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리모델링
나의 제1 과제 ‘안전공간’ 꾸미기 완료 후, 착수한 것은 '가라지 페인팅'이었다. 미국 가라지는 정말이지 날 것 그 자체였다. 가라지 4면이 얇은 종이로 발려 마무리되어 있었고, 히터 파이프라인을 감싸는 스펀지는 변색되고 먼지 쌓인 채 노출되어 있었다.
리얼터 선배는 미국 가라지가 원래 이렇게 생겼다 하시는데,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집을 팔면서 어쩜 이런 상태로 가라지를 내버려 둘 수 있을까?! 내가 까다로운 건지 미국 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 의문스러웠다. 모든 것을 깔끔하게 포장해 파는 것이 디폴트 값인 한국 문화에 익숙해서였을까?
크롤 스페이스(crawl space)도 말도 못 하게 지저분했다. '크롤 스페이스'는 미국 타운하우스나 싱글하우스 밑에 있는 약 1~1.5m 높이의 공간인데, 보통 큰 박스나 자주 쓰지 않는 물건을 보관해 두는 창고로 많이 활용한다.
처음으로 장만한 집에서 두 번째로 착수한 프로젝트가 ‘집안 인테리어’가 아닌 ‘가라지 페인팅’ 프로젝트라는 게 웃펐지만, 주차하며 매일 드나드는 공간을 폐허처럼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1. 셀프 가라지 페인팅
일을 마치고 나면 바로 가라지로 내려가 작업을 한두 시간, 길 때는 두세 시간 이어 나갔다. 벽만 쳐다보며 페인팅을 하고 있자면 무상무념, 마치 면벽 수행을 하는 것 같았다. 하루 스트레스를 가라지 페인팅으로 날렸다. 하지만 면벽 수행도 하루 이틀이지, 벽 보고 색칠하는 게 점점 무료해졌다. 유튜브를 노동요 삼아 듣기 시작했다. 켈리 최, 김미경, 김창옥, 드로우앤드류, 이연 등 수많은 동기부여, 자기 계발 전문가와 크리에이터를 접하게 된 것도 바로 이때였다.
매일 정한 구역을 페인팅하고 들어와 일상을 이어 나갔다. 저녁 시간마다 한두 시간 페인팅 작업을 해 한 달 반 만에 그럴싸한 가라지가 탄생했다. 마지막으로 천장에 페인트칠할 때는 목과 어깨가 아파 정말 고역이었는데, 흰색으로 단장된 가라지를 보니 너무나 뿌듯했다.
2. 히터 파이프라인 작업
가라지 페인팅은 끝냈으니, 이제 가라지에 '히터 파이프라인' 작업에 착수! 우선 먼지를 털어내고 은박 테이프를 구매해 파이프라인을 감쌌다. 크롤 스페이스 히터 파이프라인은 청소를 하다 하다 오랫동안 쌓인 쥐똥이 너무 많아 포기했다. 어차피 눈에 보이는 곳은 아니니까 패스.
"그렇게 험한 작업을 왜 혼자 다 했냐, 그냥 업체를 쓰는 게 효율적이지 않았을까?"라며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도 계셨다. 나라고 조사를 안 해봤을까? 가라지 페인팅도 크롤 스페이스 청소도 모두 가격을 알아보았지만, 기본 가격이 3천 불(350만 원)부터 시작이었다. 미국 인건비는 비싸다. 셀프로 할 수 있는 작업이라면 내 한 몸 희생해 조금 고생하는 편이 낫다.
가라지 페인팅과 히터 파이프라인을 감싸는 데 쓰는 재료는 Benjamin-Moore, Sherwin-Williams, Home Depot 등에서 주로 구입했다. 다행히 이전 집주인이 실내에 쓴 페인트 통을 두고 가, 어렵지 않게 같은 페인트 색을 찾을 수 있었다. Sherwinn-Williams 숍에 예쁘고 모던한 느낌의 페인트 색이 가장 많았고, 샘플도 플라스틱 우유 통 같은 용기에 담겨있어 사용감이 편했다. 여러 페인트 숍을 기웃거리며 검색하고, 직접 칠해보는 과정을 거쳐 내가 원하는 브랜드와 색상을 찾을 수 있었다.
3. 크롤 스페이스(crawl space) 청소
두 달간 가라지 페인팅과 히터 파이프라인 커버 작업을 완료한 후, 미루고 미뤘던 크롤 스페이스 청소에 착수했다. 먼지를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우주복(painter’s coverall), 마스크와 안경을 착용하고 진공청소기로 그곳을 밀었다. 워낙 오래된 집이라 먼지 한 톨 없이 정리할 수는 없었지만, 창고로 쓰기에는 손색이 없을 정도로 청소했다.
