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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쥬르 Jun 01. 2023

8. 운명의 집을 만나다

최종 오퍼할 결심


재스민 나무 두 그루, 영화 <카모메 식당>에서 나올 법한 주방, 과하게 꾸미지 않은 스테이징. 들어서자마자 깔끔하면서도 편안함을 주는 첫인상에 반했다. 소위 운명의 그를 만났을 때 느낄 법한 감정을, 나는 운명의 집을 만났을 때 느꼈다.


한 달 후면 아파트에서 방을 빼야 한다. 지금까지 돌아본 다섯 지역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웨스트 산호세/캠벨 지역 중심으로 남은 오픈하우스를 둘러보기로 했다.


9월의 마지막 주 일요일이었다. 주말 동안 타운하우스 단지 및 주변 지역 매물을 둘러보기로 했다. 이 타운하우스 단지는 내가 직접 Redfin 을 통해 찾은 곳으로 매물이 나오는지 계속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밝은 기운이 느껴졌다.


- 거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마당의 재스민 나무 두 그루

- 카모메 식당 같은 구조의 주방

- 밝은 나무색 마루

- 높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 과함 없이 적당히 꾸민 스테이징도 마음에 들었다.             


출처: redfin.com


집 구조는 1.5층으로 1층에는 거실과 주방이 있었고, 계단 7개를 올라가면 2B2B(방 2개, 화장실 2개) 구조가 나왔다. 우선 거실과 마당을 둘러보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네고하기 힘드니, 너무 맘에 드는 티 내지 말라"라며 리얼터(부동산 중개업자)가 귀띔을 했다. 크기와 구조가 딱 좋은 마스터 베드룸에 비해 게스트 베드룸이 조금 작아 보였지만 전반적으로 구조는 좋아 보였다.


출처: redfin.com


다른 집을 방문할 때는 사진도 안 찍고 쓱 둘러보고 나오곤 했는데, 이 집은 마치 집주인이 된 양, 어디에 어떻게 가구를 배치할지 꼼꼼히 따지며 살펴보고 있었다. 리얼터는 나중에 말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내 눈이 몹시 반짝였다고.


그녀는 같은 타운하우스 단지 안에 다른 매물도 있으니, 마저 돌아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 거라고 했다. 같은 단지 내 매물 두세 개를 더 돌아봤으나,


1) 첫 번째 집에서는 어딜 가나 카레 냄새가 났다. 벽에 냄새가 고착화된 것처럼.

2) 두 번째 집은 주방과 거실 사이가 벽으로 막혀 있어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3) 세 번째 집은 마루가 진한 체리색이라, 남은 시간 내에 다 뜯어내고 대공사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같은 타운하우스 내에 있는 매물인데도 구조와 인테리어가 조금씩 달랐다. 맨 처음에 봤던 집이 가장 마음에 들었지만, 혹시나 싶어 주변 오픈하우스를 더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후 보았던 집들은 여러 가지 이유(소음, 주변 교통, 답답한 느낌의 구조)로 고려 대상에서 제외했다.


주중에도 오픈하우스 투어는 계속되었으나, 첫 번째 집 이미지만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나는 이웃 언니, 주희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녀는 평소 주택에 관심이 많았고, 내가 오픈하우스에 혼자 다니기 뻘쭘해할 때 동행해 주기도 했다. 주희는 퇴근 후 동네를 한번 걸어보라고 말했다. 집은 맘에 들었으니 이제 동네도 맘에 드는지 테스트해 보라는 얘기였다.


동네 산책 © 지나쥬르


금요일 저녁, 타운하우스 입구에 주차하고 동네 주민이 된 듯 단지를 천천히 걸어보았다. 타운하우스 곳곳에 심어진 나무와 꽃들,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리는 나뭇잎, 집 사이로 나 있는 아기자기한 오솔길, 조용한 단지에 울려 퍼지는 새소리, 가끔 마주치는 산책자들의 평화로운 표정,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수영장 바로 이곳이구나!


예쁜 나무 한 그루, 햇살에 반짝이는 수영장, 스누피 깃발 © 지나쥬르


다음 날 오전 리얼터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문서를 리뷰해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는 이미 은행에서 ‘융자 사전 승인(pre-approval)’을 받아 오퍼를 넣을 수 있는 상태였다. 리얼터가 셀러 에이전트(seller agent, 집주인이 고용한 리얼터)와 확인해 보니 약 50명이 넘게 다녀갔고 이미 오퍼를 넣은 사람도 있다고 했다.


