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내 집 마련 프로젝트' 시작과 함께 폴더를 하나 만들었다. 폴더 이름은 ‘Project R’. Real Estate(부동산)의 앞 글자 R과 ‘알 까기 프로젝트’의 R을 따 와 만들었다. 어서 알을 깨고 나와 ‘마흔이 되기 전에 내 집을 꼭 사고 말리라’라는 소망을 담았다. 늦깎이 유학생으로 지난한 미국 이민 과정을 거치며 인간적으로 성숙하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나는 아직도 알 속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원룸에서 혼자 살던 1년 반을 제외하고는 쭉 룸메이트와 함께 살아왔으니, 혼자 살고 있었지만 경제적, 정서적으로 누군가에게 기대고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룸메이트 스테이시가 남자친구와의 동거로 아파트 계약을 깨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나서야 뼈저리게 느꼈다. 결국은 남이 될 룸메이트에게 계속 의지하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연령대마다 특정한 임무가 주어지는 한국에서 물리적으로 떠나왔지만, “나이 40이 다 되어가도록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고 뭐 했냐"라는 시선에서 백 퍼센트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미국에서도 여전히 한국인 커뮤니티와 교류가 있었고, 오랜만에 한국에 가 근황을 나누다 보면 위의 질문이 종종 나왔다. 그런 시선에서 당당하고 자유롭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독립해야 하고, 그 첫걸음이 내 집 마련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 지나쥬르 via Midjourney
'1인2묘 가구’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김민정 작가가 <결혼은 모르겠고, 내 집은 있습니다>에서 얘기하듯, “혼자 사는 여자야말로 ‘안전하고 안정적인 주거 공간’이 필요하다.”* 내 한 몸 편히 머무를 수 있는 물리적인 안정감뿐 아니라,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심리적 안정감까지 안겨주니까.
“내 집을 갖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혼자는 집을 갖기 힘드니 결혼을 고려할 게 아니라,
비혼의 삶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라도 집이 필요하다고.
가장 불안한 사람이 가장 절실한 법이니까.”
<결혼은 모르겠고, 내 집은 있습니다>, p. 21
나의 룸메이트 에피소드나 미국 아파트에서 겪었던 메가급 소음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룸메이트가 계약을 깼다고 집을 사? 금수저네!"
“여자 혼자 집을 산다고?!"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며 오해를 불식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냥 금수저라고 생각하세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군분투의 시간 끝에 내린 결정을 일축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저 빙그레 웃었다.
‘여자 혼자는 집 있으면 안 되나요?’
여자 혼자도 인간이고 여느 사람들처럼 좋은 의식주를 누리며 살 자격이 있다. 여자 혼자뿐 아니라, 남자 혼자든, 자취생이든, 신혼부부든, 아이 많은 가족이든, 아이 없는 딩크족이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편하게 먹고 자고 쉴 수 있는 아늑한 공간이 필요하다.
© 지나쥬르 via Midjourney
금수저만이 집을 살 수 있는 건 결코 아니다. 미국의 ‘모기지 시스템’을 잘 활용하면 되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집값의 15~20%에 해당하는 계약금을 내면, 나머지 금액은 집 대출 비용으로 매달 갚아 나갈 수 있는 ‘모기지(mortgage) 제도'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5억짜리 집을 사려면 1억 원, 10억짜리 집을 사려면 2억 원의 계약금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처음엔 문 한 짝 정도가 내 것이겠지만, 모기지를 갚아나가며 점차 소유하는 자산이 늘어나는 셈이다.
유현준 교수는 <공간의 미래>에서 자신의 미국 유학/체류 경험을 상기하며, 본인의 유대인 동료 이야기를 들려준다.
“미국은 집값의 10퍼센트 정도만 있으면 대출을 받아 살 수 있다. 당시 좋은 집은 50만 불, 우리나라 돈으로 5억 정도 했었으니 5천만 원만 있으면 집을 사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동료는 종잣돈으로 집을 사고 매달 월세를 내는 대신 은행 대출을 갚아 나갔다. 반면 나는 계약금 5천만 원이 없어서 월세를 전전했다. 그렇게 7년을 살았다. 월세가 1백만 원 조금 넘었으니 84개월 동안 지출한 월세가 1억 가까이 된다. 만약에 내가 집을 사고 시작했다면 1억은 나의 자산으로 남았을 것이다.”**
또한 그는 월세(렌트비)를 내는 이들을 ‘21세기의 소작농’이라고 표현한다.
