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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쥬르 Jun 29. 2023

10. 미국에 내 집이 생기다니

생애 첫 집 열쇠를 전달받던 날


이사 날까지 일주일이 남아있었다. 행정 절차는 모두 끝났지만 열쇠가 없으니 내 집이 생겼다는 게 백 퍼센트 믿기지 않았다. 선배님께는 미리 이사를 해야 하니 키를 최대한 빨리 전달받았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에스크로로 다운페이 송금을 마치고 나니, 내 명의 부동산이 산타클라라(Santa Clara) 카운티에 등록되었다. 남의 집 얹혀사는 듯했던 미국에 내 집이 생기다니!


내 생애 첫 집 열쇠를 전달받았던 날, 마침 실리콘밸리로 해외 출장 오신 예전 회사 팀장님과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지나, 집주인이 된 거야? 그럼 이제 미국에서 쭉 살겠네.”


팀장님 말씀에 축하하는 마음과 함께 약간의 아쉬움이 섞여있었다. 맥주 한 잔을 기울이며 때론 힘겹고 때론 즐거웠던 옛 직장의 추억을 나누었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직딩의 열정을 불살랐던 회사라 더 애틋한 곳이다. 다가오는 이삿날로 마음이 분주했는데, 특별한 날을 특별한 분과 함께 하며 잠시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열쇠를 받자마자 매일 차로 물건을 조금씩 옮겼다. 깨지기 쉬운 물건, 귀중품, 레고 같은 것을 위주로 먼저 옮기고, 나머지는 홈디포(Home Depot)에서 박스를 구입해 이삿짐을 조금씩 쌌다. 주말에 짐 싸는 걸 도와준 고마운 친구도 있었다.


이삿짐을 얼추 박스에 담아 놓아서 이사는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원래 3시간을 예약했는데 2시간 반도 안 되어 이사가 끝났다. 팁을 얹어 3시간 치를 채워 봉투를 건네주었더니, 아저씨들은 고맙다며 가구와 이사 박스를 재빠르게 원하는 위치에 놓아주고 떠났다.




우선 짐은 웬만큼 옮겼고, 이제 살던 아파트 정리만 남았다. 아파트는 청소업체를 고용해 함께 청소했다. 지난 5년 동안 아파트를 비교적 깨끗하게 써왔으나, 자연적으로 발생한 ‘Wear and Tear(자연 마모)’까지 입주자 잘못인 양, 얄짤 없이 보증금에서 수리비를 제하고 돌려주는 곳이 미국 아파트다. 더 이상 예상치 못한 금액이 나가는 것은 막고 싶었다. 오후 내내 쓸고 닦고 아파트를 나서니 저녁 9시였다.


나의 첫 미국 직장 생활의 대부분을 보낸 아파트였다. 미운 정 고운 정이 쌓인 아파트를 떠나자니 마음이 헛헛했다. 청소하며 사진을 몇 장 남기고, 청소도구를 챙겨 집으로 왔다.


5년 동안 살았던 아파트, 사방이 아파트 건물인 구조라 조금 답답했는데 그나마 창문을 열면 나무가 보여 숨통이 트였다


다음 날 수리공(janitor) 아저씨가 ‘final walk-through(아파트 계약이 끝난 임대자의 방 상태를 점검)’를 하며 아파트 상태를 점검했는데, 주방 카운터 탑에 냄비 자국이 나 있는 걸 발견하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보증금에서 까겠다."라고 했다. 분명 평소에 본 적이 없던 자국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끼니를 회사 카페테리아에서 해결했기 때문에 그 사이즈의 큰 솥이나 냄비를 쓸 일이 없었다. 두 명의 룸메이트 중 한 명이 한 건데, 누가 했는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혹시 범인을 알게 된 들, 그들이 자기 잘못이라고 시인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아저씨께 상황을 말씀드렸다.


“이러저러해서 두 명의 룸메이트와 함께 살았고 그들이 계약을 깨고 먼저 나갔어요. 계약 깰 때마다 제 돈 들여 청소업체 고용한 것도 모자라 이런 것까지 책임이 되는 건 좀 억울하네요…."


내 사연이 조금 안타까웠는지, Yelp에 본인에 대한 좋은 리뷰를 남겨주면 ‘이사 오기 전부터 있었던 자국’으로 표시해 주겠다고 했다. 너무 고마워서 90도 인사를 하고 나왔다.


이제 아파트에 있는 모든 짐이 집에 도착했다. 물건을 제자리로 옮기고 사람 살 만한 공간을 만들 일만 남았다. 곧 있으면 땡스기빙을 맞아 블랙 프라이데이 세일이 있을 테니 필요한 물건은 그때 주문해야겠다 싶었다. 당장 필요한 식기구, 샤워용품, 출근 시 입고 갈 옷만 정리하고 나니 피로감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나머지 박스는 마루 한편에 쌓아 두고 먼지와 발자국 청소만 했다.


일단 상자만 한켠에 쌓아두고 기본적인 청소만 했다. 그래도 무사히 이사를 마쳐 다행 :)




또 한 번의 고비를 넘었다. 졸업 후엔 취직, 취직 후엔 비자와 그린카드, 이직… 이제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파트에서 방을 빼야 하는 상황이 올 줄이야. 역시 이민은 산 넘어 산! 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다. 철저한 계획형 인간인 나는, 집 살 계획만 2~3년 세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룸메이트가 아파트 계약을 깨는 바람에 내 집 마련을 두 달 만에 바쳤으니, 오히려 떡을 싸 들고 찾아가 절할 일이었다.


이사만 하면 바쁜 일은 끝일 거로 생각했지만 마음이 분주했다. 안전장치도 얼른 주문해야 하고, 마무리할 문서도 남았고, 이 많은 박스는 언제 다 정리한담? 하지만 두 달의 빡센 여정을 무사히 마친 나에게 오늘만은 휴식의 시간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오늘은 다리 뻗고 잠에 들기로.


© 지나쥬르 via Mid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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