먼지와 쥐똥을 치운 후 Home Depot에서 대형 스티로폼 판을 구입해 크롤 스페이스 곳곳에 깔았다. 비록 잘 안 쓰는 물건을 놓는 공간이지만, 땅바닥에 내 물건을 놓고 싶지는 않았다. 스티로폼 판을 깔고 난 후, 이사 박스와 자주 안 쓰는 물건, 여행 가방 등을 차곡차곡 넣었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인지 몸이 뽀사질 것 같았다. 폐허 같았던 가라지와 크롤 스페이스가 먼지 걱정 없이 드나들 수 있을 만한 공간으로 변신시키고 나니 어찌나 뿌듯하던지. 작업을 마친 후 침대와 혼연일체가 되어 주말을 보냈다.
이제 다음 타깃은 실내다!!
원래는 손님방을 렌트할 룸메이트를 구할 요량이었다. 워낙 룸메이트와 오래 살아 누군가와 공간을 공유함에 두려움이 없었고, 월세 수익을 모아 빨리 모기지를 갚고 싶다는 야무진 계획도 있었다. 게다가 룸메이트가 괜찮은 친구라면 서로 배우며 재밌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손님방(guest bedroom)은 안방(master bedroom)에 비해 조금 작았지만, 옷장도 있고, 아름드리나무가 보이는 뷰에 화장실도 따로 붙어있어, 꽤 강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진을 몇 장 찍어 Craigslist 포함 구인 웹사이트에 룸메이트 공고를 올렸다. 약 20명에게 연락이 왔고 그중 8명이 집에 다녀갔다.
하지만 룸메이트 구하기는 만만치 않았다. 성격도 너무 좋고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의사 소견을 받을 정도로 코골이가 심하다든지, 집에서 잠만 잔다며 작은방도 괜찮다 했는데, 알고 보니 남자분! 이질 않나, 어떤 분은 스프레이 페인팅이 취미라 마당에서 작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다양한 이유로 룸메이트 구하기 프로젝트는 무산되었다. 돈을 아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많이 벌고 투자할 생각을 하는 게 현명하다고들 하지 않는가? 더 이상 룸메이트 구인으로 고민하지 말고 생산성을 올려 더 많이 벌 궁리를 하자는 결론에 다다랐다.
4. 홈오피스 꾸리기, 페르소나별 공간 분리
마침 회사에서는 추후 공지가 있을 때까지 모두 재택근무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임시로 세팅한 안방 책상에서 일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만의 공간의 가지게 된 건 마치 ‘노아의 방주’ 같았다. 끔찍한 소음으로 시달리던 그 아파트에 남아있었다면, 과연 제대로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을까?
룸메이트 구인 계획이 엎어지고 나니 손님방 공간이 다시 보였다. 안방에 있는 책상을 손님방으로 옮기고, 컴퓨터 모니터와 책장을 세팅하니, 일하는 공간이 그럴싸하게 연출되었다. 몇 년째 미련퉁이처럼 끌어안고 있던, 대학원 시절을 함께 한 책상 위에는 식물들을 놓았다. 오! 이제 제법 홈오피스 느낌이 나는데? 새로 꾸민 공간은 대략 이런 모습이다.
팬데믹 이후 정체성 혼란(identity crisis)이 잠시 찾아왔다. 코로나로 잘 나가던 회사들마저 휘청했고, 주변에서 정리해고되는 사람들을 보며, 이 시대에 내 직업은 과연 지속 가능할까? 하는 고민도 많이 했다. 나도 새로운 산업에 뛰어들어 부캐(페르소나)를 키우고 수익을 창출해야 하나 싶어, 무리다 싶을 정도로 시간을 쪼개 SNS를 키우고, 온라인 강의를 하는데 집중한 적도 있었다.
결국 룸메이트 구인 실패?! 를 계기로, 나는 페르소나별로 공간을 만들게 되었다. 1) 안방은 휴식의 공간, 2) 손님방은 홈오피스, 본업의 공간 3) 거실 + 마당은 작가, 정원사의 부캐를 성장시키는 공간. 이렇게 페르소나 별로 공간을 구분하고 나니, 생활이 조금 수월해졌다. 그 공간에 있을 때만큼은 그곳에 부여한 페르소나에 충실하면 되니까.
실내 인테리어는 아직 진행 중이다. 새로운 식물과 가구, 소품이 들어보고, 오래된 물건은 정리하며 조금씩 내가 꿈꾸던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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