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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책방 Jun 20. 2024

신의 길, 인간의 길

마음공부

극심한 육체적 고통으로 한참 사경을 헤매고 있을 무렵, 주변의 개신교인들로부터  “절에 다니기 때문에 아픈 것 같다. 하느님을 믿어보는 건 어떻겠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개신교에서는 ‘하나님’, 가톨릭에서는 ‘하느님’이라고 표현하는데 편의를 위해 ‘하느님’으로 통칭하겠다.) 요양병원에 입원을 했을 때는 옆방에 있는 환자가 대뜸 나한테 종교가 뭐냐고 묻더니 불교라는 대답을 하기가 무섭게 불교의 논리는 말도 안 되는 가짜라고 말을 하면서 전지전능한 하느님과 성경말씀에 대해서 쉴 새 없이 한참 동안을 말을 했는데,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만 잘 보이면 된다고 말했다. 자신은 회개했고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이들. 영화 밀양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리라. 이 점을 깊게 생각해 봐야 한다.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불법을 전하며 포교활동을 하지만 무조건 부처님을 믿어야 극락에 도달할 수 있다는 기독교식 전도활동은 하지 않는다. (물론 ‘극락’이라는 것도 개신교에서 말하는 ‘천국’과는 다른 개념이다) 종교가 무엇이든 종교가 있든 없든 그저 착하고 바르게 살면 그것이 곧 부처의 삶이라고 말하며 참되게 사는 사람, 진리답게 사는 사람을 불교신자라고 하기 때문이다.


20대 중반 무렵,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친구를 따라 교회에 다녔던 적이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교회를 가는 것에 큰 거부감은 없었다. 성경에 대한 해석이 다른 부분이 있는 것일 뿐 같은 신을 믿는 종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니면서 조금씩 믿음이 커져갔고 찬송가를 따라 부를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그 시기에 이상하리만큼 안 좋은 일들이 겹쳐 일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갑자기 건강이 심각하게 안 좋아졌는데 교회 친구들은 이런 나를 보고 악마에게 시험을 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교회에 다닐 때 아픈 건 악마가 시험해서이고 절에 다니면서 아픈 건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라고 한다. 병에 걸린 개신교 신자가 병마와 싸워 이기면 하느님이 도우셨다고 할 것이고 결국 병마를 못 이기고 죽음을 맞이하면 하느님에게 쓰이기 위해 하느님께서 일찍 데려가신 거라고 할 것이다. 이런 것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하지 않던가. 아무튼 열심히 다니던 그 교회는 심하게 헌금을 강요하고 헌금의 액수와 믿음의 정도가 비례한다는 식의 설교를 자주 하는 바람에 정나미가 떨어져 더 이상 나가지 않게 되었다. 성당에 다닐 때는 누구든 헌금(봉헌)과 관련된 말을 일절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헌금을 강요하는 설교를 듣는 것이 몹시 거북하게 느껴졌고 심한 반감이 들어서 발길을 완전히 끊어버리게 된 것이다. 교회가 성당과 달랐던 또 한 가지 점은, 성당에서는 신자가 이사를 가게 되면 그곳에 있는 성당을 다니라고 권한다. 어디서든 하느님만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먼 거리로 이사를 가더라도 꼭 자기네 교회에 오라고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성직자들과 종교인들이 부패했다. 비단 교회뿐만이 아니다. 스님들의 권력 투쟁에 대한 기사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렇기에 교회를 다니든, 절에 다니든 우리는 성직자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성경과 경전의 가르침 속에 숨겨져 있는 근본적인 의미와 진리를 찾는 것에 집중을 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현명한 종교인의 자세일 것이다.   

  

