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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쥬르 Apr 27. 2023

5. 골치 아픈 룸메이트

집 살 결심

집 살 결심

8개월 동안 시달렸던 위층 소음이 사라진 후, 다시 평화로운 시간이 찾아왔다. 이번 일을 겪으며 결심했다. 남은 계약기간만 끝내고 다른 아파트나 렌트 하우스로 이사 가야겠다고. 앞으로 또 어떤 이웃이 들어와 소음을 일으킬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아파트 관리소의 느려 터진 행정 절차를 지켜보며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계약 종료까지 7개월 정도가 남아있었으니, 벌써부터 이사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7월 중순이었다. 스테이시와 부엌에서 마주쳤다.


“지나, 남자친구가 실리콘밸리에 잡을 구했어. 9~10월쯤 이사 올 예정이라 동거하려고 해. 네가 룸메이트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 미리 말해주는 거야.”


“남자친구가 잡을 구했다니 정말 축하해. 그런데 룸메이트를 못 구해서 계약을 깨게 되면, 벌금으로 한 달 치 월세를 추가로 내야 하고 방 상태에 따라 수리비가 청구될 수도 있어."


“진짜? 흠, 그건 몰랐는데… 그럼 네가 룸메이트를 빨리 구하면 되지 않을까?”


스테이시와 나는 그해 3월, 아파트 1년 계약을 했다. 그때는 특별한 언질이 없었는데 그나마 미리 말해준 것에 고마워해야 할까. 그녀는 내가 새로운 룸메이트를 빨리 구해 벌금을 물지 않고 남자친구와 이사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듯했다. 5개월만 더 살아도 벌금 낼 필요는 없을 텐데.


사랑하는 사람과 1분 1초가 모자랄 수 있으니 이해가 전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친구와 더 저렴한 아파트로 이사 가면 월세(렌트비)를 아낄 수 있을 테니까. 끔찍한 아파트 소음과 매년 오르는 월세에 시달려 왔으니, 이곳에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충분히 생기고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왜 하필 이 타이밍에… 나는 얼마 전 이직해 한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중이라, 하루하루가 초긴장 상태였다. 이 상황에 또 한 번의 이사라니.


룸메이트를 구해 아파트 계약기간을 채울 것인가, 이참에 벌금을 내버리고 계약을 깰 것인가. 나는 7, 8월 내내 구인 광고와 인터뷰를 했지만, 룸메이트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룸메이트는 케미도 중요한데 너랑 맞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니까…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가 없네.”


남은 남이구나. 씁쓸하고 싸한 마음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달력이 9월로 넘어가자 마음이 조여오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룸메이트 구인을 그만두고 아파트 계약을 해지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동시에 다른 아파트와 가정집 원룸도 계속 알아보고 있었다.


스테이시와는 지금까지 만난 어떤 룸메이트보다도 잘 지내왔다고 생각했다. 소음 사건 때도 서로 위로하며 어려움을 잘 극복하지 않았는가. 미국에 가족이 없는 나에게 스테이시는 룸메이트 이상의 친구였다. 우리는 각자 사생활을 존중하면서도, 생일, 승진 등 특별한 날들을 챙기고 취미 생활을 응원하며 무난하게 지내왔다. 그동안 이상적인 룸메이트로 지내왔다고 생각한 건, 나만의 순진한 착각이었을까.


© 지나쥬르 via Midjourney


이런 일이 처음이었던 나는 친한 회사 동료와 몇몇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곳에서 오래 살았으니, 얘기를 나누다 보면 뭔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함께.


“말도 안 돼. 원래 계약 먼저 깨는 사람이 룸메이트도 구해주고 벌금도 다 물어야 해. 널 호구로 보는 거 아니야? 룸메이트 구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위약금은 그녀가 내도록 얘기해 봐.”


경험자들의 조언을 종합해 보니 미국 룸메이트 간 상례는 이러했다. 함께 아파트를 계약한 룸메이트 중 한 명이 부득이하게 먼저 계약을 깨는 경우, 룸메이트를 구해주는 것은 물론, 새 룸메이트를 구할 때까지 함께 월세를 분담하는 게 상식이라고. 개인 간 계약서를 쓰지 않더라도 말이다. 영화 <프란시스 하>에서도 주인공 프란시스의 룸메이트, 소피가 다른 친구와 함께 나가 살겠다고 통보할 때, 남은 계약기간 동안 월세는 본인이 부담할 거라고 얘기한다.


그동안 무난히 지내왔던 스테이시를 계산의 대상으로 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1년 계약서에 함께 사인했고, 갑자기 남자친구와 이사 날짜를 정해 상대방에게 통보하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스테이시 입장이었더라도 그런 결정을 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아파트는 나에게도 지속 가능한 주거 형태가 아니었다. 룸메이트가 나가면 또 새로운 룸메이트를 구해야 했고, 그가 남긴 스크래치와 청소 등 모든 책임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가되는 상황이었다. 2B2B 아파트에 사는 한 악순환의 고리는 무한 반복될 것이다. 마음이 복잡했지만 나는 노트를 꺼내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1. 이곳에서 계속 일을 하는 한 어차피 살 곳은 필요하다.

2. 주거 환경이 업무 효율성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3. 아파트에 사는 한, 룸메이트 구하기 + 룸메이트가 쓴 방에 대한 책임은 모두 나의 몫이 될 것이다.

4. 월세(렌트비)는 사라지는 것이지만, 모기지(mortgage)로 내는 돈은 '집이라는 자산'으로 남는다.

5. 느리지만 집값은 계속 오른다.



은 집이라도 좋으니,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내 삶이 타인의 결정에 좌지우지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2B2B 아파트에 계속 살게 된다면, 약속을 깬 누군가를 원망하며 내 책임이 아닌 책임까지 지면서 살 모습이 뻔히 보였다. 그 무한 반복의 굴레를 상상해 보니 끔찍했다. 원룸 옵션도 있었지만, 매월 2,500~3,500불의 월세는 너무 부담스러웠다. 피땀이 묻은 월급을 월세로 다 날리고 저축도 제대로 못 하고 살게 될 것이다. 남을 탓하며 찌질이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우스 헌팅에 성공해야 했다.




나의 지난한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친구, 앨리스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That’s a blessing in disguise!”


‘A Blessing In disguise’라는 관용구는 ‘변장한 축복’, 즉 문제인 줄 알았던 사건이 가져다준, ‘뜻밖의 좋은 결과(전화위복)’를 의미한다. 나도 언젠가는 내 집 마련을 꿈꾸고 있었지만, 이사와 부동산 행정 절차가 두려웠다. 아파트 생활이 안정적이었다면 별생각 없이 그곳에서 계속 살았을 수도 있었다. 룸메이트가 급작스럽게 계약을 깨는 바람에 주거 환경에 대해 제대로 고민하게 되었다. 물론 새로운 룸메이트와 집을 찾아 헤매던 두 달은 무척 고통스러웠지만.


홀로 설 시간이 되었다. 

'내 집 마련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나는 우선 부동산 앱 redfin을 깔고 리얼터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 지나쥬르 via Mid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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