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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책방 May 04. 2024

빈민촌 아이

인간실격, 아무것도 되지 못한 나의 이야기

나는 놀랍게도 내가 빈민촌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서른을 훌쩍 넘긴 후에서야 알게 되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스무 살을 넘긴 성인이 되어서까지 한 동네에서 지내면서도 그 동네가 빈민촌이라는 사실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서른이 넘어서는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는데 그 당시 교제를 하던 남자친구가 운영하던 사업장이 내가 어린 시절 살던 그 동네에 있었다. 남자친구는 분양받아놓은 아파트에 입주를 하기 전 임시 거처로 자신의 사업장과 가까운 그 동네의 빌라에 잠시 거주를 하고 있었는데, 그가 혀를 내두르며 그 동네를 빈민촌이라고 칭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내가 살던 동네가 빈민촌이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내가 그곳에 속해서 익숙해져 있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내가 그 동네를 벗어나고 한참이 지난 후에 그 동네에 가보게 되었을 때 우습게도 나는, 왜 그동안 이곳이 빈민촌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눈앞에 펼쳐진 그곳의 광경은 누가 봐도 허름한 빈민촌이었다. 빌라사는 거지라는 뜻의 ‘빌거지’라는 신조어가 요즘 초등학생들이 만들어 낸 말이라는 기사를 보고 많이 놀랐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고 보면 나의 어린 시절은 확실히 요즘 아이들에 비해 많이 순수했던 것 같다. 나는 작은 빌라에 살았고, 지하에 살던 때도 있었다. 지하에 살았을 때는 창문 앞을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매연 냄새에 불편함을 느낀 적은 있었지만, 지하에 산다는 이유로 주눅이 들거나 위축된 적은 없었다.  친구들 중에는 나처럼 빌라에 사는 친구도 있었고 아파트에 사는 친구도 있었지만 그 시절에는 좋은 아파트에 산다고 해서 부자고 빌라에 산다고 해서 가난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고 아예 그런 개념조차 없었던 것 같다. 지금에서야, ‘아.. 그 친구는 꽤 잘 살았던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할 뿐이다. 요즘 초등학생들이 아파트 브랜드와 평수, 부모님의 소득까지 따져가며 신조어를 만들고 사람을 구분 짓는다는 기사글을 볼 때면 씁쓸한 마음이 든다. 그래도 내 인생을 돌이켜 봤을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빈민촌에 살던 그때가 아닐까 싶다. 헌신적이고 모성애가 강한 어머니와 민주적인 아버지 밑에서 나는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맞벌이를 하셨는데 갑작스럽게 비가 오는 날이면 다른 친구들은 방과 후에 어머니가 정문 앞에서 우산을 들고 마중 나와 계셨지만 나는 비를 맞으며 집에 가야만 했고, 집에 도착했을 때 반겨주는 사람이 없이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좀 아쉬웠고 부모님이 언젠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경미한 불안감이 있었지만, 방과 후에는 거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것이 정서적 결핍으로까지 이어지진 않았던 것 같다. 어느 날은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방에 있는 공주 침대를 보고는 집에 와서 침대가 갖고 싶다고 부모님께 얘기를 했더니 바로 그날에 침대를 사주셨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면 경제적으로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음에도 부모님은 자식이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해주려고 노력을 하셨고, 그랬기에 어린 시절에는 딱히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봐도 나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받은 복이 있다면 단 한 가지, 너무나 착한 부모님을 만났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매우 희생적이고 헌신적이었으며 자상한 아버지는 어머니와 자식들에게 애정표현을 많이 하셨고, 전혀 권위적이지 않으셨으며 자식들을 친구처럼 대해주셨다. 어쩌다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올 때면 부모님과 내가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는 많이 신기해하고 부러워했다. 그 때문이었는지 친구들은 우리 부모님이 집에 계실 때에도 스스럼없이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것을 좋아했고, 한번 우리 집에 놀러 오면 저녁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우리 부모님과 함께 식사도 하고 대화를 나누다가 돌아가기 일쑤였다. 아버지는 결혼기념일이나 어머니 생일에는 어머니가 다니는 직장으로 꽃을 보내고 어려서부터 지금까지도 화이트데이가 되면 항상 사탕을 선물하고 이벤트 하기를 좋아하는 로맨티시스트였다. 특히 나를 무척이나 예뻐하셨는데 나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셔서 다른 가족들이 아버지를 나의 하인이라고 칭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시멘트회사에 다니셨는데 고된 직장 일에도 잠을 자던 중에 혹여나 내가 자다가 이불을 차내 던지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매일같이 새벽이면 피곤한 몸을 간신히 일으켜 내 방에 와서 이불을 덮어주고 가셨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어느 부잣집 부럽지 않게 온 집안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고, 케이크와 각종 음식이 긴 상에 한상 가득 차려졌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다’라는 말은 보통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집안에서 풍요롭게 자란 아이들을 칭하는 말 같지만, 꼭 부잣집 자녀들만 온실 속 화초로 자랄 수 있는 건 아니다. 가난한 집안의 자녀들도 충분히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랄 수 있다. 나 또한 남이 봤을 때는 빈민촌 아이 었을지언정 그야말로 온실 속 화초처럼 사랑을 듬뿍 받으며 정서적 결핍 없이 자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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