조계사에서 처음 입문강의를 듣던 날, 경전에 있는 판타지적인 내용은 모두 허구이니 글자 그대로를 보지 말고 그것이 의미하는 상징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는 스님의 말씀은 그동안에 내가 갖고 있던 종교의 개념을 완전히 깨뜨려버렸고 종교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교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여 나를 넘어선 초월적인 존재를 믿고 의지하고 바라는 ‘Religion’으로의 종교를 의미한다면 불교는 ‘으뜸 되는 가르침’이라는 뜻의 종교(宗敎)로써 인간과 세상과의 관계를 탐구하고 마음공부를 하는 하나의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특정 인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은 모든 자를 일컫는 말이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석가모니 부처님도 그중 한 분이시다. 그러하기에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믿는다”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굳이 표현한다면 “(가르침을) 따른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물론 불교도 기복신앙적인 느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불교가 전해지는 과정(인도->티베트->중국->한국)에서 각 나라의 토속(민간) 신앙, 유교사상, 도교사상 등이 융합되어 전해졌고 이러한 것을 ‘습합’이라고 표현하는데 예를 들면 산신각이나 칠성각의 경우는 도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기도를 올리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었다면 그 문화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불교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이런 문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우리 어머니 나이대의 불교신자들은 지금 젊은 세대들처럼 불교이론에 대한 강의를 제대로 듣고 불교를 접하기보다는 민간신앙과 접목된 기복신앙적인 불교로 받아들이셨던 분들이 많기에 불상이나 관세음보살상을 향해 절을 하면서 바라는 것을 열심히 기도하시고 소위말해 ‘기도발’이 잘 받는다고 소문난 절을 찾아다니며 기도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한 스님께서는 영험하다는 기도도량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역사적으로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내려온 도량의 경우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면서 발생된 응집된 에너지와 파장의 영향이 있을 수는 있다”라고 말이다. 스님들 중에서도 기도를 강조하면서 기복신앙적인 강의를 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신다. 불교에서는 ‘근기에 맞게 설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중생이 교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에 맞게 설법을 한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삶의 괴로움을 겪으면서 초월적인 존재에 의지하고 싶은 마음으로 종교를 찾는 사람들이 많기에 일단 ‘기도’라는 '방편'으로 그들 마음의 급한 불을 끄게 한 후에 신도들의 근기에 따라 진짜가 무엇인지를 조금씩 꺼내 보여주신다. 이렇듯 불교는 ‘반드시 신이 존재해야 종교’라고 생각했던 종교에 대한 나의 개념을 완전히 깨뜨렸는데, 같이 강의를 듣던 어떤 이는 개신교에서 불교로 개종을 했다면서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신심이 떨어진다고 했다. 그는 그저 신을 ‘하느님’에서 ‘부처님’으로 바꾸고자 한 것이기 때문에 ‘신’이 없는 불교의 이야기는 종교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지고 계셨던 삶의 철학과 사상이 오히려 내 마음을 크게 동요시켰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가득히 차오르는 벅찬 감정을 느꼈다.    

 

