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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쥬르 Aug 31. 2023

16. 캘리포니아 식집사의 그린그린한 일상

집 안의 초록 친구들


배우 정해인이 나오는 드라마 <반의반>을 본 적이 있는가? 주인공 하원(정해인)의 사촌 누나, 식물을 사랑하는 가드너, 순호(이하나)의 옆에는 항상 식물이 있다. 유칼립투스와 대화를 나누고, 몬스테라 잎사귀를 손수건으로 곱게 닦아주고, 농장에서 화분과 흙을 옮기다 철퍼덕 넘어지기도 하는 드라마 속 순호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메인 스토리는 하원/지수/채원의 사랑 이야기인데, 나에게는 순호라는 캐릭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지구 반대편 k-드라마 덕후이자 초보 식집사의 로망에 불을 붙였다.


드라마 <반의반>, 식물을 사랑하는 가드너 문순호 (이하나)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드라마고, 나는 현실판 롤 모델을 찾아 나섰다. 미국의 동화 작가이자 30만 평 대지에 천상의 화원을 가꾸며 꽃, 식물, 동물과 함께 동화 같은 삶을 살았던 타샤 튜더(Tasha Tudor) 할머니. 그녀가 남긴 책과 다큐를 보며 어디서 살든,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꿈꾸었다. 내게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주어져 더 이상 직장을 다닐 필요가 없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매일 글 쓰고, 식물을 키우고, 요가 수련을 하며 인생을 즐기고 싶다고 할 것이다.



1. 팬데믹, 그린이 열풍과 플랜테리어


팬데믹이 시작하며 그린이 열풍이 불었다. #그린이 #플랜테리어 #식집사 #홈파밍 #귀농 등이 팬데믹 이후 최대 키워드가 되었다. 초록 식물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지금 살고 있는 타운하우스로의 ‘이사’였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집이 너무 썰렁해 얼른 뭔가를 채워 아늑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가구 고르기에 무척 신중한 내게 ‘플렌테리어’는 가성비 좋고 고민이 덜한 인테리어로 더할 나위 없었다.


이사 초반, 나는 홈디포 (Home Depot), 트레이더 조 (Trader Joe's), 로컬 식물 샵 (Leafy, The Preserve) 등 식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이라면 모조리 휩쓸며 돌아다녔다. 이 식물 숍들은 나의 새로운 참새방앗간이 되었다.


2년 동안 조금씩 사 모은 식물 친구들로 집은 점점 초록 정글이 되어간다. 화분 개수만 세어보아도 얼추 30개가 넘는 것 같다. 비교적 키우기 쉬운 금전수, 산세베리아, 스킨답서스부터 몬스테라, 필레아 페페, 스파티필룸, 알로카시아 등 다양한 식물이 자라고 있다. 필레아 페페는 동글동글한 잎이 예쁘고, 알로카시아는 개구리 왕눈이가 쓰고 다니는 우산 같은 모양이라 너무 귀엽다.


왼쪽: 필레아 페페, 가운데, 오른쪽: 알로카시아 밤비노


2. 식물 키우기도 엄연한 노동이다


말 없는 식물들은 온몸으로 자신의 니즈를 표현한다. 축 늘어져 있다가도 물을 주면 몇 시간 있다가 빳빳하게 이파리를 세우며 살아난다. 그린이 친구들 덕분에 분주한 일상 속에 여백을 만들어간다.


삶의 여유를 선물하는 그린이들


쉬울 거라 예상했던 식물 키우기는 생각보다 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물 줄 때가 되지 않았는지 화분 밑바닥은 어떤지 수분 미터기(moisture meter)를 넣어 항상 살펴줘야 한다. 잎사귀가 너무 많아지면 가지치기도 제때 해주어야 하고, 어느 순간 뿌리가 너무 많이 자라 화분이 작다 싶으면 부지런히 분갈이해 숨 쉴 틈을 마련해 줘야 한다. 날이 따뜻해지면 날파리가 생긴다. 날파리 퇴치 작전 차 식초 물을 곳곳에 배치하고 날파리 없애는 기계를 사기도 했다.



