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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책방 May 26. 2024

죽음에 대한 탐구

마음공부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린 시절부터 어딘가 모르게 별난 아이였던 것 같다. 나는 어려서부터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곤 했는데 죽음에 대한 사유가 시작되면 꽤 오랜 시간 동안 매우 깊이 생각에 빠져들었고 그러다 보면 그다지 좋지 않은 오묘한 느낌이 들어서 강제로 생각을 멈추곤 했다. 몸이 아팠다거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것도 아니었는데 난 왜 그 어린 나이에 지금 이 나이에도 감당하기 어려운 그 무거운 주제에 대해 그렇게까지 깊은 생각을 했던 것일까. 동네 작은 사찰에 불교대학 강의를 들으러 다니던 어느 날, 사찰에 갈 채비를 하던 중에 문득 어린 시절에 놀이터에 앉아 노을이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에 빠져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희한한 아이였구나'하는 생각을 하고는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사찰로 향했다. 그날 스님께서 강의를 하시던 중에 스님께서는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었다면서 "제가 좀 특이했죠?"라고 말씀하시며 웃으시는데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렸던 그날, 나와 텔레파시가 통하기라도 한 듯 나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생각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스님의 이야기가 너무 신기하기도 하면서 강한 동질감이 느껴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서울대 출신의 일묵스님 그리고 ‘소나무’라는 프로그램으로 유명해진 광우스님. 두 분 모두 죽음에 대한 공포 또는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를 계기로 출가를 하시게 되었으니 어쩌면 깨달음을 향한 갈망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에서부터 비롯되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죽음에 대한 사유를 할 때면 특히 난 ‘존재의 소멸’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죽은 후에 내 육신은 사라진다지만 내 생각과 내 의식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와 내가 죽은 후에도 세상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당시 내가 했던 생각들을 성인인 지금의 내가 알고 있는 언어의 형태로 표현한다면 대충 이러했다. 내가 없는 채로 세상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세상이 존재한다? 하지만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도 결국 내 의식이 있어야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니 내 의식이 사라지면 결국 세상도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내가 없어도 세상은 여전히 존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계속 존재하고 나는 사라진다. 아니다. 내가 없다면 결국 세상도 없다. 이러한 생각들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항상 같은 순서로 결론 없는 생각들이 이어졌고 결국은 그다지 좋지 못한 오묘한 느낌이 들면서 생각을 멈추곤 했었다. 그리고는 놀이터에 있는 다른 아이들과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각자의 세상을 살고 있는 그들을 멍하니 한참을 바라보다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답이 없는 이 의문들에 대한 생각을 주로 하던 시기가 초등학교 2-3학년 때였는데 이후로는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강제로 생각을 멈춰버렸고 언제부턴가는 아예 이런 생각들이 일어나질 않았다. 하지만 오랜 기간 멈춰있던 이 생각들은 암진단으로 인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뇌종양 수술 후유증의 고통으로 죽음을 갈망하게 되면서 다시금 ‘죽음’에 대한 의문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 내가 했던 생각이 세상과 나의 관계에 대한 실재론과 관념론에 대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는 인간과 세상과의 관계와 죽음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를 시작했는데 죽음과 관련된 책들을 모조리 읽기 시작했다. 철학자, 심리학자, 성직자, 의사가 쓴 책부터 사후세계, 임사체험에 대한 신비스러운 책까지 모조리 읽어 나갔다. 많은 책을 읽으면서 세상과 나와의 관계에 대해 어렴풋이 개념이 잡히는 듯했지만 막연한 느낌일 뿐,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명확하게 인식되진 않았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죽음에 대해 파고들면 들수록 삶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죽음을 마주해야 삶이 우뚝 선다'

서강대 철학과 최진석 교수님의 강연 주제이다. 교수님은 어린 시절 하늘에서 별똥별이 지는 것을 보는 순간 그것이 바로 자신의 죽음, 자신의 소멸과 관련돼서 다가왔고 죽는다는 사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공포로 다가왔다고 한다. 그렇게 죽음에 대한 공포가 40대 후반까지 무려 3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잠을 자려고 누우면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듯 매번 잠이 들려는 순간 죽음이 의식이 되면서 심한 공포에 휩싸여 체온이 떨어지고 식은땀을 흘리며 소스라치게 놀라며 깼고 그렇게 깨고 나면 잠옷을 갈아입고 다시 잠자리에 드는 그 과정을 30년간 계속 반복했다고 하셨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느꼈던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 유한하다는 사실을 항상 알게 해 주었고 그것이 지금의 자신을 만든 근원적인 힘이었다고도 한다. 그래서 지금도 아침에 눈을 뜰 때면 '나는 금방 죽는다'를 주문처럼 외운다고 하신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상황으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던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생을 마감하는 날, 그 죽음이 기다려진다고.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이불 속에 들어가 눈을 감고 잠을 청할 때면 이불속의 온기가 온몸을 감싸는 듯한 포근한 느낌이 들면서 편안한 감정을 느낀다면서 죽는 그 순간도 이불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할 때의 그 편안한 기분과 비슷할 것 같다고 말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 같지만 사실 죽음이 슬픈 이유는 존재의 소멸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대한 사유를 해왔던 나는, 언젠가 맞이하게 될 부모님과의 이별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면 주체할 수 없는 깊은 슬픔에 빠져들곤 했다. 사랑하던 남자친구와의 이별 후유증도 유난스러웠고 이직을 할 때면 동료들과의 이별을 힘들어하며 눈물을 흘렸다. 감정적으로 예민한 나는 이별에 몹시 취약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든 존재는 소멸하기에 이별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겪게 될 피할 수 없는 일이며 특히 나에게는 더더욱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이처럼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동반되기에 부정적이고 슬픈 단어로 느껴지지만, 가장 강력한 영적 수행 중 하나는 자신의 육신을 포함한 물질적 형상의 죽음에 대해 깊이 명상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나는 육체적 고통으로 인해 죽음에 대한 공포와 죽음에 대한 갈망의 감정이 뒤섞여 몹시 괴로워했고 마치 내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죽음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면서 사실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누구도 내일을 장담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법륜스님은 저서 ‘인간 붓다’에서 “사람의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비유한다면 생의 시작은 첫 페이지이고 생의 끝은 마지막 페이지가 아니라 홀수페이지가 생이라면 짝수페이지는 사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삶과 죽음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붙어있는 것이기에 어쩌면 우리는 늘 죽음을 인식하고 삶을 점검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죽음에 대한 사유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선명하게 만들고 지금 이 순간, 이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최진석 교수님 세바시 강연 中>

인간이 삶 속에서 갖는 가장 높은, 가장 근원적인 질문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 두 질문은 두 가지 문장으로 되어있지만, 사실은 하나의 질문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깊이 살피는 사람은 어떻게 죽을 것인지가 답으로 나올 것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깊이 살피는 사람한테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삶과 죽음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닙니다. 삶이 죽음을 의미 있게 하고 죽음이 삶을 삶으로 살려냅니다. 우리가 내 삶을 완성의 길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자기가 자기를 궁금해할 때만 가능하며 자기가 자기로 분명해질 때만 가능합니다. 자기를 분명하게 하는 자극 중에 가장 센 자극은 죽음에 대한 인식입니다. 죽음을 피하지 말고 마주해 보면 우리 삶이 자신만의 고요한 삶으로 우뚝 설 것입니다. 삶이 힘든 분들, 길을 잃은 분들, 자기가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분들은 죽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을 인식하면 안개가 걷히면서 자기가 자기를 향해서 걷는 이 길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는 모든 것이 허망한 것임을,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영화의 명대사가 생각난다.

"뭣이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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