요즘은 유튜브를 통해 여러 스님들의 법문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불교의 교리는 소승불교, 대승불교에 따라서도 교리의 차이가 있고  법문을 하시는 스님들의 견해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보니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스님들의 법문들을 접하게 된 불자들은 꽤나 많은 혼란을 겪는 듯하다. 나 또한 그랬다. 그중 하나가 윤회에 대한 문제이다. 어떤 스님은 윤회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또 어떤 스님은 불교가 힌두교 문화권에서 발생된 종교이기 때문에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것일 뿐, 윤회는 불교의 교리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윤회가 있다고 믿어왔던 불자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본인이 알고 있던 불교 교리의 근간을 흔드는 말이기 때문에 큰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고 '윤회가 없다면 내가 착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지?'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요즘 스님들은 불자들로부터 "스님. 윤회가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어떤 스님은 있다고 하고 어떤 스님은 없다고 하는데 도대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라며 정답을 요구하는 질문들을 꽤나 많이 받고 계신 것 같다. 가톨릭처럼 중앙집권적으로 어떤 한 견해를 채택하고 "이게 맞습니다!"하고 공인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답답한 노릇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생존해 계실 때에도 제자로부터 윤회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석가모님 부처님이 생존했던 당시 인도를 장악하고 있던 힌두교에서는 윤회사상을 주장했고, 윤회사상은 일반인들한테는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 같다.'저 사람은 저렇게 잘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거지같이 사는 거지?'라고 억울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아하!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다 내가 전생에 지은 업보 때문이구나. 그렇다면 현생에서  착하게 살면 나도 다음생에는 부자로 태어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윤회에 대한 제자의 질문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독화살의 비유를 드시며 말씀하셨던 것은 매우 많이 알려진 유명한 일화다. 사람이 독화살에 맞았다면 독화살을 뽑고 독을 치료할 생각을 먼저 해야 하는데 이 독화살을 누가 쏜 건지, 어디서 온건 지를 생각하는 것이 사람들이 사후세계를 궁금해하는 것과 같다며 당장 직면한 삶의 고통을 해결할 방법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죽은 후의 세계를 궁금해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며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말고 현재 닥친 삶의 고통을 해결할 방법을 탐구할 것을 말씀하셨다. 초기불교경전에서는 부처님께서 윤회에 대해서 설하신 내용들을 볼 수가 있는데 힌두교에서 말하는 윤회와는 차이점이 있다. 힌두교는 고정불변(영원불멸)하는 실체가 있다고 믿고 그 실체가 윤회한다고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주장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힌두교에서의 윤회는 전생(과거)의 업보에 의해 결정된 현재의 삶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하지만 불교에서의 윤회는 전생(과거)의 업에 의해 현재의 삶이 영향을 받는 건 맞지만 선업을 짓거나 공덕을 쌓음으로써 현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스님들은 이것을 설명할 때 소금물에 비유를 하는데 과거에 지은 악업의 결과를 소금이라고 한다면 일정량의 소금이 작은 물컵에 담겨 있느냐 큰 물컵에 담겨 있느냐에 따라 약간 짠 소금물이 될 수도 있고 매우 짠 소금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삶에서 선행을 많이 베풀면 전생(과거)에 지은 내 악업을 돌려받는다 해도 큰 물컵에 담겨있는 소금물을 마시는 정도로 악업의 결과가 희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탄생에 대해 인연법에 의해 어떠한 조건과 인연이 만나 형성된 것으로 설명한다.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의 저서 ’ 떨림과 울림‘에서는 “원자론의 입장에서의 죽음은 단지 원자들이 흩어지는 일이며 원자들은 불멸한다”라고 말한다. 양자물리학에서 말하는 원자가 영혼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죽은 후에 불멸하고 남은 원자가 또 어떠한 조건과 인연을 만나게 되면 다시 인간으로 탄생하게 될 수 있고 그것이 곧 윤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나는 윤회가 없길 바란다. 이 삶을 마지막으로 내 육신을 포함한 내 영혼, 의식, 감각 등 모든 것이 완벽히 소멸되기를 바란다. 그렇기에 윤회가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한동안 나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건 사실이지만 윤회가 있든, 없든 윤회에 대해서 스님들께 질문을 해서 답을 듣는다 한들 그것이 정답일까? 그저 또 한 명의 스님의 견해를 듣는 것일 뿐 정답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스님들이 일반 불자들보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더 앞서 많은 공부를 하신 건 사실이지만 결국 스님들과 불자들은 모두가 깨달음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동일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불자들에게 스님들은 스승 같은 존재일 뿐, 스님을 신과 동일시하거나 엄청나게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여 스님의 말씀이 무조건 진리라고 착각하면 안 될 것 같다. 목사님 말씀이 곧 하느님 말씀인 양 착각하고 목사님한테 의존하는 일부 개신교 신자들이 항상 문제가 되듯 말이다. 나는 한 스님의 견해를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여러 스님들의 견해를 듣고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내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만한 가르침을 흡수하고 있다. 마음공부를 하고 있고 영적인 성장이 내 삶의 목표이며 한 명의 불자로서 많은 의문도 가져봤지만 사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처럼 지금 당장 겪고 있는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을 방법을 생각하기도 바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회가 없다면 굳이 착하게 살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윤회가 있어야 착하게 살 것이라는 생각은 결국 다음 생의 내 안위를 위한 이기적인 목적이 있는 선함일 것이고 나의 생각은 선하게 사는 삶 그 자체가 현재의 내 삶을 충분히 가치 있는 삶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육체적 고통으로 인해 죽음에 대한 탐구를 하고 마음공부를 하면서 종교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되면서 2008년에 SBS에서 방영되었던 '신의 길, 인간의 길'이라는 다큐를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되었는데 그 당시 개신교인들이 SBS에 찾아가서 방영중지를 외치며 항의도 하고, 꽤 이슈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큐가 방영되고 몇 년이 지난 후, 친구의 남편이 이단이라 불리는 어떤 교회에 빠지려는 것을 내가 추천한 이 다큐를 보고 맘을 접었던 일도 있었다. '하느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 죽은 후 천국에 갈 수 있다'라는 단순한 논리를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친구와 종교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 친구가 한 말이 기억에 남았다. 하느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단순 논리를 믿는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 진짜 뭐가 있긴 있는 건가 싶을 때도 있다고. 친구를 만나고 집에 돌아와서 친구가 한 그 말을 떠올리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단순논리를 믿고 열광하는 것인가. 나를 넘어선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믿는 것.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힘든 일이 닥쳤을 때 누군가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한테 의지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 아닐까?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고 개인의 수행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종교보다는 보이지 않는 어떤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한테 기도하고, 구하고, 바라게 하는 기독교의 교리와 마케팅 방식이 인간의 본질을 더 건드리고 자극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큐에서 종교학자는 말한다. "성경을 믿으세요! 신성한 문학으로 절대적으로 진지하게 말입니다. 하지만, 비유로 의도하고 우화적으로 쓴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그것은 성경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게 합니다"      


