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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책방 May 15. 2024

인간실격

인간실격, 아무것도 되지 못한 나의 이야기.

사랑하는 아부지, 아마도 나는 언젠가 마흔이 넘으면 서울이 아닌 어느 곳에 작은 내 집이 있고, 빨래를 널어 말릴 마당이나 그게 아니면 작은 서재가 있고, 아이는 하나 아니면 둘? 운이 좋으면 내 이름의 책. 전혀 안 팔리는 책이어도 좋은 그런 책이 서점 구석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그런 사람이 돼 있을 거라고, 그게 실패하지 않는 삶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전부 다 이루지는 못하더라도 그중에 하나, 아니 두 개쯤 손에 쥐고서 다른 가지지 못한 것들을 부러워하는 그런 인생. 그게 내 마흔쯤의 모습이라고. 그게 아니면 안 된다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무엇이 이토록 두려운 것일까요? 아부지. 어쩌면 나는 아부지한테 언젠가 이 말을 하게 되는 일이 사는 내내 가장 두려운 일이었던 것 같아요. 아부지 나는 40년을 넘는 시간 동안 아무것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되지 못한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고 싶지 않아요. 아니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사실 저도 무슨 일이 저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누군가 들으면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죽겠다 그러냐고 화를 내거나 비웃을 수도 있는데, 그런 작고 흔한 일들이 저에게 있었을 뿐이니까요.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그런 대단한 이유가 아니라서 죄송해요. 나를 구하지 못해서. 나를 지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드라마 ‘인간실격’中 부정(전도연)의 유서 -          


나는 책을 읽을 때 마음에 와닿는 문장들에 줄을 그어가면서 읽는다. 삶이 너무 힘들 때는 책 속에서 본 한 줄의 문장이 힘든 삶을 부여잡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기억이 희미해지고 또 삶이 버거워질 때면 책을 다시 꺼내서 줄을 그어 놓은 문장들만 읽어도 책 한 권을 다시 읽은 것 같은 효과를 내기도 한다. 그런데 드물지만 간혹 어떤 책들은 문장들 하나하나가 다 너무 주옥같아서 줄을 긋는 게 무의미해지는 책들이 있기도 하다. '인간실격'이라는 드라마가 나에게는 마치 그런 책과 같은 느낌이었다. 명대사를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매 회차마다 주옥같은 대사들이 마음을 저리게 했고, 명대사를 기록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어버렸다. 시청하면서 울지 않은 회차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극 중의 인물에서 나를 보았고 나의 아버지를 보았다. 극 중 인물 모두의 삶이 다 애처롭게만 느껴졌다.      


나는, 내가 학창 시절에 꿈꿔왔던 나의 미래는 최소한 지금의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마흔 언저리가 되면 나는 나이에 걸맞는 사회적 지위를 가진 멋진 커리어우먼으로 살거나 그게 아니면 귀여운 아이들의 엄마로, 한 남자의 아내로 가정을 돌보며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두 가지를 전부 실현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대단한 꿈이 아니었기에 이루지 못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느덧 불혹을 넘긴 지금의 나는, 그 무엇도 되지 못했다. 그로 인한 상실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괴롭게 만들었고 나는 한 번씩 감정이 복받칠 때면 꿈이라고 말하기에도 너무 소박한 이 일들을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것에 대한 좌절감을 지인들에게 표현하곤 했다. 보통의 삶이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전선에 뛰어든 나는 매사에 최선을 다했고 치열하게 살아왔다. 나의 친구들과 지인들은 나를 보며 “넌 정말 열심히 사니까 반드시 성공하게 될 거야”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40대가 된 지금까지도 그런 얘기를 듣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으면 지금쯤은 성공까지는 아니어도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어야 하는 게 맞는데 무엇이 문제였는지,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모든 것이 문제였던 것 같기도 했다. 시작부터가 잘못된 것일까? 좋은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고 학력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세상 밖으로 내던져졌고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삶의 계획과 진로를 자주 변경하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다. 불안정한 상황 속에 경제적 빈곤은 늘 따라다녔다. 물론, 많은 청년들이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사회로 나와 어른으로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나와 같이 반복되는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사회에 잘 안착하여 안정된 삶을 살아간다. 패배자의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무엇이 잘못되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인생은 지지리도 운이 없었던 것, 그것이 문제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온 우주가 나를 막고 있는 듯 모든 상황이 나를 따라주지 못했다. 기회가 주어졌던 직장은 체력적인 한계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이직을 한 후에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예쁜 가정을 이루고 구석구석 나의 손길로 꾸며진 보금자리에서 나와 그를 반씩 닮은 아이를 낳아 사랑하는 그와 우리 아이의 삶을 함께 이끌어주고 응원하며 살아가고자 했던 꿈도 나에게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사회적, 경제적 안정을 위해 도전했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순간 나는 암환자가 되었다.

