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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쥬르 Oct 13. 2023

11. 나 홀로 이민으로 30대를 보내다

Adieu, my 30s!


내 집이 생기면 뛸 듯이 기쁘고 가슴이 벅차오를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한없이 차분했다. 부담감으로 마음을 짓누르던 이사까지 마치고 나니 한시름 놓이기도 했다. 침대에 누워 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난 몇 달간의 긴장이 풀려서일까? 몸은 피곤한데 잠이 오질 않았다. 이민 와서 있었던 일들이 한꺼번에 스쳐 지나갔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적당한 삶에 대한 권태가 공존하던 직장인 8년 차, 새로운 터전에서 나를 실험해 보고픈 팜으로 30대 유학길에 올랐다. 늦깎이 유학생을 꼬박꼬박 ‘Unni’라고 부르며 나를 살갑게 대해주었던 대학원 친구들. 비자와 그린카드 문제로 각자의 고군분투가 있었지만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이겨내며 미국에 자리를 잡았다.


시카고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사 오던 날, 나를 공항에서 숙소로 데려다준 택시 운전사 아저씨는 창밖으로 흩뿌리는 비를 보며 캘리포니아 입성을 반겨주었다. “It’s rainy in California! It’s your lucky day!" 내 미래에 행운을 빌어주는 것 같았다.


첫 직장 한국 여직원 사이에서 왕따 당했던 일도 생각난다. 해외에 나오면 한국인끼리 무척 의지하고 도와줄 것 같지만 정반대인 경우도 허다하다. 같은 동포끼리 사기를 치거나 더 심하게 차별하는 경우도 보았다. 나 또한 초중고에서도 당해보지 않은 왕따를, <가십걸>에서나 볼 법한 왕따를 미국 첫 직장에서 처음 겪었다.


점심시간 사무실 중앙에 있던 테이블에 앉으면 한국 여직원들이 자리를 옮겨 앉아 ‘네가 싫다’는 티를 팍팍 내며 텃세를 부리곤 했다. 화장실에서 뒷담화하다 내가 들어가면, 투명 인간 취급하듯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는 걸 볼 때의 당혹감이란. 잘할 거라고 지지해 주는 사람보다 "니깐 게 눈 높은 우리 사장님 기준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아?" 하며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사람이 더 많았다. 다행히 나는 다 큰 어른이었고 눈물이 나진 않았다. 그럴수록 보란 듯이 더 잘하고 싶었다.


미국 상류층 자제로 커온 사장님은 능력자였지만 조금 차가운 분이었다. 그는 내가 가끔 촌스럽다고 했다. 미국 상류층 문화와 미묘한 뉘앙스를 잘 알아채지 못하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그래도 속상하긴 했다. 어쨌든 사장님 덕분에 취직했고 미국에서 경력이란 걸 쌓게 되었으니 감사한 분이다.


백인 인사담당자는 내가 영주권 얘기를 꺼내지 못하게 하려고, 미팅 요청을 할 때마다 매번 비서를 시켜 미팅을 변경하거나 취소하곤 했다. 그녀의 유색인종 차별은 결국 꼬리가 밟혀 징계를 받았다.




사람의 기억은 참 희한하기도 하지. 그동안 좋은 일도 많았는데 내 마음속에 어두운 생각들이 이렇게 많이 고여 있었던 걸까... 미국은 초보 이민자에게 결코 녹록한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짓밟힐수록 더 풍성하게 살아나는 잔디 같은 사람이라는 걸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럴수록 보란 듯이 잘 살고 싶다는 복수심이, 오히려 타지에서 자리 잡는 데 힘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포기의 유혹과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온 나를 그날만큼은 토닥여 주고 싶었다.


대학원 공부를 위해 온 2년이 미국 이민까지 이어질 줄은 나도 몰랐다. 어쩌다 보니 30대를 유학과 이민의 꿈에 바치게 되었다. 졸업 후엔 현지 취업을 해야 했고, 취업 후엔 취업비자와 영주권을 해결해야 했고, 그야말로 산 넘어 산. 그 와중에 있었던 크고 작은 에피소드, 알게 모르게 나를 도와준 고마운 사람들, 외노자에 대한 경멸 어린 시선. 그 시간이 모두 모여 조금은 더 단단하고 유연한 내가 되었으니 그거면 되었다.


편하게 다리 뻗고 누울 수 있는 내 공간이 생겼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해졌다. 좋지 못한 기억들도 모두 안녕. 모두 종이배에 띄워 떠나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집이 생겼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이렇게 달라 보일 수 있다니!


© dnevozhai, 출처 Unsplash


이제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곧 다가올 마흔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은 나 홀로 이민을 해낸 30대의 나를 토닥이는 선물이었고,

40대의 날들을 용기 있게 헤쳐 나가는 터닝포인트가 될 것이다.


1막의 문이 닫히고 2막의 문이 열렸다.

앞으로 펼쳐질 밝은 나날들을 기대하며 깊은 잠에 들었다.


© 지나쥬르 via Mid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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