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벌레와 한밤의 배틀을 벌였던 첫 월세 아파트 이후에도, 나는 여러 아파트와 원룸 스튜디오를 전전했다. 중부 에반스톤(Evanston)에서 세 번의 이사, 실리콘밸리에서 두 번의 이사 이후 2B2B(2 Bedroom 2 Bathroom) 아파트에 정착했다. 이번이 부디 마지막 이사이기를 바라며.
산타클라라(Santa Clara) 시에 있는 중형 아파트로, 실리콘밸리 한인 타운이 5분 거리에 있었다. 한인 마트와 식당이 가깝고 아침 출근길이 30~40분 정도 걸리는 곳으로, 주변 환경과 편리한 교통 모두 마음에 들었다.
첫 번째 룸메이트는 대학원 동기였던 대만인 에밀리(Emily)였다. 서로 조심하며 지내던 허니문 피리어드 1년이 지나자 말도 없이 남자친구를 불쑥 데리고 왔다. 집에서 잠옷 차림으로 돌아다녔던 터라 깜짝 놀라곤 했다. 2년 후 남자친구와 동거하겠다며 계약을 해지했다.
두 번째 룸메이트는 스테이시(Stacy)였다. 중국계 미국인으로 대학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였다. 우리는 서로의 생일을 챙겨주고 한국 음식과 중국 음식을 요리해 나눠 먹기도 했다. 새로운 룸메이트와 드디어 생활의 안정감을 찾나 싶더니, 평화로움도 얼마 가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위층에서 예사롭지 않은 소음이 들려왔다. 조금 과장하면 10톤짜리 육식 공룡들이 먹이를 찾아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소음은 한 군데에서만 들리는 게 아니었다. 부엌에서, 침실에서, 마루에서… 2B2B 아파트에서 어떻게 이런 동시다발적인 소음이 나는 것일까?
문제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스테이시는 나에게 신신당부했다.
“조심해! 총기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옆집에서 소음 컴플레인을 조금 했더니 이웃을 찾아가 총으로 바로 쏴 죽였다는 무시무시한 에피소드도 몇 번 들었다. 살벌한 나라 미국이다. 룸메이트의 경고에 혹시나 싶어, 후추 스프레이를 주머니에 넣고 4층으로 출동했다. 긴 복도를 지나 내가 살고 있던 곳의 바로 윗집을 찾았다. 그들은 어서 들어오라는 듯이 문을 활~짝 열고 있었다. 덩치 큰 인도인 6명이 부엌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2B2B인데 왜 6명일까… 잠시 의문이 들었다.
“당신들 발 소리랑 밤에 베란다 열고 얘기하는 소리가 너무 커서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아파트의 구조적 문제도 있지만, 조금만 조심해 줬으면 좋겠네요.”
싱겁게도 그들은 별 저항 없이 알겠다고 했다. 이제 조금 나아질 거라는 기대에 살짝 들떠서 스테이시에게 협상 결과를 알려주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오히려 소음의 종류는 더 다양해졌고 소리는 더 커졌다. 슬리퍼 질질 끄는 소리, 물건 떨어뜨리는 소리, 남자들끼리 레슬링을 하는지 쿵쾅거리는 소리, 베란다 문을 활짝 열고 쩝쩝거리는 소리, 접시 부딪히는 소리, 방귀 소리까지… 이전에도 이웃이 살았지만 이렇게까지 메가급 소음은 아니었다. 그들의 문제일까, 아파트 건축 구조의 문제일까?
우리는 참다못해 아파트 관리소에 컴플레인을 넣었다. 관리소에 직접 찾아가기도 했지만 어떤 답이 없었다. 그렇게 한 달째 답답해하던 차, 복도에서 우연히 수리공(janitor) 아저씨를 마주쳤다. 아파트에 상주하며 물 막힘이나 전기 고장 등 자잘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해결해 주시는 분이었다.
“아… 그 유명한 468 호? 알고 말고요! 에휴~ 당신뿐 아니라, 다른 이웃도 컴플레인 넣어서 지금 접수된 게 열 건 넘을걸요. 오른쪽 집, 왼쪽 집, 심지어 복도 건너편 집, 수영장 가로질러 베란다 맞은편 집까지, 난리도 아니에요. 운이 없게도 당신 집이 바로 밑 집이지만 말이죠…”
아, 나만 소음으로 힘든 게 아니었구나…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왠지 위안이 되었다.
“아니, 상황 뻔히 알면서 왜 관리소에서는 답이 없는 걸까요?”
