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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책방 May 07. 2024

나의 아버지

인간실격, 아무것도 되지 못한 나의 이야기


지금은 많이 변해버린, 나의 아버지는 한없이 자상하고 착한 분이셨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대부분 가정의 아버지들은 집안에서 말수가 적고 권위적인 분들이 많으셨지만 우리 아버지는 늘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우리 집의 저녁 식사시간은 늘 하루의 일상을 나누는 화목한 시간이었고 아버지는 늘 가족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어머니와 의견 충돌이 있을 때에는 무조건적인 양보를 하는 분이셨다. 나는 어린 시절에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아빠”라고 대답했다.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각별했다. 이웃집 어른께서는 나와 아버지를 두고 “전생에 연인 관계였나 보다”라는 말씀을 하실 정도였고, 친척들과 나의 친구들도 각별한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늘 부러워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는 집안에서 내 심부름꾼을 자처했는데 아무리 몸이 지치고 피곤한 상황에서도 내가 먹고 싶은 간식이 있거나 필요한 게 있을 때면 바로 나가서 사다 주셨고 내가 성인이 되어서는 스타킹이나 여성용품까지 아버지가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바람에 동네 슈퍼 아주머니께 핀잔을 들은 일도 있었다. 각별한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신기해하던 친구들은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내가 제정신으로 살 수 있을지를 걱정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음악과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하시는 섬세한 감수성을 가졌고, 든든한 집안의 기둥 같은 느낌보다는 집안에서 서열 꼴찌를 자처하는 여리고 착한 분이셨다. 아버지는 어릴 적 사고로 인해 다리가 불편하셨고 외관상 다리를 절거나 하지는 않으셨지만 조금만 걸음을 걸어도 늘 다리에 통증을 호소하셨고 그로 인해 장애등급까지 받으셨다. 다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늘 건강이 좋지 못하셨는데 육체적 건강이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친 탓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가족들에게 자상한 것과는 별개로 세상일에는 늘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계셨고 유약한 성격 때문에 살면서 발생할 수 있는 세상의 자극에 쉽게 무너지고 상처를 받으셨다. 아버지는 작은 키에 왜소한 체격 때문이었는지 타인의 사소한 행동과 말 한마디에도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 오해하는 일이 많았고 늘 자격지심과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 대한민국의 아버지상이라 함은, 과묵하고 권위적이지만 힘든 일이 있어도 가족들에게 내색을 하지 않고 강한 생활력을 가진 성향을 가진 분들이었는데 우리 아버지는 약한 체력과 나약한 성격 탓에 항상 직장 생활을 버거워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는 힘든 일들이나 좋지 못한 건강으로 인해 힘든 마음을 늘 가족들에게 표현하셨고 아프다는 말을 달고 사셨다. 특히 아버지는 가장 좋아하는 나를 벗 삼아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실 때가 많았는데 어린 나에게 질병으로 인한 통증 때문에 죽고 싶을 때가 많다는 말씀을 종종 하시기도 하셨다. 이렇듯 몸도 마음도 유약한 아버지로 인해 어머니가 집안의 기둥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고 여성스러웠던 어머니는 점점 당차고 대장부 같은 스타일로 변해갔다. 어느 정도의 근심거리가 있었지만 늘 자상하고 배려심이 많은 아버지와 생활력이 강하고 희생적인 어머니로 인해 우리 가족은 큰 불화 없이 평화롭게 지내왔는데 이런 우리 가정이, 나의 아버지가 완전히 무너지게 된 사건이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97년, IMF로 인해 많은 회사들이 정리해고를 감행했다. 직장에서 나이가 많은 축에 속했던 아버지는 자신의 부서에서 한 명이 정리해고가 될 거라는 얘기를 듣고는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사실은 정리해고 대상자는 아버지 부서에서 업무능력이 현저히 낮았던 아버지와 동년배의 직원분이 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걱정을 사서 하시는 아버지 성격 탓에 혹시나 자신이 정리해고 대상자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셨고 그때 마침 작은아버지께서 자신이 소장으로 있는 건설현장으로 와서 일을 하면 높은 급여를 챙겨주겠다고 제안을 해오는 바람에 아버지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하지만 작은 아버지를 믿고 들어간 건설 현장의 일은 너무 고되기도 했거니와 작은 아버지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시며 약속했던 급여를 주지 않았고, 항의하는 우리 아버지한테 되려 높은 급여를 요구한다며 “도둑놈 심보”라며 막말을 했다. 