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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쥬르 Jul 13. 2023

14. 이슬만 먹고살지 않습니다

벌과의 전쟁


어느 날 집 앞 계단을 올라가는데, 현관문 바로 옆벽에 길면서도 통통한 똥 모양의 무엇인가가 붙어있었다. ‘발려져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해괴한 모양이 찜찜했지만 가까이 가고 싶진 않았다.'도대체 어떤 자식이 남의 현관문에 이런 짓을…' 하면서 집에 들어왔다. 그렇게 한 달을 그냥 놓아두었다.


얼마 후 지인이 집에 놀러 왔다. 벽에 붙은 그것을 보여주면서 어떤 나쁜 놈이 이렇게 해놓고 갔다고 했더니, “지나씨, 이거 벌집 아니에요?”라고 물었다. 


“에이… 거기 꽃도 없는데 벌집이 왜 생겨요? 그리고 벌집이 이렇게 똥 모양처럼 생겼나요…?”라며 강력히 부인했지만, 벌집이 아니냐고 했던 지인 말이 자꾸 생각나 마음이 더 찜찜해졌다.


그다음 날 점심 무렵, 어디선가 전기 장치가 잘못되었을 때 나는 ‘찌직… 윙~’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전장치 키패드에서 나오는 소리인가 싶어 귀를 갖다 댔는데, 키패드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 이번엔 문짝에 귀를 바짝 댔다. ‘지직… 쓰쓰… 윙~’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나무 벽을 타고 전해졌다. 뭔가 싶어 문을 확 열어젖혔더니, 순간 어마어마하게 큰 벌이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벌집이 맞았구나!!”


가슴이 쿵쾅쿵쾅 나대기 시작했다. 타운하우스 관리소에 전화해 벌집을 제거해 줄 수 있냐고 문의했더니 지금은 시스템이 다운되어서 일 처리가 힘들다고 했다. 그게 벌집인 걸 안 이상, 도저히 문을 열고 나갈 수 없었다. ‘어마어마한 벌 떼가 나를 공격해 오면 어떡하지…’ 모를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들락거렸는데 말이다.


© 지나쥬르 via Midjourney


나는 옆집 아주머니께 문자를 보내, “곧 벌집을 제거할 건데, 혹시 벌떼가 공격하면 옆에서 물 뿌리는 것만 좀 도와줄 수 있으세요?” 하며 SOS를 요청했다. 그녀는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했다. 나는 양봉꾼 복장으로 무장을 하고 나가 수도꼭지에 100피트짜리 호스를 연결했다. 벌 스프레이도 세 통이나 챙겼다. 대대적인 벌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데 옆집 아주머니가 나오셨다. 반팔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양봉 패션으로 유별나게 중무장하고 나간 내 모습이 좀 민망했다.


“무서우면 내가 벌약을 뿌려줄까? 혹시 벌집에서 벌이 나오면 네가 물 뿌려주면 되고…”


다행히 벌집 안에는 벌이 없는 상태였다. 아주머니가 1차로 벌약을 뿌리며 벌이 없다는 걸 확인해 주셨고, 내가 2차로 스프레이를 잔뜩 뿌린 후, 신발 주걱으로 벌집을 세게 내리쳤다. 얼마나 견고했는지 수십 번을 내려쳐야 조금씩 파편이 떨어져 나갔다. 떨어져 나간 조각들은 모두 흙이었다. 내 현관문 옆에 똥을 바른 그 나쁜 자식의 정체는 바로 흙으로 벌집을 짓는 땅벌(Wasp)이었던 것이다.


“너무 감사해요, 아주머니. 나머지 정리는 제가 할게요.”


아주머니는 내가 벌집 덩어리 두 개를 떨어뜨리는 걸 확인하고 들어가셨다. 흙탕물로 도배가 된 현관문을 강한 물줄기로 한참 씻어내고, 벽에 굳어진 흙도 박박 긁어내고 나서야 현장 정리를 마쳤다.


왼쪽/가운데 사진: 하필이면 현관문 열자마자 바로 옆에 벌집을 지었다. 무서워서 벌집 제거 후 사진 찍음 / 오른쪽(pixabay): 왜 벌집을 똥이라고 착각했는지 이해하실 겁니다


하지만 그다음 날에도 현관문 밖에서 ‘웽~’ 하는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분명 벌집을 없앴는데 이상했다. ‘설마 자기 집을 없앴다고 나에게 복수하러 온 건 아니겠지?’ 현관문을 여는 순간 수많은 벌 떼가 나를 덮칠 상상을 하니 끔찍했다. 타운하우스 관리소에 다시 전화했다. 다행히 이제 시스템이 복구되어 벌집 퇴치반(Pest control)을 보내줄 수 있다고 했다. 다음 날 파견 나온 아저씨는 내게 벌집이 대체 어디 있냐고 물어봤다. 양봉인 복장을 한 건 아니었지만, 적절한 무장을 하고 큰 가스통을 들고 있었다.


“마냥 기다릴 수 없어서 일단 없앴는데요…”


아저씨는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근데 벌이 자꾸 찾아와요. 그래서 연락한 거예요.”