성경이나 경전이나 결국은 사람이 만들었고 긴 시간을 지나오면서 시대에 맞게 수정된 내용도 많다. 성경에도 초기에는 윤회에 대한 내용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윤회에 대한 내용이 삭제되었다. 내가 법문을 듣는 스님들 중에는 기복신앙적인 강의를 하는 스님도 계시고,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내용들은 일절 언급을 하지 않는 스님들도 계신다. 내가 법문을 자주 듣는 스님 중 한 분인 법상스님께서는 법륜스님과 같은 은사스님 밑에서 가르침을 받으셨는데  은사스님께서는 신통력으로 유명한 분이셨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오랜 수행을 하다 보면 신통력이 생기기도 한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깊은 수행을 통해 감각적 지각이 민감해진다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신통력이 자제하기로 유명한 그 스님밑에서 가르침을 받은 법륜스님과 법상스님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이야기는 일절 입에 올리시지 않으신다. 그런데 실제로 은사스님께서 가끔씩 신통방통한 행동을 하시는지, 어느 날은 같은 스승밑에서 배운 제자들이 모여서 대화를 하던 중에 은사스님의 신통력과 신비스러운 능력에 대해 각자 보고 들은 바를 이야기하면서 신기해했는데 그러한 모습을 보고는 법상스님께서 생각하시길, 아직 살아계신 스승의 이야기도 이렇듯 제자들의 입을 통해 신격화되다시피 하는데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이 모여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경전을 만들고 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첨가되고 각색되었을지 예상이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누군가가 종교를 선택하거나 공부함에 있어 고민이 된다고 말한다면, 어떤 종교를 선택하든 하나의 학문을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공부하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며 성경이든, 경전이든 그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 문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인문학과 철학을 같이 공부해 보는 것도 추천하고 싶다. 의외로 어떤 철학자의 말 한마디가 삶의 방향을 잡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어느 종교를 택하든 성직자와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말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특히 초심자의 경우 성직자에 대해 지나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목사님은 전부 착할 거라는 생각, 특히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걷는 스님들의 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사실 성직자들도 완전한 존재는 아니기에 실수를 할 수가 있는데 어떤 이들은 성직자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가진 나머지 성직자의 작은 실수에도 크게 실망하고 동요하며 성직자와 신(또는 사상)을 동일시하여 아예 종교를 등져버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성철스님과 법정스님께서 그렇게 추앙을 받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사실상 아무리 스님일지라도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매우 드물고 힘든 일이며 어쩌면 우리와 같이 한 조직의 일원으로 생활을 하면서 구성원 간의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일도 발생할 수 있다. 나는 성직자를 선생님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 내 필요에 의해서 도덕선생님께 도덕이라는 과목을 배우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덕선생님이 반드시 학생들보다 더 도덕적일 거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훌륭한 성직자들을 욕되게 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존경받아 마땅하지만 성직자들에 대한 지나친 환상은 오히려 종교를 공부하는 데 방해요인이 될 수가 있다. 나는 모든 종교인을 존중한다. 어떤 종교든 선을 행할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를 공부하다 보니 점점 양자물리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불교와 물리학이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또한, 결국 모든 종교가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느낀 바를 누군가가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상대방이 납득이 되도록 설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오래전에 KBS에서 방영되었던 4부작 다큐멘터리 '다르마'를 보게 되었는데 다큐멘터리에서는 내가 느낀 바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3부에서는 물리학과 불교를 연결시켜 표현하였고 4부에서는 가톨릭과 불교의 교리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결국 모든 종교가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영상을 보는 내내 얼마나 마음이 벅차올랐는지 모른다.'