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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쥬르 Aug 17. 2023

15. 나의 사계절 시계, 재스민 나무

나의 3평 소우주


미국에 온 후 월세 아파트에서만 7년을 살다, 뒷마당이 있는 타운하우스로 이사 오면서 3평짜리 마당이 생겼다. 작은 공간이지만 흙을 만질 수 있고 땅에 무언가를 심을 수 있는 정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게 신기했다. 팬데믹으로 재택근무가 장기화되며 홈오피스를 만들어야 했고, 이왕이면 집도 마당도 더 아름답고 쾌적한 공간으로 가꾸고 싶어졌다.


이사 후 집들이를 하며, 급하게 집을 단장하느라 장미, 튤립 등을 사서 화병에 담아놓았다. 이를 본 한 후배는 집에 꽃이 너무 많으면 촌스럽다고, 화병은 포인트로 한두 개만 놓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 ‘인테리어의 완성은 자고로 초록 식물’이라며 본인의 인테리어 팁을 몇 가지 공유해 주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집이라 가구도 없이 너무 썰렁했는데 바로 이거다 싶었다. 그때부터 실내에서는 식물을, 정원에서는 나무와 꽃 위주로 가드닝을 하기 시작했다.


피트니스센터는 아직 마스크를 쓰고 출입해야 하는 제한이 있던 시기라, 나는 항상 야외에서 할 만한 운동 거리를 찾아다녔다. 때마침 집 주변 산책하기 좋은 코스를 발견했다.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이웃집 정원 구경하는 게 어찌나 재밌던지. 주인의 개성이 드러나는 다양한 생김새의 정원을 둘러보며, ‘나도 언젠가 저런 멋진 정원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사도 이사였지만 팬데믹으로 집콕할 기회가 없었다면 본격적으로 가드닝을 했을까 싶다.


1. 왕초보 가드너, 관개 시스템 만들기 도전


산책길에 마주친 풍경, 동네 정원 구경


마당에 꽃을 심기 전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관개 시스템 설치’였다. 미국 단독주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프링클러를 3평 마당에 설치하는 건 분명 오버일 테고, 이틀에 한 번 자동으로 물 주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한담?


마침, 전 집주인이 설치한 미니 관개 시스템이 잡초 사이에 파묻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Drip Irrigation Kit’이었는데 워낙 뜨문뜨문 설치되어 있어 물이 닿지 않는 곳이 많았다. 당시에는 이걸 뭐라고 부르는지도 몰라 한참 인터넷 검색하다, 결국 사진을 찍어 홈디포(Home Depot) 직원에게 물어봤다. 이렇게 생긴 관개 시스템을 설치하려면 어떤 도구를 사야 하냐고. 홈디포 아저씨 여러 명을 괴롭혀 설치한 미니 관개 시스템은 대략 이런 모습이다.


미니 관개 시스템 (Drip Irrigation Kit) 설치미니 관개 시스템 (Drip Irrigation Kit) 설치


이후 홈디포(Home Depot), 트레이더 조(Trader Joe’s), Costco(코스트코) 등에서 열심히 흙과 비료를 사다 부어 식물이 자랄 만한 기반을 만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마당에 대체 뭘 심어야 할지, 다양한 식물과 꽃은 어디서 사는 건지도 감 못 잡는 문외한이었다. 마침 동문회에서 만든 단톡방에 합류하게 되어 많은 정보를 접하고 식집사 선배로부터 다양한 모종을 받았다.


보통 가드닝을 한다고 하면, 우아하고 여유 있게 가지치기를 하는 정원사를 떠올릴 텐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허리는 항상 70도 이상으로 굽어 있고 손에는 흙, 몸에는 땀, 여름에는 벌과 잡초와의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체코어의 거장, 카렐 차페크가 이를 탁월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잘 가꾸어진 정원을 멀찍이서 훑어만 보던 시절, 나는 정원가란 새소리를 벗 삼아 꽃의 향기를 음미하는 존재, 세상과 거리를 둔 온화한 성품과 시적 감수성을 지닌 존재일 거라 생각했다. [중략] 정원가에게 등뼈란 하등 쓸모가 없으니, 이따금 “아이고, 허리야!” 하며 몸을 일으킬 때 말고 등뼈가 쓰이는 데가 어디 있을까? [중략] 정원가는 아무리 애를 써도 뒤 마려운 사람처럼 어정쩡하게 땅 위에 뜬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다리와 팔은 양옆으로 벌리고 머리는 무릎 사이를 향해 숙인 모습이 꼭 풀을 뜯는 당나귀 같다."

<정원가의 열두 달> by 카렐 차페크, p. 57-58


2. 정원 친구들을 소개합니다


마당 가운데에는 재스민 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고, 오른편에는 키 큰 라일락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 옆에는 포도나무 모종이 자라고 있는데 땅이 좁아서인지 매년 자라다가 만다. 언젠가는 어른 나무가 되길 기다리고 있다.


