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이야기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미국 북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실리콘밸리, 이름만 들어도 알만 한 빅테크, 오랜 역사의 기술 기업, 스타트업이 밀집된 곳이다.
대체 왜 실리콘밸리인 걸까. 기술 산업의 핵심인 반도체 재료가 실리콘(규소, silicon)이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는 규소(silicon)와 샌프란시스코만 동남쪽으로 펼쳐진 산타클라라 계곡(valley)의 조어로, 1970년대부터 쓰였다. 비가 많이 오지 않아 습기가 적은 캘리포니아 환경이 전자 산업과 연구단지 조성에 적절한 환경을 제공했다고 한다. 실리콘밸리라는 이름이 주는 뭔가 도회적이고 거창한 느낌이 있지만, 가까운 샌프란시스코와 몇몇 큰 도시의 번화가를 제외하면 다 고만고만한 시골 동네다.
나는 회사에서 나오는 봉급으로 현재 생활비를 100% 해결하고 있다. 남들처럼 N잡러가 되어 부가적 수익 파이프라인을 만들고 싶지만, 아직 그 정도 능력이 아닌 걸 잘 알고 있다. 우선 회사에서 부지런히 능력을 키워, 독립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실리콘밸리에 사는 대다수 외국인은 엔지니어이기에, 전혀 엔지니어같이 보이지 않는 나에게 사람들은 종종 묻곤 했다.
“근데 무슨 일 하세요?”
그렇다면 엔지니어같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무엇인가? 나는 숫자보다는 텍스트를 더 좋아하는 영락없는 문과생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학부에서 어문학을 전공했다. 또한 기계치다. 혼자 살며 조금씩 요령을 배워가고 있지만, 여전히 기계가 고장 나면 어쩔 줄 모른다. 어떤 이들은 그리 샤프하거나 촘촘해 보이지 않는 나를 얕보기도 했다. 또는 실리콘밸리에 발령받은 남편 따라 미국에 와, 타지 생활을 처음 해보는 여성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가정을 품고 고의로 질문하는 이들에게 나는 단답형으로 대답하곤 한다.
“직장인입니다.”
고의성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더 친절하게,
“마케팅리서치 일을 하고 있어요.” 또는
“데이터 분석하는 일을 해요.”
타지에서 여러 해 살면서, 모든 이에게 친절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테크 회사에서 일하는 데이터분석가다. 흔히 데이터분석가라고 하면, SQL, Python, R 등 다양한 컴퓨터 언어에 능한 하드코어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또는 머리 위에 숫자가 동동 떠다니는 증권가 애널리스트를 떠올릴 수도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그쪽 분야는 아니다. 기업에서 Customer Insights, Consumer Insights, VOC(Voice of Customer)라고도 불리는 직군에서 일하고 있다.
고객 인터뷰 또는 전문가 인터뷰를 많이 하며, 이를 바탕으로 정성적 텍스트 분석 및 스토리텔링을 한다.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한 경우에는 설문조사(Survey)와 같은 정량적 연구*나 포커스 그룹(Focus Groups)과 같은 정성적 연구*도 병행한다. 정성적 연구와 정량적 연구가 반반 치킨처럼 섞여 있다.
50장이 넘는 인터뷰 녹취 자료를 읽다 눈이 어질어질할 때면, 동시에 진행 중인 설문조사 프로젝트로 갈아탄다. 엑셀 피벗 테이블(pivot table)로 설문조사 결과가 명쾌한 숫자와 그래프로 딱딱 떨어지면 잠시 짜릿함을 맛본다. 수포자가 될 뻔했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며, ‘그땐 왜 숫자의 아름다움을 몰랐을까?’ 잠시 사념에 잠기기도 한다. 끝없이 펼쳐진 엑셀 스프레드시트를 만지작거리다 어깨가 뻐근해 오면, 인터뷰 녹음 파일을 다시 한번 듣는다. 다시 스토리텔링 모드에 돌입한다. 나는 정성적 세계와 정량적 세계를 드나들며, 반반 치킨 생활에 꽤 만족하고 있다.
MBTI는 상황과 환경에 따라 조금씩 변할 수 있지만 나는 MBTI 결과를 신뢰하는 편이다. 오래전, 혈액형별 성격 유형이 유행했을 때도 관련 책에 탐닉했었다. 혈액형별 성격이나 MBTI 유형에 회의를 품은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것이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의 MBTI 성향은 알게 모르게, 현재 직업을 선택하고 미국에서 비혼으로 살아가는 데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 I : 조용히 혼자 일하는 걸 즐긴다.