내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처음으로 승용차를 구입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작은 아버지께서는 새 차를 뽑은 아버지에게 질투가 났던 모양인지 우리 집에 와서는 “형이 차를 사서 내가 배알이 꼴린다” 는 말씀을 하셨고 어린 나는 작은아버지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마도 작은 아버지는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던 아버지가 새 차까지 구입을 하니 배가 많이 아팠던 모양이다. 형제끼리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성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작은 아버지 회사에서도 그만두게 되면서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고, 이 일은 우리 집안의 비극의 시발점이 되었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인해 우리 집은 큰 경제적 위기를 맞게 되었고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던 아버지는 택시운전사로 잠깐 근무를 했지만 예민하고 섬세한 성격의 아버지에게는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해야 하는 운전일이 맞지 않았고 얼마 못 가 심각한 두통과 이상증세를 호소하며 택시기사마저도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아버지는 두통약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극심한 두통과 걸음을 걸을 때면 땅이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며 이상증세를 호소했는데 원인을 찾기 위해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결국은 정신과에서 신경쇠약 진단을 받고 안정제등을 복용한 후에야 증상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동생에 대한 심한 배신감과 갑자기 실업자가 되면서 처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하셨던 모양이었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더 쇠약해졌고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려웠던 상황에 우리 집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는데, 한참을 고심 끝에 결국 어머니의 결단으로 부모님께서는 빚을 내어 작은 철물점을 차리게 되었다. 부모님께서 함께 철물점을 운영하면서 하루 종일 붙어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남부럽지 않은 잉꼬부부였던 부모님은 잦은 마찰로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고 늘 건강 문제로 아프다는 말을 달고 살며 이런저런 걱정으로 노심초사하며 불안해하는 아버지에게 이력이 나셨던 어머니는 생활력이 약하고 강인하지 못한 아버지를 항상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자영업을 한다는 것은 고정적인 급여가 없다는 것이므로 늘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궁핍한 생활이 이어졌다. 장사가 안될 때면 아버지는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셨고, 경제적 어려움은 부모님의 관계를 점점 더 악화시켰다. 이미 난 정서적으로 성숙이 된 성인이었지만 부모님의 불화를 겪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잦은 부모님의 불화에 나는 정서적으로 피폐해져 갔다. 차라리 부모님께서 이혼을 하시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분할을 할만한 재산이 없었기에 이혼도 어려웠다. 이미 성숙한 성인인 나도 이토록 괴로운데 어린 시절에 가정의 불화를 겪는 아이들은 얼마나 정서적으로 불안할지. 현재도 많은 부부들이 잦은 불화에도 가정을 지키는 것이 자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겪은 바로는 절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부모님의 잦은 불화를 경험하는 자녀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겪기 때문에 화목하게 살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이혼을 하고 한부모 밑에서 자녀를 키우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작은 일에도 쉽게 무너지고 상처를 받는 여린 아버지는 불안정한 생활과 계속되는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인한 탓인지 육체적, 정신적 건강이 더 악화되어 갔고 복용하는 정신과 약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타인과의 마찰을 극도로 꺼려하셨기 때문에 어머니와의 마찰에서도 대차게 맞서질 못했고, 몇 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어머니의 일방적인 잔소리로 끝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마 꾹꾹 담아둔 마음속 말이 태산을 이루었으리라. 그렇게 아버지는 정신과약에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나를 벗 삼아 힘들 때면 나에게 의지를 하고 싶어 하셨지만,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고충을 들어줄 여력이 없었다. ‘가난한 부모는 물려줄 재산이 없는 부모가 아니라 물려줄 정신세계가 없는 부모다’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이런저런 비관적인 말을 쏟아내며 신세한탄을 하는 아버지 탓에 어느새 나 또한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식에게 자신의 정신적 괴로움을 토로하는 강인하지 못한 아버지가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까지도 나에게 정서적으로 의지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비난과 한탄을 나한테 쏟아내었는데 그렇게 십수 년을 지내다 보니 나는 정신적으로 너무 피폐해졌고 마음속에는 분노만이 가득 차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부모님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마저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 않으려 하자 아버지는 점점 더 괴로워하셨고, 그렇게 정신과 약물의 중독자가 되어갔다. 