산 정상은 하나, 가는 길이 다를 뿐'이라는 말이 실감 나게 하는 영상이었다. 최진석 교수님의 저서 '나 홀로 읽는 도덕경'에서는 “성경을 백번 읽은 사람과 한 번만 읽은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어요. 성경을 백번 읽은 사람은 불자들과도 평화롭게 지냅니다. 그러나 한 번만 읽은 사람은 불자들을 쉽게 적대시합니다. '반야심경'을 한 번만 읽은 사람과 백 번 읽은 사람 사이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반야심경을 백 번 읽은 사람은 기독교인과도 잘 지내지만, 한 번만 읽은 사람은 기독교인을 적대시합니다.”라고 말한다. 어떤 종교를 선택하든 문자 그대로를 인식하지 않고 그 문자가 말하고자 하는 하는 바를 깊게 들여다본다면 결국 모든 종교가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여러 스님들의 법문을 들으며 나름 열심히 마음공부를 하고 있지만, 아직 공부가 덜 된 탓인지 육체적 고통이 극심한 날이면 그간에 했던 공부들이 다 무용지물이 돼버리고 무너질 때가 많다. 어떤 날은 극심한 육체적 고통으로 인해 마음공부고 뭐고 그저 누군가한테 매달리고 울며 불며 애원하고 싶은 생각에 이웃종교로 넘어가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긴 고민 끝에 한 스님께 고민글을 올렸는데 언제나 그렇듯, 스님들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핵심을 찌르는 답을 주셨다. 스님께서는 오히려 나에게 물었다. “왜 안 아파야 하죠?” 그리고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누구나 태어난 이상,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은 피해 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문제상황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궤적으로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입니다.  다만, 내가 생각으로  '나는 건강해야 해'라는 기준을 정해 놓으면 바로 그 기준 때문에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나는 괴로운 나로 전락해 버리게 됩니다. 왜 모든 사람이 다 안 아파야 하죠? 그것이 진실일까요? 아닙니다. 지금 누군가는 아프고,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늙고 병들어 갑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또 모두에게 동등한 진실입니다. 진실에 완전히 내맡기고 받아들이게 되면, 몸은 아프지만 마음까지 괴로울 것은 없습니다. 스님께서는 꽤 긴 문장으로 정성스럽게 답글을 남겨주셨지만 간단히 요약하면 내용은 이러했다. 스님의 답변 글을 보는 순간 “어? 그러네?” 하는 생각과 함께 이 단순한 진리를 모르고 구구절절이 장황하게 긴 사연글을 남긴 내 자신이 민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무조건 건강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인다면 육체적 고통은 계속될지언정 마음만은 괴롭지 않을 거라는 스님의 말씀은 매우 당연하고 간단한 진리였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조계사에서 같이 강의를 듣던 도반이 과거에 있었던 누군가와의 마찰로 인해 시도 때도 없이 화가 치밀어 올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에 스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그냥 생각하지 마세요. 그거 되게 쉬운 건데”그저 내 마음 하나 턱! 하니 내려놓으면 된다는 스님들의 말씀. 그 쉽다는 그것이 나는 언제나 될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누군가가 아픈 나에게 앞, 뒤 부연 설명도 없이 “긍정적으로 생각해”라고 가볍게 던진 한마디가 오히려 상처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여러 가지 신체증상, 그리고 평생 나을 수 없다는 뇌종양 후유증으로 인해 경제활동도 하지 못하고 앞날이 막막했던 나에게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너무 성의 없는 말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연히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과 스님이 말씀하신 ’ 받아들임‘은 매우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 누구나 태어난 이상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저마다 오는 시기가 다를 뿐. 누구나 겪게 되는 과정이지 않은가. 그렇게 나는 이 삶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받아들이지 않고는 내가 도저히 버터 나갈 수가 없기에. 이번 삶은 이런 거라고. 그냥 이런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계속 마음공부와 수행을 이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육체적 고통이 극심한 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이것이 내가 반드시 겪어야 할 고통이라면 그저 마음공부와 명상수행을 할 수 있는 에너지정도는 남도록 그만큼만 아프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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