준비하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고개를 돌리며 부정했다. 이 대리는 좋은 곳 있으면 같이 가자고 농담을 던지며 떠났다. 한참을 찾아봐도 급하게 큰돈을 벌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 카페인. 그 단어가 머리에 떠오르자 커피가 먹고 싶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먹으면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가까운 카페로 향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에 오천오백원이나 했다. 요즘 물가가 올랐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 하다 싶었다. 그때 최근에 박 주임에게 보내준 커피 기프티콘이 떠올랐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받아 바코드가 보이는 캡처 이미지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기프티콘을 꺼내 들었다. 띡. 바코드가 찍히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사용한 기프티콘이라는데요?

나는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고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커피가 갈리는 소리가 매장을 채웠다. 나는 잠시 앉아 휴대폰을 켜서 코인 앱을 열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그래프들이 올라갔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마치 심장이 뛰듯이. 그러다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 엄마는 어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빠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 엄마도 요즘 일 알아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말라고. 나는 이어폰으로 전화를 들으며 다시 코인 앱을 열었다. 의무적인 대답을 하며 휴대폰을 바라봤다. 그러다 커피가 나와서 휴대폰을 보며 카페를 나와 회사로 향했다. 엄마는 여전히 나에게 잔소리와 걱정을 뱉고 있었다. 그러다 나는 길 한가운데에 갑작스럽게 멈춰 섰다. 그래프가 빠르게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아 진짜 그만해!!

주변의 모두가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어떤 시선도 느끼지 못했다 화가 치밀어 올라서 들고 있던 커피에 꽂혀있는 빨대를 열심히 빨았다. 커피의 맛은 씁쓸했다. 시럽을 추가한다는 것을 깜빡했다. 입안에 쓴맛이 맴돌았다. 다시 머리가 아팠다. 그냥 주저앉고 싶었다. 아니 이미 주저앉아있었다. 주저앉은 채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어디선가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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