리얼터와 나는 최종 오퍼를 넣기 전에 ‘디스클로저(Seller's Property Disclosure)*라는 문서를 리뷰하기로 했다. 집을 팔려면 공인된 업체에서 ‘인스펙션(inspection)**이라는 것을 받아야 하는데, ‘디스클로저’는 인스펙션 중 발견된 집의 상태와 결함, 수리할 부분, 집의 역사 등, 셀러가 집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문서이다.


예를 들어 집에 터마이트(termite, 목조 건물을 갉아먹는 흰개미)가 있거나 심하게 금이 간 부분이 있다면 매입자에게 결함을 공개해야 한다. 반대로 좋은 점을 기술할 수도 있다. 이중창으로 창문을 교체했거나, 주방이나 화장실을 리노베이션 했거나, 마루나 카펫을 새것으로 교체했다면, 매입자가 최종 오퍼 금액을 결정할 때 참고할 수 있다. 심지어 집에서 사망 사건이 있었을 때도(살인, 자살 등) 문서에 밝혀야 한다.




문서를 리뷰하기 위해 나는 리얼터의 사무실을 찾았다. 100여 장 짜리 문서였는데, 저녁 6시에 문서 리뷰가 시작되어 10시 정도 끝났다.


리얼터를 너무 신뢰하거나, 시간이 없거나, 영어 문서가 골치 아프다는 이유로 ‘디스클로저'를 검토도 하지 않고 리얼터에게 맡기는 분도 더러 있는데, 꼭 검토 후 최종 오퍼를 넣기를 권한다. 내가 들어가 살 집인데 문서 검토는 기본이 아닌가.


문서를 꼼꼼히 살펴보다 보니, 발코니에 심각한 터마이트가 있었고 주차장 바닥과 마당 바닥에 금이 간 부분(crack)이 군데군데 있었다. 화장실 환풍기 소음도 문제로 언급되어 있었다. 리얼터는 집에 이 정도 문제는 다 있다고 언급했지만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당장 아파트에서 방을 빼야 한다는 압박감에, 잘못된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이삼십 대를 바쳐 모은 돈을 이 집에 투자하는 것이 맞을까?’


시간은 부족했고 의견을 구할 사람은 없었다. 당시 부모님께서는 해외여행 중이셨다. 만일 한국에 계시더라도 미국 부동산에 익숙하지 않으신 부모님께 결정을 맡기는 것도 어불성설일 것이다. 오로지 내 판단력과 촉으로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맘에 드는 집을 두고 망설이는 내게 말했다.


“자기, 예전에 만나던 사람 있었는데 잘 안되었다고 하지 않았어? 이렇게 재고 망설이다 타이밍 놓친 거 아니야?”


학교 선배이기도 한 리얼터는 예전에 내 연애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거부하기도 뭐해서 간단히 대답했는데, 그게 화살이 되어 날아올지는 몰랐다. 이렇게 해서라도 빨리 결정하도록 재촉하는 느낌이 결코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주요 고객층이 500만 달러(한화 65억)를 호가하는 부동산을 소유한 부유층이니, 그에 비하면 액수도 별로 크지 않은 타운하우스 하나로 벌벌 떠는 내가 귀찮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도 엄연히 고객인데, 서류를 리뷰하는 중 지극히 사적인 얘기를 꺼내는 리얼터가 프로페셔널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계속 이 건을 진행해야 할까?




그간 다녀온 오픈하우스 방문 노트를 보며 장단점을 정리해 보았다. 앞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과 지금까지 돌아본 매물을 살펴보았을 때 이 집으로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이미 오퍼를 넣은 바이어가 있기 때문에 다음 날 결정을 내려야 한다. 고 일어나 다음 날 아침 리프레시된 첫 마음으로 최종 오퍼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 지나쥬르 via Midjourney


 알아두면 쓸모 있는 미국 부동산 용어


1. *디스클로저(Seller's Property Disclosure): 인스펙션 중 발견된 집의 상태와 결함, 수리할 사항, 레노베이션 여부, 집의 역사, 과거 사건 등, 셀러가 매매하려는 주택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객관적으로 기술해 잠재 바이어에게 제공하는 문서


2. **인스펙션(Inspection): 집의 상태를 전문가 (인스펙터)와 함께 살펴보는 것. Home, Termite, Radon inspection 등이 포함된다. 셀러가 살고 있는 경우, 물건은 건드리지 않고 집 내/외부 기반(foundation), 지붕, 배수, 전기, 에어컨/히터 등 집을 구성하는 주요 구조물 위주로 검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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