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땡아, 많이 기다렸지? 이모가 너무 미안해……”
조카 픽업이 15분이나 늦어졌다. 피아노 학원 입구 의자에 앉아있던 땡땡이는 조그만 입을 삐죽거렸다. 원래는 호동그란 눈이 거꾸로 세모가 된 걸로 봐서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미안한 마음에 피아노 학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간식을 사주겠다고 했다.
하필 그날이 은행 일을 몰아 보는 날이었다. 미국에서 온라인으로 처리할 수 없는 은행 일을 모아두었다가, 날 잡아 한꺼번에 처리하곤 했다. 1시간 15분이 넘게 지났는데도, 대기인원 7명은 그대로였고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결국은 아까운 번호표를 버리고 피아노 학원으로 달려갔다. 이유가 어쨌든 지각한 이모가 잘못한 거지. 약속한 대로 온갖 군것질거리를 파는 무인 상점 ‘아이스몬’에 들렀다.
“이모, 나 여기 잠깐 구경만 할게요.”
“구경만 하지 말고 골라 봐. 땡땡이 좋아하는 거 이모가 다 사 줄게!”
“그래도 돼요? 헤헤……”
조카는 눈을 반짝이며 매대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 냉장고도 살피고, 아이셔, 킨더조이, 닭다리 등 본인의 최애 과자를 한 번씩 살피더니, 뭘 골라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녀석 여러 개 골라도 된다고 했는데 참 촘촘하게도 살피네…
“땡땡아, 여러 개 골라도 돼!”
단돈 몇천 원으로 15분이나 늦은 죄책감을 덜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땡땡이는 여러 과자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더니 결국 아이셔 상자 하나만 집어 들었다. 청사과맛, 소다맛 중, 청사과맛을 골랐다.
“땡땡이 그거 하나 갖고 되겠어?”
“응!”
대답이 꽤 단단하다. 우리는 가게에서 나와 뽀득뽀득 눈길을 걸었다.
“땡땡아, 이모가 미안해서 여러 개 사주고 싶었는데, 왜 하나만 골랐어?”
“나는 이거 하나만 있으면 돼. 아이셔랑 셀카만 있으면 돼!”
아이셔 상자를 꼭 붙들고 조카가 말했다. 땡땡이는 미국 이모가 하루에도 수십 장의 사진을 찍어대는 이유를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매번 언니가 차려준 아침 밥상 사진을 찍는 나에게, 땡땡이는 장난스러운 눈을 하고 물었다.
“이모는 왜 이렇게 사진을 많이 찍어?”
“이모는……”
내가 대답하려고 하니까 언니가 거들어 주었다.
“이모는 겨울에만 한국에 잠깐 나오잖아. 땡땡이랑 가족들이랑 좋은 추억 남기고 싶으니까 그런 거지.”
스쳐 지나간 그 대화를 기억한 거다. 감동이었다.
“그럼, 아이셔 산 기념으로 땡땡이랑 셀카 찍어볼까? 어디서 찍을까?”
“웅, 우리 미용실 앞에서 찍자!”
“하나둘 셋! 치즈~~”
왼손에는 아이셔를 꼭 붙잡고, 오른손으로는 V자를 만들어 보이며 눈을 찡긋한다. 내 핸드폰에는 조카가 어릴 때부터 윙크하며 찍은 사진이 백 장은 족히 된다. 아파트 단지 계단을 오르며 땡땡이는 아이셔를 꺼내 나에게 하나를 주고 자기도 입에 하나 쏙 넣었다.
“아주아주 시니까 천천해 먹어야 해요. 옴총 실 수 있어서, 내가 미리 알려주는 거예요.”
“땡땡아, 이모도 알아. 이모 신 거 엄청 좋아해. 이모도 어릴 때 아이셔 많이 먹었어. 레모나도 좋아하고!”
“이모랑 나랑 취향이 똑같네!”
취향? 순간 귀를 의심했다. 녀석이 취향이라는 말을 어떻게 알았지? 내가 8살 때는 써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했던 단어였던 것 같은데…… 땡땡이는 폭풍 성장 중이다. 하긴 신 것을 좋아하는 입맛도 취향이라면 취향이지. 녀석의 단어 선택에 놀라고, 아이셔 하나에 귀요미 조카와 취향이 같다는 말을 듣다니 왠지 우쭐해졌다.
“취향? 우와, 땡땡아!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취향, 뭔가 좋아하는 거잖아요. 나도 알아~!”
