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골책방 May 12. 2024

미생

인견실격, 아무것도 되지 못한 나의 이야기


중학교 시절에는 잔병치레를 하느라 학교에 결석을 하는 날이 많았다.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건강이 많이 호전되긴 했지만 타고난 허약체질 탓이었는지 나는 늘 무기력했고 공부에도 별 흥미를 가지지 못했다. 공부시간에는 수업을 듣지 않고 하루종일 공상에 빠져 지냈었고 대학 진학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당연히 성적도 좋지 못했는데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으셨고 잠깐이라도 내가 책상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일라치면 오히려 얼른 잠을 자라고 재촉하셨다. 허약체질인 나에게 부모님은 오로지 건강하게만 자라줄 것을 바라시는 듯했다. 그림 그리는 것에 소질이 있어서 미술대회에서 여러 번 상장을 받기도 했고 미술을 계속하고 싶어 했지만 집안의 경제적인 여건상 포기해야만 했다. 공부를 잘하지 못했더라도 굳이 대학을 가려했다면 성적에 맞춰서 어느 대학에라도 입학을 했을 것이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더라도 내가 원한다면 대출이라도 받아서 대학에 보내주셨을 부모님이지만 대학 진학에 별 관심이 없던 나는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서 대학진학은 하지 않겠다고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다. 한없이 좋은 부모님이셨지만 먹고살기에 바쁜 상황이었기에 대학에 진학을 하지 않는 것이 자녀의 장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으셨을 테고 자식의 앞날에 장애가 될만한 상황을 제거하고 갈 길을 닦아주는 요즘의 부모님 같은 노련함은 없으셨기에 부모님은 내 의견을 존중해 대학진학은 하지 않게 되었다. 경제적 궁핍으로 인한 부모님의 마찰은 계속되었고 집안의 경제적 상황과 강한 자립심이 맞물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부모님께 생활비를 포함한 어떤 경제적 지원도 받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립적으로 생활을 해나갔는데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였다. 내가 사는 동네가 빈민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서른이 훌쩍 넘어서였지만, 가난이 얼마나 뼈저리게 서럽고 아픈 것인지 알게 돼 것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나중에는 2금융권에 파견직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는데, 취업을 하고 보니 모든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위해서는 대학진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 나는 그제야 직장에서 가깝게 다닐 수 있는 야간 전문대학에 진학을 하여 회사생활과 학교생활을 병행했다. 그렇게 2년을 지낸 후에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새로운 직장을 찾아 구직활동에 나섰고 강남에 있는 외국계 금융회사에 면접을 보게 되었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나였지만 실무자를 채용하는 것이기에 영어실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에 면접을 보게 되었는데 회사는 현대적이고 감각 있는 빌딩들이 많은 화려한 강남 거리 한복판의 유명빌딩에 위치하고 있었다. 빌딩에 들어서자마자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귀에는 무전기를 착용하고 있는 보안요원들이 왔다 갔다 했는데 그야말로 드라마에서나 보던 광경이었다. 면접을 보고 나와서는 빌딩을 올려다보며 꼭 그곳에 합격이 되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곧 나는 꿈에 그리던 직장에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세상이 전쟁터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외국계 기업답게 대부분의 직원들은 화려한 스펙을 자랑했다. 고학력은 물론이고 유학파 출신에 화려한 집안 배경을 가진 직원들이 대다수였다. 처음 내가 일하게 될 부서에 갔을 때 분주하게 업무를 하는 직원들 틈에 우두커니 앉아서 내가 소개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빈 책상 위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다들 자신의 업무를 분주히 하고 있었기에 전화를 받을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을 직감하는 순간 누군가가 “거기. 전화 좀 받아주세요!”라고 나에게 말했다. 얼떨결에 전화를 받자마자 상대방 음성이 영어로 들려왔다.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도 없었고 내가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만 전화를 끊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당황한 채로 앉아있던 중에 잠시 틈을 타 부서의 관리자가 직원들에게 나를 소개했고 그때부터 나는 업무를 하나씩 배워나가며 실무에 투입되었다. 