“알잖아요. 여기 행정업무 느린 거. 게다가 한 번 입주한 주민을 내쫓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아마 증거를 모으고 있을 거예요. 이런 얘기까지 하면 좀 그런데, 그 집에 몇 명 사는 줄 알아요? 인도 남자 6명이 살아요. 다 밤일하는 애들이니까… 이 정도 얘기하니 상황이 대략 어떤지 이해되죠?”
“아파트 입주할 때 저한테는 백그라운드 조사도 철저히 하던데… 아파트에서 제대로 체크를 못 한 거네요?”
“그거야 모르죠. 그냥 2명 산다고 거짓말로 입주 신청하고 6명이 열쇠 복제해서 왔다 갔다 하면, 관리소에서도 알 길이 없으니까요.”
© 지나쥬르 via Midjourney
그제야 어마어마한 소음의 근원지를 알게 되었다. 왜 밤마다 그렇게 시끄러웠는지도. 아저씨는 소음이 너무 심하면 전화해 보라고 로컬 경찰서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들의 한밤중 파티로 다섯 번도 넘게 경찰을 불렀고, 새벽 2~3시에 음식 타는 냄새와 함께 파이어 알람이 울렸다. 컨퍼런스 콜은 아예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 차 안에서 해결했다. 소음에 그리 민감하지 않은 스테이시마저도 이사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한 번은 윗집에서 베란다 문을 활짝 열고 발리우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소리가 왕왕 울려 퍼져 마치 대형 영화관에서 그들과 함께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10분이 흘렀을까. 누군가 창문을 열더니 “그만 좀 해, 이것들아!”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곳곳에서 창문을 열고 “조용히 좀 해!”, “주말까지 그래야겠냐?” 하고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입주민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 지나쥬르 via Midjourney
속 시끄러웠던 넉 달이 지나서야 아파트 관리소에서 연락이 왔다. 윗집에서 소음이 들리면 바로 녹음해서 음성파일로 보내줄 수 있냐고. 넉 달만에 처음 연락이라니… 게다가 조사할 책임을 왜 입주민이 떠맡아야 하는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아파트에서도 그들을 ‘evict (추방 조치)’하려면 소음에 대한 증거가 필요하니 어쩔 수 없었다. 스테이시는 소음이 들릴 때마다 “지나, 지금이야!”라며 나를 황급히 불렀다. 우리는 그렇게 밤낮으로 녹음한 소음 파일을 아파트 관리소에 넘겼다.
4개월 후 위층에서는 일주일 내내 뽁뽁이 밟는 소리가 났다. 이삿짐을 싸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첫 컴플레인 접수 후 8개월 만에 뽁뽁이와 함께 사라졌다. 아파트 관리소에서는 진행 과정에 대한 일말의 업데이트도 없었다. 새로운 이웃이 이사 오는 소리로 사건이 종결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던 368호 아랫집에서는 중동 음악이 벽을 타고 들려왔다. 바로 왼쪽 집에서는 매일 블록버스터를 보는지 자동차 굉음과 폭탄 소리가 들려왔다. 오른쪽 집에서는 뚱땅뚱땅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인종만큼이나 소음도 다양한 미국이었다.
하지만 이 총체적 난국을 '층간소음' 문제만으로 치부할 것은 아니었다. 실리콘밸리 아파트 월세(렌트비)는 해도 해도 너무 비싸다. 물가가 '빅테크 엔지니어' 연봉 기준에 맞춰져 있다. 나는 당시 월세로 1,750불 (공과금 제외), 한화로 약 200만 원을 내고 있었다. 룸메이트 스테이시가 없었다면, 그 아파트에서 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월세는 해마다 부지런히 올랐다. 연봉 인상률보다 더 높게. 오죽하면 "월세 같이 내려고 결혼한다"는 말까지 나올까.
윗집 인도인들이 무슨 밤일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아파트 월세는 그들에게도 분명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니 그 비좁은 공간에 6명이 살 생각을 했겠지. 지진을 대비해 나무로 지은 아파트의 지독한 소음, 고소득자 외에는 감당하기 힘든 실리콘밸리의 살인적인 물가와 외노자에게 불리한 주거 환경, 복장 터지게 느린 행정 절차가 더 큰 문제였다. 해결할 수 없는 난제 앞에 무력함을 느꼈다.
이참에 모든 것을 다 접고 한국에 들어가라는 신의 계시일까. 하지만 진행 중인 영주권은? 여기까지 오는 데까지 거쳐온 과정은 어쩌고. 과연 나는 형형색색 소음의 멜팅팟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또 한 번의 변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지나쥬르 via Mid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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