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아파트 이야기
나의 첫 거주지는 에반스톤(Evanston), 메이플 애브뉴의 끝자락에 위치한 3층짜리 낡은 월세 아파트였다. 2년 남짓 대학원 생활 중 1년을 이곳에서 보냈고 여름 인턴십도 이곳에서 마쳤다. 한국에서 거처를 알아봤기에 직접 보지도 않고, 미래 룸메이트와의 이메일 교환과 사진 몇 장만으로 결정한 아파트였다. 무난한 룸메이트, 선화와 함께 나의 첫 미국 생활은 순항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곧 위기에 봉착한다.
포카리스웨트 광고에서 나올 법한, 나무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를 타고 캠퍼스를 누비는 것은 나의 오랜 로망이었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버킷리스트 1번’으로 정해 둔 자전거를 구입하고, ‘포카리스웨트’라는 별명을 붙였다.
애지중지하던 자전거라, 처음 몇 주간은 3층까지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 마루 한편에 주차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지각하겠다 싶은 날, 무거운 자전거를 둘러메고 가파른 3층 계단을 내려가기엔 번거롭고 힘이 달렸다. 결국은 아파트 반지하 자전거 주차장에 락을 걸어 묶어두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러나 며칠도 안 되어 자전거를 도둑맞았다. 속이 따가워 몇 주 동안 밤잠을 설쳤다. 쓸데없이 상상력이 풍부한 나는, 반짝반짝 광이 나는 새 자전거를 목격한 어느 아파트 거주자가 미국 자전거 절도 범죄 망과 긴밀히 협조해, 내 자전거를 훔쳐 갔다고 결론 내렸다. 서러웠지만 집과 전용 가라지가 없는 유학생에게 종종 일어나는 사고였다. 트라우마는 오래 남았으나, 훗날 ‘포카리스웨트’에 대한 에세이 한 편으로, 애정했던 첫 자전거를 떠나보냈다.
미국의 여느 아파트처럼, 소음이 심한 아파트였다. 내 방은 3층 꼭대기에 있었음에도, 2층 학부생들이 파티할 때마다 굉음이 벽과 천장을 타고 올라와 나무 마루에서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미국 학부생들이 시도 때도 없이 파티만 벌이는 미드와 할리우드 영화를 떠올리며, 그게 과장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소음에 취약한 나는 2층에서 소음이 들린다 싶으면, 얼른 자전거를 타고 학교 도서관으로 도망가곤 했다. 하루는 평화로운 토요일 아침부터 기타와 드럼 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여러 번 심사숙고한 끝에, 나는 2층 집 문을 두드렸다.
“헬로. 나 303호 사는데, 얘기할 게 있어. 지금 시간 되니?”
“헤이, 뭔데?”
안을 흘끔 들여다보니, 광란의 파티 현장이 연상되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머리가 떡진 그는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인사말도 없이 hey라고 했다. 내가 네이티브 스피커는 아니지만 무례한 말투 정도는 감지할 수 있었다.
“어젯밤에도 파티하더니, 아침 일찍부터 드럼 치는 건 좀 그렇지 않니?”
“내가 내 악기 연주하겠다는데 뭔 상관이야?”
“미국 아파트가 벽이 얇아 소음이 심한 건 이해하는데, 아침부터 이러는 건 좀 아니잖아… 서로 좀 배려하면 좋겠어.”
그는 눈썹을 치켜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도 예전에 가구 만들 때 소음 냈잖아! 그건 뭐고?”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이사 왔으니 나도 가구가 있어야 하고, 그건 ‘one-time thing’이었잖아. 매일 반복되는 소리는 아니었다고."
2층 학부생과 평화의 대화를 시도했지만, 그는 앞으로도 본인 마음대로 하겠다며 문을 쾅 닫아버렸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아파트 매니지먼트에 소음 신고를 했다. 2주간 조금 잠잠해지는 듯하더니, 이후에도 학부생은 시도 때도 없이 파티를 벌이고 밤낮없이 드럼을 쳤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학교 도서관으로 피신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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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음 때문에 그곳이 점점 싫어졌다. 짧디 짧은 2년 대학원 생활에 또 이사하는 건 귀찮은 일이었지만, 소음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다. 마침 다음 해 계약 연장 얘기가 나왔고, 룸메이트 선화도 단독 집으로 이사 갈 계획이 있다고 했다.
‘할 수 없지… 또 한 번 이사 갈 때가 되었구나.‘
이삿짐을 조금씩 챙기기 위해, 나는 지하실 공용 창고에 쌓아 두었던 플라스틱 박스를 가지러 내려갔다. 한국에서 부친 이삿짐 박스로, 미국에서는 이렇게 탄탄한 박스를 구하기 힘들어 잘 보관해 두었다. 우선 상자 두 개를 집어 들고 3층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그 상자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분주한 하루였다. 나는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누웠다. 가을 학기가 시작되기 전, 새로운 거처를 구하고 이사 갈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그때 방 한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난히 밤에 소머즈 귀가 발동하는 나는, 단번에 그것이 벌레 소리라는 걸 직감했다. 다행히 미리 구비해 놓은 바퀴벌레 약이 한 통 있었다.
‘불을 켜면 분명 도망갈 것이다.’
나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더듬더듬 바퀴벌레 스프레이를 찾아 뚜껑을 열고 발사할 준비를 마쳤다. 소리의 진원지는 책상 및 의자 옆으로 추정되었다. 혹시나 바퀴벌레가 내 쪽으로 날아올까 봐, 수면양말에 선글라스로 무장하고 침대에 올라 불을 켰다. 아니나 다를까, 손바닥 4분의 1 정도 크기의 진갈색 덩어리가 등을 번뜩이며 책상 밑에 도사리고 있었다.
‘으악~~~ 카카로치!!!!! 패스트푸드를 처먹었나? 미국 로치는 덩치도 왜 이렇게 커?’
갑자기 불을 켜니 녀석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조각상처럼 잠시 멈췄다가 빛의 속도로 도망쳤다. 나는 로치를 향해, 온 힘을 다해 스프레이를 발사했다.
“치이이이이익… 칙칙…”
로치는 끈적이는 액체를 달고, 온 힘을 다해 어두운 구석으로 도망쳤다. 나는 그럴수록 더 맹렬히 스프레이를 발사했다.
“치익칙… 치이이익… 피이이이이…”
더 이상 액체가 나오지 않았다. 한 통을 다 써버린 것이다. 로치는 아직 액체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마루에 나가 스프레이 대용으로 쓸 만한 다른 물건을 급히 찾았다. 하지만 비상으로 마련해 둔 그 스프레이가 다였다. 방에 들어와 보니, 로치는 움직임이 없었다.
‘휴… 다행이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오밤중에 그 끔찍한 현장을 치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끈적이는 액체에서 허우적거리다 전사한 바퀴벌레를 어떻게 치운담…. 때는 새벽 2시 30분. 침대 위에서 30분을 망연자실하던 나는 결국 잠을 청하기로 했다.
화학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눈을 붙이려 애썼지만 방금 보았던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생전 처음으로 본 어마한 크기의 미국 카카로치. 액체에서 꿈틀대는 모습. 온 방을 채운 매캐한 스프레이 냄새. 하지만 창문을 열 수는 없었다. 여름 모기가 공격해 올 테니까.
하는 수없이 방문을 열었다. 마루 공기가 조금이라도 들어와 숨통을 틔워 주기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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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치는 영원히 잠들고,
나는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 이미지 출처: Unsplash, © 지나쥬르 via Mid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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