마당 가운데 재스민 나무, 왼편 포도나무 모종


마당 오른편에는 라일락 나무가 만들어 주는 그늘이 있어, 손님용 의자 두 개와 함께 분홍색과 보라색 버베나(verbena)가 자라는 바구니 화분을 하나 놓아두었다. 볕이 잘 드는 마당 왼편에는, 선명한 자줏빛 선인장 꽃, 분홍색 세이지, 라벤더, 산타 바바라 데이지, 초롱꽃 블루워터폴스 등 햇빛이 많이 필요한 꽃이 자라고 있다. 제라늄과 칼랑코에는 햇빛에 크게 영향받지 않고 씩씩하게 자라길래, 마당 곳곳 빈자리에 심었다.


키 큰 선인장 꽃이 가장 뒤 열을 차지하고 있고, 키 순서대로 나머지 꽃을 심어 나름 층을 만들어 놓았다
왼쪽부터 세이지, 산타바바라 데이지, 초롱꽃 블루워터폴스


마당 문을 열고 나가면, 타운하우스에서 관리하는 뒷마당? 이 나오는데, 매년 여름 이맘때 연보라색의 아가판서스(African Lily)를 심는다. ‘사랑의 편지’, ‘사랑의 소식’이라는 예쁜 꽃말을 지닌 아가판서스는 연보라에 연파랑 색까지 살짝 섞여, 보고만 있어도 시원한 여름 바람을 선사한다.


뒷마당에 핀 아가판서스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 한다.”라는 카렐 차페크의 말처럼 나의 3평짜리 손바닥만 한 정원은 내가 딛고 있는 땅의 무한한 가치와 생명력에 대해 알게 해 주는 소중한 곳이다. 재스민 나무가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걸 보며 ‘나도 이제 미국에 정착해 가는구나’하며 안정감을 느낀다.


3. 나의 사계절 시계, 재스민 나무


3평짜리 정원은 내게 또 다른 우주를 열어주었다. 이곳은 삶의 여백을 만들어 주는 ‘힐링의 공간이다. 몇 주 동안 마당을 돌보지 못해, 가지가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가면 나무와 혼연일체가 된 듯, 내 정신도 사나워진다. 분주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일단 가지치기를 하고 나면 마음이 가뿐해지고 복잡한 마음도 정리된다. 요즘엔 요가하며 손빨래한 요가복과 매트를 마당에서 종종 말린다. 캘리포니아 햇살의 밝은 기운이 매트에 스며들길 바라며. 요가를 좋아하는 내게 가드닝 하는 시간은 '마음의 요가'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가지치기하며 마음의 요가를


정원은 또한 ‘사계절 시계’가 되어주었다. 올해 캘리포니아는 유난히 겨울이 길어지며 4월 초까지도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 작년까지만 해도 5월 초면 재스민 꽃이 피기 시작했는데, 올해는 5월 말이 되어서야 꽃이 피기 시작했다. 개화 시기가 늦춰지는 걸 보며 계절의 변화, 하늘의 기분까지도 알아챈다.


쌍둥이 재스민 나무 이발 Before vs. After


가드닝은 나를 더 부지런하고 세심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아무리 바빠도 가지치기와 잡초 제거를 제때 해줘야 예쁘고 말끔한 정원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날씨가 더워지면 어김없이 목수 벌이 찾아와 처마 밑에 벌집을 짓는데 너무 커지기 전에 제거해 주는 게 좋다. 식물은 말이 없기에 잎이 누레지거나 시들시들하면 원인을 얼른 파악해 돌보아줘야 한다. 가드닝을 하며 식물 관련 책도 자주 찾아보게 되었고 식물 정보 앱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4. 미래의 정원을 꿈꾸다


카렐 차페크는 말했다. 진정한 정원가란 ‘꽃을 가꾸는 사람’이 아니라 ‘흙을 가꾸는 사람’이라고. 가드닝과 플랜테리어에 관심을 가지면서 식물이 잘 자라는데 ‘흙’이 얼마나 중요한 기반인지 알게 되었다. 시간과 체력이 허락한다면 마당의 흙을 다 갈아엎고 비료를 섞은 양질의 흙을 제조해 잔뜩 부어주고 싶다.


정원이 작은 편이라 지금은 꽃 위주로 가꾸고 있지만, 홈디포에서 여는 DIY 워크숍에서 야채 박스를 만들어 상추나 깻잎, 방울토마토 등을 직접 길러 먹는 것이 로망이다. 마당이 조금만 더 컸다면, 오렌지 나무나 레몬 나무도 하나 심어보고 싶다. 한 번은 지인 집에서 방문했다가 다양한 모종이 자라는 미니 온실을 본 적이 있다. 그 공간이 어찌나 멋져 보이던지…!


조금 더 큰 마당이 생긴다면, 미니 온실과 함께 나만의 오두막을 만들어 보고 싶다. 숲 속에 나무집을 짓고 2년 동안 속세와 격리되어 자급자족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처럼 살지는 못해도, 내 마당 작은 오두막에서 책 보고 글 쓰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햇살 아래 그늘 있고 바람이 통하는 공간이라면 충분할 것이다.




오늘도 식탁에서 이 글을 쓰며 그린그린한 생명이 싹트는 나의 소우주, 나의 3평짜리 정원을 바라본다.

언젠가 텃밭 채소와 과일을 키우며 자급자족하는 날을 꿈꾸며,

오늘 하루도 멋지게 살아갈 동력을 찾는다.


나의 정원사 아바타 - 미래의 정원을 보여줘  © 지나쥬르 via Mid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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