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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책방 May 04. 2024

학교폭력의 방관자

인간실격, 아무것도 되지 못한 나의 이야기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했던 환경에서도 나는 정서적 결핍 없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이만큼 인생을 살아보니, 자신이 사는 동네에 임대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거나 자신의 자녀들이 불우한 환경의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으면 하는 부모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살던 동네가 빈민촌이었기 때문에 불우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통계적으로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비행을 저지르게 될 확률이 더 높은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 근처에는 대단지의 영구임대아파트가 있었고 꽤 많은 학생들이 그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아침이면 그 아파트에 살고 있는 같은 반 친구들이 등굣길에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한 사람을 목격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고, 반에는 자퇴를 한 후 복학한 학생들이 2-3명씩은 꼭 있었다. 매 학년 때마다 나는 반에서 이루어지는 학교폭력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는데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곤 했다. 학생들 뿐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매우 거칠었는데 체벌을 할 때면 종아리나 손바닥, 엉덩이 등의 특정부위를 정해두고 체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거나 주먹질을 하기도 했고 아이들이 바닥에 쓰러지면 슬리퍼를 신은 발로 아이들을 사정없이 밟아댔다. 선생님들의 언행 또한 매우 거칠었는데 학생들에게 거친 욕설을 하는 것은 예사였고 남자 선생님들이 여학생들의 몸을 훑어보며 성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으며 내 친구는 남자 과학선생님께 고백 비슷한 것을 받기도 했었다. 그 당시 소위 ‘일진’이라고 불리는 친구들은 1학년부터 3학년 선배들까지 연계되어 무리를 지어 다니며 온갖 악행을 저질렀는데 임신한 여자 선생님께서 수업시간에 엎드려 잠을 자던 남자 복학생을 흔들어 깨웠다가 복학생에게 발길질을 당했던 사건도 있었다. 이 정도이니 학교에서 일어났을 학교폭력의 수위가 어떠했을지는 대략 예상이 될 것이다. ‘일진’의 무리에 속하는 학생들이 한 반에 2-3명 정도 있었는데 그들에게 많은 학생들이 학교폭력의 피해를 당했다. 불행이었는지, 다행이었는지 나는 중학교 3년 동안 잔병치레를 하느라 학교에 결석하는 일이 잦았고 깡마른 몸으로 매일 비실대던 나는 그들에게는 흥미가 떨어지는 대상이었던 탓에 학교폭력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극심한 학교 폭력을 수시로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으로 트라우마를 남기기에 충분했다. 그 당시에는 학교 급식이 없었던 때라 어머니께서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소위 ‘일진’이라고 불리는 아이들은 점심시간에 도시락이 없이 숟가락만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같은 반 아이들의 도시락을 뺏어 먹었다. 그들은 다른 아이들의 도시락을 뺏어 먹으면서도 죄책감 따윈 없었고 밥이 좀 질거나 된 것을 먹게 되거나 반찬이 맛이 없으면 타박을 하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일진의 무리 중에서도 매우 악랄한 아이와 같은 반이 되었는데 그 친구는 수시로 반 아이들을 사정없이 폭행했다. 남녀공학이었기 때문에 같은 반에는 남학생들도 있었는데 남학생들도 그 악랄한 여학생이 다른 여학생에게 무차별적인 폭행을 저지르는 것을 목격하고도 말리지 않았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3학년까지 연계된 그 무리의 형들에게 피해를 당할까 두려웠던 것이었다. 한 번은 왜소한 여자 반장 아이가 폭행을 말렸다가 발로 심하게 걷어차여 몸이 붕뜬채로 날아가 교실 구석에 나가떨어졌던 적도 있었다. 내가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니었음에도 그때의 일이 나에게 심한 트라우마로 남은 것은, 그 당시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가 일진들의 주타깃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진이었던 그 아이는 보통키의 마른 체형이었던 데 반해, 내 친구는 키가 크고 덩치도 컸기 때문에 1:1로 붙으면 당연히 내 친구가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역시나 그 친구를 잘못 건드렸다가 그 무리의 3학년 언니, 오빠들까지 우르르 몰려와 보복을 당하게 되는 일이 있을까 봐 내 친구는 억울한 학교폭력을 수시로 당하면서도 대항을 하지 못했다. 아직까지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그날은 우리 반 여학생들과 다른 반 여학생들의 발야구 시합이 있던 날이었다. 체육시간을 앞두고 아이들이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는데 일진인 그 아이가 갑자기 교탁 앞에 서더니 “야! 오늘 발야구 우리가 무조건 이겨야 한다. 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라는 말을 하면서 반 아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보통은 경기가 시작되면 반 아이들 모두에게 공을 찰 기회가 골고루 주어지는데 그날은 무조건 우리가 승리를 해야만 했기에 평소 운동신경이 좋았던 몇몇의 아이들만 돌아가면서 공을 차게 되었다. 나와 단짝인 그 친구도 그중 하나였는데 한 번의 발야구 시합에 5번 이상 공을 찼던 것 같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날의 시합에서 우리 반은 패하게 되었고 경기가 끝나자마자 일진인 그 아이는 이번 경기에 출전했던 친구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했다. 내 친구도 호명을 당해 그 아이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쉬는 시간이라 복도에는 각 반에서 나온 아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그 정신없는 틈에 내 친구가 따라가던 길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었다. 일진인 그 아이는 따라간 아이들을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뺨을 한 대씩 후려쳤는데 내 친구가 보이지 않자 자신의 말을 거역하고 따라오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는 반으로 돌아와서 내 친구를 사정없이 폭행을 하기 시작했다. 친구의 안경은 교실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고 친구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쉬는 시간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면서 폭행이 멈췄는데 일진인 그 아이는 바닥에 떨어진 내 친구의 안경을 주워 닦은 후 친구에게 건네주면서 악마같이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한테 이르지 마라. 알지?”  




최근에 학교폭력을 다룬 드라마 ‘돼지의 왕’을 보게 되었는데 학교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성인이 되어 가해자들에게 복수를 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드라마를 보는 내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괴로운 마음이 들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학교폭력을 목격했던 당시의 가해자들은 대부분 불우한 가정의 아이들이었고 성적도 나빴을 뿐만 아니라 소년원을 들락거린 이력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성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에서는 낙오자가 되어 그야말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몰락했다. 오히려 피해자들이 사회에서는 강자가 되어서 딱히 복수를 하지 않아도 그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통쾌했는데, 드라마가 더 슬펐던 건 가해자들이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녀들이라 어른들의 권력까지 등에 업은 가해자들을 보면서 피해자들이 한없이 가엾게 느껴졌고 성인이 된 가해자들이 여전히 사회에서도 우위에 있는 현실이 더 아프게 느껴졌다. 요즘의 학교폭력 양상이 이와 비슷하리라. 누군가 블로그를 통해 이 드라마의 리뷰를 작성한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리뷰의 마지막 문장에는 “가해자들에게, 그리고 그저 방관하였던 많은 이들에게 이 드라마가 저주로 내려지기를”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이 문장은 내 마음에 비수로 꽂혔다. 그때 나는 무얼 하고 있었던 것일까? 왜 넋 놓고 친구가 폭행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던 것인지. 혹시 내 맘 속 깊은 곳에 피해자가 내가 아님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 죄책감이 아직까지도 무겁게 나를 짓누르는 탓에 그때의 그 일은 아직까지도 내 기억 속에 진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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