(프로젝트 미팅도 있지만, 혼자 결과물을 완성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 N : 직관으로 결정할 때가 많다,
(인터뷰, 포커스그룹, 데이터 분석을 하다 보면, 의외로 직관적인 사고가 도움이 될 때가 많다)
· F : T였으면 천재가 됐으려나? 이성보다는 감성이 발달했다.
(감성은 데이터 분석에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지만, 스토리텔링에서 도움받고 있다)
· J : 정리 능력, 지금 업무에서 가장 많이 쓰는 게 J가 아닐까 싶다.
(인터뷰 자료든 설문조사 데이터 분석이든, 무조건 정리가 필요한 일이니까)
처음부터 데이터분석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서 자리 잡기 위해,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 취업 비자를 해결하기 위해 ‘임원 비서’ 일을 했었다. 임원 비서가 갖춰야 할 덕목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고위 임원의 요청을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는 지적 능력, 스케줄 정리 스킬,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한 줌의 눈치, 초강력 멘털, 순발력, 인내심 등. 당시 내가 가진 패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인터뷰에서 강점을 강조하라는데, 내겐 어떤 강점이 있을까…? 근면성실, 디테일, 정리력…? 그래, 정리라면 내가 또 한 정리하지.’
그렇게 나는 정리력이라는 패를 꺼냈다.
정리력은 빛을 발할 때가 더 많았으나, 종종 나를 혼란에 빠뜨릴 때도 있었다. J는 양날의 검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다.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 순조롭게 흘러가면 만사 오케이였지만, 변수가 생기기라도 하면 환장할 노릇이었다.
대표님 스케줄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퇴근했건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생기는 변수는 나를 괴롭혔다. 주말 아침 요가 클래스를 마치고 파머스 마켓에 들리려고 운전석에 앉는 순간, 갑작스러운 대표님 스케줄 변경으로 시속 90마일로 달려 집에 온 적도 있다. 얼음장처럼 티끌 하나 없이 정리한 스케줄이 한바탕 뒤집힐 때면, 스멀스멀 올라오는 깊은 빡침을 꾹꾹 눌러 담고 변경 작업을 하곤 했다. ‘J’가 강한 자신을 버려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3년간 대표님 밑에서 도를 닦고 하산하니, 나를 버리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주어졌다. 데이터 분석 일을 하며 삶이 한결 수월해졌다. 참으로 글로벌하신 대표님을 보좌하며 더욱 향상된 정리 능력과 순발력이 가끔 요긴하게 쓰일 때가 있어, 그 시절에 대한 후회는 없다.
해외 비혼인 나의 삶은 자유로우면서도 불안하다. 자유를 원하면서도 안정감을 갈구하는 아이러니 속에 산다. 현재뿐 아니라 은퇴 이후의 삶도 미리미리 플래닝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압박감을 느낄 때도 있다. 뭐든지 계획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지만, 초극강의 J가 되지 않도록 노력 중이다.
소음에 매우 취약하기에 주거지 소음량에 따라 하루에도 기분이 여러 번 널을 뛰었다. 주거 환경은 나의 일에 직격탄으로 영향을 미쳐왔다. 미국에서 여러 번 이사해야 했고, 주거지가 바뀔 때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았다. 타지 생활하면서 그 정도도 감수 안 했나 싶겠지만, 모든 것을 미리 계획하고 그대로 움직여야 성이 차는 나에게는, 그게 시련처럼 느껴졌다.
‘이곳에서 계속 일하고 먹고살려면, 주거지부터 먼저 해결해야겠구나.’
으리으리한 단독주택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대로 된 보금자리를 찾고 싶었다. 그저 소음이 덜하고, 편히 발 뻗고 누울 방이면 되었다.
※ 정량적 vs. 정성적 연구 (출처: 위키백과)
- 정량적 연구 (양적 연구, quantitative research): 사회과학에서 통계적, 수학적, 계산적 기법을 통한, 사회 현상의 체계적인 경험적 탐구를 가리킨다. (예: 사용자 서베이, 웹사이트 애널리틱스, A/B 테스트)
- 정성적 연구 (질적 연구, qualitative research): 수치화되지 않는 자료, 예를 들면 인터뷰, 관찰 결과, 문서, 그림, 역사 기록 등 질적 자료를 얻기 위해, 사회학과 사회 심리학, 문화 인류학 등에서 자주 사용된다. (예: 인터뷰, 포커스 그룹, 현장/관찰 조사)
※ <나의 MBTI가 궁금하단 마리몽>, 글: 김소나, 그림: 한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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