나는 순간 조카가 언어 천재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진짜 엄마라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이모가 이러는 건 좀 주책 같았다.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네가 어리다고 과소평가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언제까지나 꼬물꼬물 아가일 줄 알았던 조카는 이제 초등학생이 되었고, 방과 후 수업도 하고, 피아노도 배우고, 미술 학원에도 다닌다. 몇 년 전만 해도 깐따삐야 외계어로 소통하던 녀석이 이제 혼자서 동화책도 곧잘 읽는다. 어릴 적 내가 좋아하던 ‘아기공룡 둘리’도 보고 ‘남극탐험’ 게임도 곧잘 한다.
지난겨울 한국 방문은 좀 특별했다. 언니와 공동육아를 한 것이다. 풀타임으로 일하고 있는 언니는 겨울방학 전까지 내게 조카 픽업과 케어를 부탁했다. 평소에는 어머니, 아버지가 번갈아 가시며 조카를 전담해 주셨지만, 내가 전담으로 케어하면 빙판길에 번거롭게 왔다 갔다 하실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조카 선물로 트렁크 가득 채워오는 조카바보 이모가 그 부탁을 거절할 리가!
한국에 머무는 동안 조카와의 군것질 산책은 계속되었다. 방과 후 땡땡이를 픽업해 피아노 학원에 데려다주고, 수업이 끝나면 픽업하는 것이 2주간 나의 루틴이었다. 하루는 학원이 끝나고 무인 마트에서 딸기 마카롱을 사달라고 했다. 내게 카드를 받더니, 본인이 카드 주인이 된 양 당당하게 그걸 판매기 구멍에 집어넣는다. 그 모습이 너무 재밌고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푸흡 웃음이 나오는 걸 참았다.
그렇게 하원 길 군것질 탐험을 하며 조카의 취향을 발견해 나갔다. 어릴 때부터 언니가 경제 교육을 제대로 한 것일까? 여러 개 사도 된다고 몇 번을 얘기해도 조카는 항상 딱 하나만 고른다. 또 어찌나 오래오래 아껴 먹던지.
출국일 전날이었다. 이날은 땡땡이를 데리고 장을 보러 마트에 들렀다가 ‘보석반지’를 샀다. 보석반지 사탕을 순식간에 먹어버린 이모를 보면서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몽, 보석반지 어디 갔어?”
“이모가 아그작아그작 다 먹어버렸지~”
땡땡이는 깔깔깔 웃는다. 아직 이모의 어설픈 유머에 웃는 순수천국 8살이다.
“이몽, 이리 와 봐요.”
땡땡이가 속삭이듯 말한다. 뭔가 엄청난 비밀을 말할 기세다. 자기 엄마가 옆에 있으니 내게 귓속말을 하며 반쯤 남은 보석반지를 보여준다.
“내일… 내일 이모가 비행기 탈 때까지 이게 남아있으면, 이모를 아주아주 많이 사랑하는 거예요.”
“근데 땡땡이가 다 먹어버렸으면?”
녀석은 잠시 망설이더니 말한다.
“그럼…… 이모를 아쥬 마니마니 좋아하는 거예요!”
녀석, 안 사랑한다고 말하기엔 미안했나 보다. 1년 후엔 또 얼마나 커 있을까. 땡땡이의 손을 꼭 잡았다. 내 손으로 앙 물면 쏙 들어가는 작고 말랑말랑 빵손을.
조카와의 군것질 탐험으로 쓴 돈은 3만 원도 채 안 될 것이다. 단돈 8백 원 아이셔에 신맛을 사랑하는 우리의 공통분모를 발견했다. 녀석이 딸기 마카롱과 보석반지 딸기맛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땡땡이는 나를 어릴 적 군것질의 세계로 초대해 주었다. 작은 것도 아껴 먹는 너의 모습에, 언니와 함께했던 떡볶이 데이트의 추억도 떠올랐다. 무엇보다 조그마한 네 빵손을 잡고 걸었던 모든 발걸음이 소중했던 시간이었다. 너의 영롱한 세계를 글로 오래오래 담아두고 싶다. 3만 원이 우리에게 선물한 달달한 겨울을.
p.s. 작년 겨울에 조카와 있었던 에피소드가 기억나 블로그에 담아봅니다. 오늘은 11월 24일, 미국은 땡스기빙이네요. 저는 한국 갈 채비로 조금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 행복한 땡스기빙 연휴,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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