회사는 수입자동차를 구입하는 사람들에게 할부나 리스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외국계 금융회사로 나는 견적부터 자금집행이 되기까지의 실무를 맡게 되었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다행히 업무 습득은 빨랐고 그렇게 일주일 정도 지나자 나는 다른 직원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의 업무 능력을 갖추게 되었고 주어진 업무를 빠르게 소화해 나갔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전체회의가 열렸는데 회의는 영어로 진행되었다. 회의를 하는 도중에 몇몇 사람들이 손을 들기도 하고 박수를 치며 웃기도 했는데 나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전체회의를 마치고 나니 위축이 되었다. 나는 이곳에 있을 자격이 되지 못하는 직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또 다른 곳으로의 이직을 고민하면서 지내던 중에 하나, 둘씩 영어를 못하는 직원들이 신입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체회의가 있을 때면 영어에 능숙하지 못한 직원들을 위해 통역이 진행되었다. 나를 포함한 영어를 못하는 직원들의 공통점은 저스펙의 나와 비슷한 학력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가장 업무강도가 센 실무를 담당하는 직원들이었다. 한 가지 다행이었던 점은, 외국계 회사이다 보니 국내기업에 비해 학력을 중시하는 경향이 심하지 않았다. 누구든 업무능력이 인정된다면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었고 승진도 할 수 있었다. 이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저스펙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소처럼’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었다. 왕복 4시간의 출퇴근거리에 한 달에 보름 이상을 밤 10시가 넘도록 근무를 했다. 월말에는 다음날 새벽까지 근무를 하고 퇴근했다. 근무 중에는 물을 마시는 것은커녕 화장실을 갈 틈조차 없어서 소변을 참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화려한 출신의 배경을 가진 직원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보잘것없던 나는 때로는 은근한 무시를 하는 시선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고 살아남기 위해 여러 겹으로 나를 무장하고 늘 긴장상태로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업무능력을 인정받지 않고는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일을 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그야말로 일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삶이었다. 성격은 점점 날카롭게 변해 갔고 어느새 나는 여전사가 되어있었다. 업무를 하거나 사람을 대하는 등의 모든 일에 있어서 전투적이었다. 파견직으로 입사를 했던 나는 계약직을 거쳐 정규직이 되었고 어느덧 승진을 앞두고 있었지만 과다한 업무에 수시로 심장이 두근거렸고 체력은 점점 고갈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개인적인 감정이 스며들 틈도 없이 정신없이 일에 집중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기 때문에 슬픔을 느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책상에는 처리해야 할 서류가 잔뜩 쌓여있었고 전화벨은 쉴 새 없이 울렸으며 컴퓨터 타자를 치느라 손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눈물을 훔칠 겨를조차 없었다.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며 정신없이 업무를 진행해 나갔지만 눈에선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티슈를 뽑아 눈물을 훔치고 나서 업무를 계속 이어 나갔는데 나와 같은 업무를 하고 있던 동료 직원과 순간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직원은 나와 똑같은 상황을 겪고 있었다. 그녀 또한  쉴 새 없이 업무를 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너무나도 똑같은 상황에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이미 승진 축하파티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과감히 직장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더 이상은 버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동안 매일 밤늦게까지 함께 야근을 하며 정이 들어버린 동료들을 매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퇴직을 앞두고 많이 울기도 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나는 한동안 휴식 기간을 가진 후에 새로운 직장을 찾기 위해 다시 구직활동에 나섰고 국내 중견기업에 계약직으로 입사를 하게 되었다. 내가 맡은 업무는 전 직장에서 했던 업무와 동일한 업무로 경력을 인정받아 입사를 했지만 내가 가진 스펙으로는 정규직 사원이 될 수 없었다. 새로운 회사는 국내 기업답게 학력을 굉장히 중시했는데 내가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서 업무능력을 인정받는다 하더라도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 따윈 없었다. 매년 4년제 대학 졸업자들을 대상으로 공개채용이 진행되었는데 갓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 직원들이 나보다 직위가 높았다. 명절이 되면 직원들에게 명절 선물을 나눠줬는데 정규직 직원에게는 고급햄 세트가 주어졌고 계약직 직원에게는 김을 선물로 주었다. 