어느 날은 아버지께서 갑작스러운 위장출혈로 인해 중환자실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입원기간 동안 이런저런 검사를 위해 복용하던 정신과 약을 잠시 중단해야 했는데 그때 아버지에게 나타났던 금단증상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20대 때 어떤 영화에선가,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 감옥에 가서까지도 금단증상에  괴로워하며 철장을 두 손으로 붙잡고 흔들며 약을 달라고 소리치던 장면을 본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금단증상을 호소하던 모습이 그 영화에서 봤던 장면과 매우 흡사했고 그것이 나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정신과약의 부작용 때문인지 아버지는 성격이 날로 변해갔고 점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날이 많아졌는데 딸바보였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가족을 포함한 다른 사람의 일에는 무감각한 반응을 보이며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런 모습의 아버지를 볼 때면 한 번씩 분노와 원망이 치밀어 올랐고 그 분노를 터트릴 때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아버지한테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아버지는 무섭게 달려드는 나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그렇게 아버지한테 분노를 쏟아내고 돌아설 때면 나는 밀려드는 후회에 몇 시간을 가슴을 치며 통곡을 했다. 아버지의 이상행동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그럴수록 아버지와 가족 간의 관계는 점점 더 틀어져갔다. 그런 와중에도 워낙 천성이 착한 아버지는 가족들이 아버지의 행동을 지적하거나 핀잔을 주면 바로 사과를 하며 미안해했다. 가족들이 윽박이라도 지를 때면 아이가 어른한테 잘못을 빌 듯이 다신 그러지 않겠다고 미안하다며 빌다시피 했다. 남이라면 실컷 미워하기라도 할 텐데 이런 아버지를 향한 나의 마음은 사랑과 분노가 얽혀 복잡해졌고 미칠 듯한 괴로움을 느꼈다. 아버지는 고립되어 갔고 여린 아버지는 늘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했다. 마치 애정결핍이 있는 어린아이마냥 가족들의 사랑에 늘 목말라했는데, 사회생활을 하느라 눈코뜰 새 없이 정신없이 살고 있는 자식들에게 자신의 심정을 담은 장문의 문자폭탄을 수시로 남기기도 하며 애정을 갈구했다.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화목했던 옛 시절을 늘 그리워했고 빈민촌의 낡은 빌라 지하방에서 살던 그 시절을 종종 말씀하시며 마치 다시 그 집으로 이사를 가면 그때의 행복이 다시 올 것 같은 생각이 드셨는지 아파트가 싫다며 다시 그 빌라로 이사를 가자는 소리를 자주 하셨다. 장기간 복용한 우울증 약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기억력마저 흐릿해져 가던 아버지는 결국 초기의 치매 진단을 받게 되셨다. 늘 사는 게 귀찮고 고단하다며 빨리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던 아버지. 치매에 걸려 죽기는 싫다며 차라리 심장병으로 생을 마감하겠다고 복용하던 심장약을 단약 하신 나의 아버지.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했던가. 오랜 기간 동안 아버지로 인해 정신적 고통을 받았지만 나는 항상 믿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의 본모습은 변해버린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어린 시절 내 심부름꾼을 자처하던, 잠을 자다가도 피곤한 몸을 간신히 이끌고 일어나 내 이불을 덮어주고 가던 모습이 우리 아버지의 본모습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변해버린 아버지를 냉정하고 싸늘하게 대하며 매몰차게 무시해 버리기도 했다. 아주 오래전 아버지가 나한테 했던 말이 아직까지도 가슴에 남아있다. “○○야. 난 가끔 네가 하는 말에 상처를 많이 받아”

딸인 나에게 이 말을 어찌나 조심스럽게 하던지. 여리고 착하기만 한 나의 아버지에게 이 세상은 매우 자극적이었을 것이다. 사회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 살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상황들. 그 모든 것들이 아버지에겐 자극이 되어 아버지를 전형적인 방어형 인간으로 살아가게 했을 것이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상처들을 받으며 그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을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에게 듣는 가시 같은 말에 얼마나 무너지셨을지. 착하디 착한 나의 아빠.

“아빠, 난 여전히 아빠를 너무 사랑해. 그리고 너무 미안해. 난 그동안 아빠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줬어. 나를 용서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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