아저씨는 약을 뿌릴 테니 반나절 동안은 현관문을 열지 말고 나오지도 말라고 했다. 얼마나 지독한 약이길래… 가스통 약 효과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땅벌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집의 외부에 문제가 생기면 그나마 다행이다. 웬만한 문제는 타운하우스 관리소에 연락하면 업체를 보내주니까. 문제는 집 내부에 벌집이나 병충해가 생겼을 때이다.


지난봄엔 거실 문 열자마자 보이는 처마 바로 밑에 벌집이 생겨 애를 먹었다. 그걸 겨우 없애고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마당에 나가보니 또 웽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벌집은 없었다. 근원지를 알 수 없는 웽웽 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알고 보니, 내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장소에 전략적으로 벌집을 지은 것이었다. 거실 구석의 창문 블라인드를 제쳤더니, 그제야 처마 반대편에 지은 벌집이 보였다.


벌집 하나는 처마 끝에, 또 하나는 처마 반대편에 하나씩 야무지게도 만들었다


이번엔 땅벌(Wasp)이 아니라 나무에 집을 짓는 목수벌(Capenter bee)이었다. 첨엔 무섭기도 하고 잘 몰라서 그냥 놓아두었지만, 주변의 조언을 구해보니 계속 놔두면 나무로 된 집을 뚫고 들어올 수 있다고 했다. 가끔 뉴스를 보면 미국 가정집 내부에서 어마어마한 벌집이 발견된다고 하는데 그게 거짓말이 아니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돌아오는 말.


언니: “한국은 119에 전화하면 제거해 주는데, 미국은 그런 거 없니?”

엄마: “세금도 그렇게 많이 내는데 소방서에서 그런 것도 안 해주니…? “


와~ 정말 살기 좋은 나라, 한국이구나! 불친절한 미쿡씨에게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 각자도생이 정답이다. 또 한 번 무장을 했다. 벌집 윗옷 수트와 장갑은 아마존에서 구입했고, 운동 바지도 몇 겹 껴입고, 수면양말을 신었다. 정수리나 눈에 쏘일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 모자에,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착용.


벌과의 전쟁을 위한 중무장 양봉 패션


3단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벌집을 향해 세차게 벌 스프레이를 뿌렸다. 분사되는 거품을 알아채고 재빠르게 도망가는 벌도 있었고, 미처 피하지 못하고 밑으로 툭툭 떨어지는 벌도 있었다. 목수 벌집은 오래 놔두면 안 되지만, 결국 살생이 아니고 무엇인가. 언제는 3평짜리 마당이 생겨 좋아라 했으면서, 자연 속에 집을 지은 벌을 무참히 살생하는 인간이 되었구나


벌집을 퇴치한 날엔 악몽을 꾼다. 악몽에 시달리지 않더라도 며칠 동안 이상하게 몸이 나른하고 힘이 없다. 남의 소중한 보금자리를 없앤 대가를 치르는 게 아닌가 싶었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제발 다신 벌이 찾아오지 않길 바라던 그즈음, 박완서 작가님의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읽게 되었다. 작가님이 마당이 있는 집에 살며 벌집을 퇴치했던 에피소드가 나온다.


"나는 그 2센티 정도 되는 연결 고리를 겨냥하고 계속해서 강한 물줄기를 뿜어 올리면서 정수리가 화끈거릴 정도의 적의를 느꼈다. 말벌, 그 하찮은 것들이 만든 줄이 그렇게 질길 줄이야. 그 줄 하나로 진저리가 쳐지게 악착같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나의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무분별한 적의는 공포감일 수도 있었다."

"내 집에서 말벌을 발본색원했다고 생각했다. 조금도 개운하지 않은 기분 나쁜 승리감으로 나는 한동안 어깨로 숨을 쉬며 허덕댔다. 내 인간 승리는 이렇듯 비참하고 초라했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다 지나간다, p. 103-105>


매일 대자연의 수혜를 입으며 자연친화적인 삶이 좋다 하면서, 결국 자연과 백 퍼센트 공존해 살기는 힘든 게 인간인가 보다. 부끄러웠다. 동시에 나만 이런 죄책감에 시달린 건 아니었구나 하며 위로도 받았다.




내가 싱글이라, 딸린 가족 없이 자유롭게 사는 게 부럽다는 지인들이 있다. 내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이슬만 먹고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일하고, 운동하고, 취미에 빠진 모습뿐일 테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시간을 자유롭게 가용할 수 있고 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비혼의 삶에 감사하다. 하지만 결혼을 했든 안 했든, 모든 삶의 방식에는 장단점이 있고 책임이 따른다. 특히 벌과의 전쟁을 치르는 이맘때, 나는 무수리가 된다. 이슬만 먹고사는 삶은 결코 아니다.


올해도 벌들이 찾아오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아직 마당은 조용하다.

벌들아 미안… 이 동네에 나무도 많은데 제발 다른 곳에 집 지으면 안 될까?

이 평화가 지속되길 바라본다.


마당의 평화가 지속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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