외국계 회사의 경우 업무는 수직적이더라도 관계는 수평적이었다면 새로 입사한 국내회사는 상하관계가 엄격한 수직관계에 있었다. 자유분방한 외국계 회사에 다녔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들이 많이 벌어졌고 심한 문화 충격을 받았던 일들이 많았는데 그곳의 군대식 조직 문화가 아직까지 생생하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공채로 입사한 남자 신입 직원들은 아침마다 선배 직원들이 출근을 하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90도로 허리를 굽히고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한 직원을 붙잡고 물어보니 위에서 그런 지시가 있었단다. 연말이 다가오면  연말행사를 앞두고 팀마다 장기자랑을 준비했는데 그 해는 각 팀의 신규직원들이 장기자랑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미 서른이 넘은 나이에 경력직으로 입사를 했는데 나도 신규직원에 해당하기 때문에 예외는 아니란다. 인천에서 강남까지 왕복 출퇴근 시간만 4시간이 걸리는데 업무가 끝나면 걸그룹 춤 연습을 하고 퇴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참여하기 힘들 것 같은 의사를 내비치자 인사팀 직원이 조용히 나를 따로 불렀다. 경력직으로 입사하신 분께 죄송하긴 하지만 참여하셔야 한다는 말이었다. 내가 체력적으로 참여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불평을 하자 인사 담당자의 표정이 곧 싸늘하게 바뀌었고 인사평가에 반영이 될 것이라는 협박을 했다. 그렇게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장기자랑에 참여해야만 했다. 한 번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공채로 들어온 남자 직원이 각 부서의 신입직원과 관리자들이 모인 신입직원 환영회 회식자리에서 잠깐 휴대폰 문자를 확인했다는 이유로 당장 나가라는 고함과 함께 회식자리에서 쫓겨 나는 일이 있었다. 그날 회식자리에서 쫓겨난 직원이 밤새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을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인데 그 직원을 쫓아냈던 상급자는 다음날 아침 그 직원을 향해 "넌 찍혔어!"라는 말로 그 신입 직원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내 뒷자리에도 공채로 들어온 타 부서의 신입 남자 직원이 한 명 있었는데 전날 야근을 하고 관리자들과 새벽 4시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에 참석을 했다가 다음날 5분 지각했다는 이유로 하루종일 서서 일할 것을 지시받았고 그렇게 그 직원은 하루 종일 선 채로 일을 해야 했다. 그 상황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설마 말이 그렇지 1-2시간 후에 앉히겠지 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그 신입직원은 정말로 퇴근시간까지 서서 근무를 했다. 다리가 많이 아팠을 신입직원이 잠깐 앉으려는 자세만 취해도 그 부서의 부장님은 앉지 말라며 고함을 질러댔고 그 부서의 남자 대리도, 과장도 그 직원을 감싸주기는커녕 그 직원의 옆을 지날 때마다 "에그. 그럴 줄 알았다. 똑바로 서있어!"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남동생이 없는 나였지만, 남동생 같은 생각이 들어 하루 종일 화가 솟구쳐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또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외국계 기업에서 일을 할 때는 직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만큼 주어지는 업무와 책임도 많았다. 어느 누구든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일은 없었다. 직원들이 10시까지 야근을 하면 이사님은 11시까지 남아계셨다. 그렇기에 직원들은 이사님이 높은 연봉을 받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나 불만을 품지 않았다. 하지만 이직을 한 국내 회사에서는 부장님께 결재를 받으러 가면 부장님은 항상 인터넷 뉴스나 동영상을 보고 계셨고, 심지어 영화를 보고 계실 때도 많았다. 하루 종일 특별히 주어진 업무 없이 직원들이 올리는 결재 서류에 무심히 사인을 할 뿐이었다. 새로운 회사의 업무강도는 전 직장보다 덜했지만 나이 서른을 넘기니 왕복 4시간을 오고 가는 출퇴근 거리에 이미 진이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최대한 퇴근을 빨리 하기 위해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하루종일 전력질주를 하며 일을 했는데 그렇게 쉴 틈 없이 일을 하고 퇴근시간을 조금 넘겨 퇴근을 하려고 하자 팀장님께서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불렀고 다른 팀원들은 아직 업무를 마치지 못했는데 자신의 일이 끝났다고 퇴근을 하려 하는 내 태도를 지적하며 남아서 다른 직원의 일을 도우라고 했다. 팀원들과 같은 업무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동료들과 업무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는데 내가 맡은 업무를 끝내고도 퇴근을 할 수 없다면 굳이 내가 다리를 꼬아가며 화장실까지 참으면서 업무를 빨리 끝낼 이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전 직장에서 워낙 많은 업무량을 소화해 내며 일을 했던 터라 빠른 업무 속도가 몸에 배어 있었지만 이후로는 굳이 일을 빨리 끝내려 애쓰지 않았다. 