3. 타지 생활, 나만의 안전 공간 만들기


타지 생활을 하며 자신만의 안전 공간을 찾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대학원 때 살던 에반스톤 (Evanston, 시카고 근처의 도시)의 3층 아파트는 겨울엔 너무 춥고 여름엔 지붕의 햇볕이 바로 내려와 찜통기가 되었다. 당연히 에어컨은 없었고 천장에 아주 천천히 돌아가는 고물 선풍기가 붙어있었다. 2층에 살던 학부생들은 어찌나 파티를 해대는지, 파티 음악으로 집이 들썩거려 주말에는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취업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왔고, 지금의 단층집에 이사 오기 전까지는 쭉 아파트에 살았다. 캘리포니아의 아파트/집들은 지진대에 있다는 이유로 모두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윗집 사람이 조심하지 않고 걷기라도 하면 천둥소리가 난다. 게다가 창문을 열면 온갖 생활 소음이 다 들려와 항상 문을 닫고 지냈다, 이곳 단층집으로 오게 된 건 신의 한 수였다.


월세 아파트의 ‘내 집인 듯 아닌 듯’한 어정쩡함에 신분에 대한 불안감이 더해져 좀처럼 안정감을 찾기 어려웠다. 비자는 언제 나올지, 아파트 월세는 얼마나 오를지, 내 연봉은 생활비를 지탱할 만큼 오를지, 아파트 계약이 끝나면 어디로 이사 가야 하고 또 어떤 룸메이트를 만나게 될지에 대한 불확실함. 하나의 산을 넘고 나면 더 큰 산이 나타나는 끝없는 챌린지의 굴레는 아무리 무쇠 같은 마음을 가진 자도 지치게 한다.


삶의 질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가 바로 '주거'다. 작은 평수라도 상관없다. 책상과 침대가 들어가고,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소음이 적고 안전한 공간이면 된다. 마음에 드는 그린이들을 입양해 화분을 몇 개만 놓아두어도 나만의 멋진 공간이 완성된다. 능률도 오르고 잠도 잘 오고 하루하루가 더 행복해질 것이다.


플랜테리어, 식물은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처음부터 타지에서 집을 마련할 수 있는 이민자가 얼마나 될까. 돈도 돈이지만 영주권 취득까지 최소 3~5년이 소요되니 말이다. 나 또한 신분 문제가 불안했을 때는 그 어떤 결정도 할 수 없었다. 많은 초보 이민자가 그러하듯, 월세 아파트에서 시작하더라도 언젠가 내 집을 마련할 수 있게 열심히 저축해 두자.


4. 초록이 주는 위로, 나눔이 주는 기쁨


식물은 고요한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무언의 식물은 당신의 예민한 귀도 존중해 줄 것이다. 식물이 가져다주는 또 다른 기쁨은 바로 ‘식물 나눔’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식물은 그저 조용히 자라며 삶의 매 순간을 응원해 줄 것이다. 말이 없기에 무엇이 더 필요한지 덜 필요한지, 세심히 살펴주어야 한다.


재스민 나무는 가지치기한 대로, 스킨답서스는 가지치기 및 수경재배로, 필레아 페페는 새로 난 아기 뿌리를 옮겨 심어 지인에게 선물했다. 식물을 선물 받은 사람들의 ‘뜻밖이라는 표정’과 함께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보면 나도 덩달아 행복해진다.


식물 나눔을 위한 가지치기


92세까지 미국 버몬트주 산골에서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며 살았던 타샤 튜더 할머니는 그녀의 삶과 철학을 담은 다큐 영화 <타샤 튜더>에서 말씀하셨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바쁘게 살아요. 그래서 놓치는 게 많죠.

사람들이 행복의 비결이 뭐나고 물어요.

저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자신의 삶을 살라고 답하죠. [중략]

꽃, 수련, 석양, 구름 모든 것들이 자연 안에 모두 있어요.

인생은 너무 짧아요. 즐겨야죠. 그렇지 않나요?"

- 다큐 영화 <타샤 튜더> 중




내게도 조금 더 큰 정원을 가꾸며 살 수 있는 날이 올까?

마음이 한가로운 토요일 아침,

초록 친구들 이름표를 만들며 미래의 정원을 그려본다.


그린이 이름표 만들기 - 나의 이름을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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