나이에 걸맞는 사회적 지위, 부모라는 이름, 포근한 나의 보금자리. 그 무엇도 얻지 못한 중년의 아이. 지금의 나는 학창 시절의 내가 전혀 상상해보지 못했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보통사람, 보통의 삶은 나에게는 매우 닿기 어려운 것이었다. 누가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 고 했던가. 살면서 힘든 일을 겪어내다 보면 내면이 더 단단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처럼 이제 나는 작은 일에도 쉽게 무너진다. 젊을 때 고생은 트라우마만 남길뿐이었다.

이 삶은 나에게 주어진 벌 같았고 징역형을 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계속되는 난관을 겪으며 도장 깨기 하듯 하나씩 극복해 나가며 살아왔지만 한도 끝도 없었다. 거대한 세상의 손은 거칠게 내 멱살을 잡고 차갑고 단단한 벽으로 나를 이리저리 거세게 밀어붙이고 주저앉히는 것만 같았다. 실패한 삶이었고 더는 희망도 없었다. 황폐하고 적막한 대지를 홀로 힘겹게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인간실격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특히 부정(전도연)과 아버지(박인환)가 버스정류장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한참을 오열했다.     

 

부정 : 아부지, 나는 실패한 것 같아. 나 실패한 것 같아요. 그냥 내가 너무 못났어.


아버지 : 그게 뭔 소리여? 너는 내 자랑인데.


부정 :  나 자랑 아냐 아부지. 나 자랑이라고 하지 마. 나 그냥 너무 나빠진 것 같애. 그냥 다 나쁜 거야. 그냥 이유가 없어요. 길에서 고생하면서 키워준 아버지 생각하면서 열심히  노력하려고 했는데 노력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겠어. 아부지 나는, 아무것도 못됐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것도 못됐어. 결국 아무것도 못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너무 외로워 아부지. 아부지도 있고,

정수도 있는데 그냥 너무 외로워     


아버지 :  외롭지. 외로워. 왜 그걸 몰라. 괜찮아.


부  정 :  그냥 사는 게 너무 창피해


아버지 :  울지 말아. 기운 없어. 울지 말어


부  정 :  나는 아부지보다 가난해질 것 같아. 더 나빠질 거 같아. 아부지. 그러면 아부지 너무 속상하잖아.


아버지 :  아버지 괜찮어. 이러지 말어 부정아. 아버지 속이 다 없어지겠다.


부  정 :  아부지 나 어떡해요. 나 아버지...난, 나는 자격이 없어요.     


왜 유독 나는 박인환 배우님의 모습만 봐도, 극중에서 입고 나온 오렌지색 점퍼만 봐도 눈물이 나는지 생각해보니 부정(전도연)과 아버지(박인환)의 대화가 내가 예전에 우리 아버지랑 나눴던 대화 내용과 너무 닮아 있어서, 그래서 이 장면에서 그렇게도 오열을 했던 것 같다.


연세도 많으시고 여러모로 몸이 편찮으신 아버지는 불편한 몸 때문에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상심하고 계셨고 그런 아버지한테 용기를 드리고 좋은 말을 해드리고 싶어서 시작한 대화였다. 분명 좋은 의도로 시작한 대화였는데 점점 대화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고 결국 난 울음을 터트렸다.      


아빠. 너무 걱정하지마. 누구나 다 언젠가는 일을 할 수 없는 순간이 오는 거잖아.

내 친구 아버지는 뇌 수술하시고 나서 일도 못하시고 집에만 계신지 10년이 넘었는데?

늙고, 병이 들고 하는 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일이잖아. 아빠만 그런게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아빠가 아프면 우리가 보살펴 줄거고 아빠가 일을 못하면 오빠랑 내가 생활비 보태주면 되지. 그래도 아빠는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해서 가정도 이루고 우리를 키우면서 자식 키우는 재미도 봤고 다 경험했잖아.

그런데 난 아무것도 못했어. 내가 아빠보다 상황이 더 안 좋은 것 같아. 나 나중에 고독사하면 어떡하지? 나는 나중에 요양병원에 있어도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을거야. 전에 TV에서 보니까 요양병원에서 자식들이 잘 찾아오지 않는 어르신들은 간병인들한테 폭행도 당하고 그러던데 나 그러면 어떡하지?      


OO 야~ 아빠가 죽으면 어떻게든 너는 꼭 책임지고 도와줄게!     


죽으면 다 할 수 있는거야? 그러면 부모님이 돌아가신 자식들은 잘 되지 않은 자식이 없겠네? 아닌가? 아빠는 장기기증 할거니까, 여러사람 살리고 가는 거니까 아빠한테 그런 권한을 좀 주려나?     


그럼. 아빠가 피부만 빼놓고 다 기증한다고 했는데.     


아빠 눈도 기증한다고 했어? 눈은 하지 말라고 했잖아. 저승길 갈 때 앞은 똑바로 보고 걸어야 할 거 아냐!     


응. 눈도 다 한다고 했던 것 같아. 그러니까 아빠가 죽으면 어떻게든 넌 꼭 도와줄게.     


아빠. 그러면. 아빠한테 그런 힘이 생긴다면.

꿈에 나타나서 로또번호 불러주고 그런거 말고

나 좀...나도 좀 데려가주라.     


생각해보니 그날 아버지와 나의 대화가

어쩌면 극중 부정과 아버지의 대화보다 더 슬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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