이렇듯 새로운 회사에서의 조직 문화가 나한테는 너무 맞지 않았다. 하지만 주어진 일에는 최선을 다했고 새로운 업무를 배우기 위해 이듬해에는 신생부서인 전세자금대출팀으로 부서이동을 했는데 다행히 좋은 선임자를 만나 수월하게 일을 잘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 일을 한다 한들 계약직을 벗어나기는 어려웠고 매년 계약 연장을 다시 해야만 했다. 계약직 직원 중에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사례가 있었지만 업무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무조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 시기의 회사의 재정상황이나 방침에 따라 몇 년에 한 번 꼴로 근무한 기간이 더 오래된 직원을 우선순위로 소수의 인원에게만 기회가 주어졌다. 또한  정규직으로 전환이 된다 하더라도 그뿐일 뿐, 승진의 기회는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다. 사실 나는 명예욕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 탓에 윗사람한테 아부 한번 할 줄 몰랐지만 일을 통해 느끼는 성취감을 통해 내 존재의 이유와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기에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다는 것에 꽤나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오랜 학창 시절 동안 나보다 더 열심히 살아왔을 테고 그 노력에 대한 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력을 중시하는 국내 기업에서 나는 회사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다른 사람의 승진축하 파티가 열릴 때면 이따금씩 슬픈 마음이 들곤 했다. 나는 보람도 성취감도 없는 생활을 이어가며 그들만의 잔치에 들러리를 서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몇 년 후 회사의 재정 악화에 따른 구조조정 방침에 따라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던 신생부서의 계약직 직원이었던 나는 계약 연장이 되지 않았고 그렇게 또다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로도 나는 구직활동을 하고 새로운 직장에 들어갔지만 오랜 경력과 업무능력과는 상관없이 계약직으로 전전해야만 했다. 그리고는 결국 다니던 회사가 매각 절차를 밟으면서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나는 또다시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번번이 운이 안 좋았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 뭐 하나 뜻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만 같았다. 학창 시절에 내가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을 했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고 한 번의 시험으로 남은 수십 년의 생이 결정되는 것 같은 생각에 그래도 인생이 최소한 쓰리아웃제는 돼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드라마 ‘미생’ 이 한창 인기리에 방영되었을 무렵, 나는 드라마의 주인공인 장그래를 보면서 나를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화려한 스펙을 가진 직원들 사이에서 고졸 출신의 장그래가 고군분투를 하며 겪는 에피소들들이 내 경험과 매우 유사한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을 한 사람들이 발라드 음악을 들으면 모두 자신의 얘기와 같이 느껴지듯 이런 마음도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점점 시청률이 올라가고 화제가 되자 여러 사람들에게 연락이 왔다.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인 장그래를 보면서 내 생각이 났다는 것이었다. 여러 차례 그런 연락을 받자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아. 내가 드라마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봤던 내 모습도 장그래 같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 자신이 한없이 가엾게 느껴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부터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고 일을 하면서 번 돈으로 학자금 대출을 갚고, 부모님 빚을 갚는데 조금이나마 도움도 드렸다. 그렇게 쉴 틈 없이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서른을 넘긴 나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고 이뤄낸 것도 없었다. 이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앞으로의 삶이 암담하게만 느껴졌고 강한 불안감이 올라왔다. 쥐고 있던 모래알이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는 듯했다. 지난 삶이 허무하게 느껴졌고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 한없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고요히 울음을 삼키는 것일 뿐 공허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이전 14화 나의 아버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