“나와 그 친구는 같이 시작했지만 부의 격차는 점점 더 커졌다. 월세로 사는 것은 내 부동산 자산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내 노동의 대가가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대신 그 돈은 부동산을 소유한 누군가의 자산으로 축적된다. 월세는 21세기에 존재하는 새로운 형태의 소작농이다.”**
나도 여느 유학생과 다를 바 없었다. 외노자로 피땀 흘렸던 노동의 대가가 5번의 이사, 7년간의 월세와 함께 바람처럼 사라졌다.
물론 학생 비자, 취업 비자를 거쳐 영주권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미국에 계속 있을지 한국으로 돌아갈지 거처가 불확실했다. 당시 모기지 제도를 알았더라도 집을 덜컥 사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주권이 없는 외국인이라도, 법적 절차를 밟으면 집을 살 수 있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거쳐온 ‘남의 집 연대기*’를 정리해 보았다.
1. 에반스톤 3층 아파트
장점: 3평짜리 방은 코딱지만 했지만, 넓은 거실이 있어 숨 쉴 수 있었다.
단점: 2B1B (2 bedroom, 1 bathroom)이라 룸메이트와 번갈아 써야 해서 불편했다. 공용 가라지에서 자전거를 도둑맞았다.
▶ 넓은 거실, 전용 창고
2. 에반스톤 원룸 (2번 이사)
장점: 원룸에 모든 것이 갖춰져 있어 편했다. 목조식 건물이었던 이전 아파트에 비해 소음이 조금 덜 했다.
단점: 바로 맞은편 다른 원룸이 보며 거의 창문을 닫고 살아 답답했다. 세탁기, 건조기 방이 따로 있어 시간에 맞게 빨래를 잘 찾아와야 했다.
▶ 작더라도 마당이 있거나, 나무 한 그루라도 보이는 뷰
3. 서니베일 아파트 (캘리포니아 첫 아파트)
장점: 2층이라 그나마 소음이 덜했다.
단점: 옛날식 아파트라 문을 열자마자 야외라 벌거벗고 사는? 느낌이었다. 세탁기 건조기 코너가 집에서 멀었고, 제시간에 맞춰 빨래를 찾아와야 하는 불안감 (가끔 빨래 도둑이 있었다), 야외 공용 주차장이라 자동차 창문 깨는 범죄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 이왕이면 이중 덧문, 전용 주차장
4. 산타클라라 아파트
장점: 세탁/건조기가 집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편했다. 회사와 한인 마트가 가까워 위치상으로도 좋았다. ‘gated community’, 즉 키 포브(key fob)로 철창문을 열어야 주차할 수 있어 안전했다.
단점: 이웃집 메가급 소음, 2B2B라 룸메이트가 나갈 때마다 새로 룸메이트를 구하고 그들의 방 청소와 스크래치가 모두 내 책임이 되었다.
▶ 룸메이트 없이 살기, 되도록 타운하우스, 콘도라면 적어도 꼭대기 층
위의 분석을 통해 도출해 낸 체크리스트는 다음과 같았다.
<오픈하우스 체크리스트>
1. 층간 소음 없는 2B2B 타운하우스 (또는 콘도 꼭대기 층)
2. 넓은 거실
3. 작더라도 마당
4. 전용 주차장, 창고
5. 룸메이트 없이도 부담할 수 있는 월 대출금
재산 가치가 높은 싱글하우스를 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집의 외부 수리까지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무엇보다 모기지 제도를 활용해도 100만 불(12억 원)을 호가하는 싱글하우스를 사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웠다. 금액에 제한이 있었기에, 위의 5가지 조건을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고 집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리얼터(부동산 중개사)에게 연락해 오픈하우스에 가 보았으나, 문서 리뷰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실력 있는 리얼터가 필요했다. 아파트에서 방을 빼야 하는 10월 말까지 2달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마침 알고 지내던 회사 후배와 우연히 연락이 닿았다.
“선배, 예전에 집 살 때 도와줬던 리얼터 소개 드릴까요? 저희 학교 선배인데, 거의 신기가 있어요!”
신기가 있다니! 신기가 있다는 말인즉슨, 숫자로만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는 부동산 시장에서 ‘촉’이 좋고 좋은 매물을 알아보는 능력자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리얼터에게 연락해 남은 2개월 동안 어떻게 집을 알아보고 이사할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9월의 첫 주말, 나의 첫 오픈하우스 투어가 시작되었다.
© 지나쥬르 via Midjourney
※ *출처: <결혼은 모르겠고, 내 집은 있습니다>, 김민지 지음, p.33-34
※ **출처: <공간의 미래>, 유현준 지음,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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